[스페셜1]
[박진표-허진호 대담] 도대체 왜 행복일까?
2007-10-11
정리 : 문석
사진 : 오계옥
<너는 내 운명>의 박진표 감독이 허진호 감독을 만나 <행복>을 묻다

<너는 내 운명> <그놈 목소리>의 박진표 감독이 허진호 감독을 만났다. 박진표 감독은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1998년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고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았다. 이 영화를 “스무번도 넘게” 보면서 영화감독이 되기를 희망했던 박진표 감독은 데뷔작 <죽어도 좋아!>를 갖고 2002년 부산영화제를 찾았고, 이때 부산의 한 커피숍에서 허진호 감독과 대면했다. 서로의 영화에 대한 호감에서 출발한 이 세살 터울 두 남자의 관계는 이내 형-동생이 됐고, 짬이 날 때마다 영화와 삶, 그리고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소곤거리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렇게 마음이 통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수백명과 인터뷰를 했던 박진표 감독의 경력 덕인지, 좀처럼 자신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속시원하게 털어놓지 않던 허진호 감독은 한 장면을 만든 배경에서부터 깊은 고민까지 이야기해줬다.

박진표 어제 형 영화 잘 봤어요. 난 아주 좋던데.

허진호 응, 고마워. 너도 영화 하잖아. 언제쯤 시작해?

박진표 지금 트리트먼트에 가까운 초고를 써놓긴 했는데, 어제 영화를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진짜로. <행복> 같은 영화도 있는데, 이런 식으로 멜로영화를 만들어도 되나 싶어서.

허진호 야, 짜고 말하는 줄 알겠다. (웃음)

박진표 그게 아니라. 실제로 어제 영화 끝나고 뒤풀이에서도 몇몇 사람에게 말했는데, 내가 너무 얄팍한 멜로영화를 준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니까요. 하여간 <씨네21>에서 시키니까 얘기를 시작해야겠네. 저도 <너는 내 운명> 때 황정민과 작업을 해봤잖아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는 혼자 생각에, <너는 내 운명>에서 황정민과 전도연을 써먹을 대로 써먹었다고 생각했어요. 뭐 멜로영화에서 이 이상 써먹을 수 있겠냐 생각하고 있었는데, <밀양>을 보면서도 그랬고 <행복>을 보면서도 그랬는데, 배우가 가지고 있는 게 내 생각보다 훨씬 많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정민이가 <행복>에 잘 안 어울릴 줄 알았거든요. 딱히 ‘나쁜 남자’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기존 이미지와는 조금 다를 수 있는데 그런 부분을 어떻게 끄집어내셨나요.

허진호 하도 오래돼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행복>은 2004년 정도부터 시작했거든. 그때 그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이를테면 <너는 내 운명>처럼 완전하게 보이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아. 그래서 나중에 <너는 내 운명>이 나왔을 때 ‘저거 <행복>과 비슷해 보이는데 영화를 어떻게 찍어야 하나’ 하는 고민이 들었어. 너도 내가 그런 얘기를 했다는 걸 들었을 거야. 그런데 내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출발은 분명히 아프고 가진 것 없는 남녀가 요양원에서 만나서, 그러니까 인생의 끝에서 만나서 행복하게 잘산다는 것이었는데 갑자기 의문이 드는 거야. 혹시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나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혹시 떠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좋은 사람이 아니지, 내가. (웃음) 그러면서 남자가 좀 쾌락적인, 여자도 많이 만나고 바람둥이 같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 그러면서 영수라는 인물을 잡아간 것 같아.

박진표 정민이는 어땠어요? <씨네21> 인터뷰를 보니까 <너는 내 운명>의 석중이는 현실에 없는 인물 같았는데 이번에는 현실에 있을 만한 사람을 연기하고 싶었다고 했더라고요.

허진호 황정민은 이전에 몇번 보긴 했지만, 잘 알지는 못했어. 그러다가 <너는 내 운명>을 보면서 놀랐지. 그 영화를 본 뒤에 <로드무비> <바람난 가족> <달콤한 인생>에서의 이미지보다 <너는 내 운명>의 순박하고 천성이 착한 그런 이미지가 강해진 것 같아. 그러다가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시위 때 만나서 술 마시면서 얘기를 해보니까 굉장히 다양한 면이 있더라고. 똑똑하고 세련된 느낌도 있고 미술에 대한 지식도 있고. 아, 내가 봤던 이미지와는 다르구나 생각했지. 한 가지 비슷한 게 있다면 이 친구가 소주를 참 잘 마시더라고. 그래서 하게 됐고, 머리나 옷이나 갖춰놓으니까 굉장히 멋있었어.

박진표 여기서 굳이 <너는 내 운명>을 변명하자면, 석중이라는 인물은 굉장히 순박하고, 사랑을 위해서 물불을 안 가리는데, 그건 결국 다 자신을 위한 거거든요. 은하라는 여자에 대해서는 지고지순한 면을 보이지만, 거꾸로 보면 가족도 다 필요없고 이 여자만 위해서 살려고 한다는 것은 굉장히 못된 거 잖아요. 이기적인 거고. 그런 측면에서 <행복>을 보면서 영수나 석중이나 비슷하더라고요. 결국 사랑은 이기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행복>에서도 “너 멍청한 거니, 궁상맞은 거니?” 그러면서 막 화를 내잖아요. 그런데 그건 그 여자를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냥 귀찮아서일 수도 있잖아요. 어쨌건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에게서 굉장히 다양한 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결국엔 감독이 그것을 던져주거나 끄집어내주는 게 크지 않을까요.

허진호 나는 연기지도를 잘 안 하는 편인데.

박진표 그 대신 다른 방법으로 배우의 목을 조르시잖아요. (웃음)

허진호 연기지도를 잘 안 하는 건 나도 잘 몰라서 그러는 거거든.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새 배우 자신이 나오는 것 같아. 이런 캐릭터라는 것을 명확하게 안 가져가니까 그 인물에서 배우의 모습들이 나오는 것 같아. 그러다보면 어떨때는 저 인물이 인물이 아닌데, 할 때도 있어. 그게 참 어려워. 일관되게 한 인물을 가져가는 게. 이번에도 찍으면서도 저거 좀 이상하다. 영수 같기도 하고 황정민 같기도 하고. 어쩌면 영수를 조금 더 나쁜 남자랄까, 그러니까 더 이기적이고 더 냉정한 남자로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 같아. 어떤 배우냐에 따라 그럴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황정민의 본성에는 순박한 느낌이 있었어. 중국집에서 소주 마시다가 짬뽕국물 같은 걸 안주로 시킬 때 보면 드러나지. (웃음)

박진표 황정민에겐 또 로맨틱한 면도 있잖아요. 특히 여자들에게. 특히 <행복>에서 시골길을 올라오다가 바위 위에 앉은 임수정에게 선 채로 키스를 해주잖아요. 굉장히 로맨틱한 사람 아니면 그런 장면은 떠올릴 수 없는데…. 형의 실제 경험인가요? (웃음)

허진호 아, 정확하게 내가 빠져나갈 수 있는 질문을 해줘서 고맙다. 그 장면은 재촬영했는데, 원래는 스테디캠을 써서 인물을 죽 쫓아가다가 결국 카메라 가까운 데서 키스를 하는 장면이었거든. 내가 이번 영화에서는 인물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생각했었지만, 이 장면은 뭔가 이상했어. 조금 촌스러운 얘길지는 몰라도 첫 키스라면 어떤 서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거든. 그런데 그게 아닌 거야. 그래서 다시 찍었는데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현장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내가 잘하는 식으로 찍자고 생각했지. 멀리서 찍다가 두 번째 컷에서 인물로 들어가는 식으로. 일단 임수정을 바위에 앉혀놓고 정민이한테 너도 앉아서 삭 돌아서 키스하면 어떠냐고 했어. 근데 실제로 해보니까 너무 어색한 거야. 느낌도 잘 안 살고. 그러다 황정민이 아이디어를 냈지. 서서 키스하면 어떻겠냐고.

박진표 굉장히 설레는 첫 키스신이었던 것 같아요. 몇몇 로맨틱한 장면을 조금 더 거론해보자면, 첫 베드신에서 어떻게 그런 놀라운 대사가 나오는지. 은희에겐 폐질환이 있잖아요. 그래서 숨이 차면 안 되긴 하지만, 함께 누워서 “숨차면 나 죽을 수도 있어요”라고 말하는데, 황정민 말대로 참 섹시하더라고요. 그 대사는 어떻게 나온 건가요. 숨찬 여자랑 혹시…. (웃음)

허진호 기자시사 끝나고 정민이가 그 대사가 섹시하다고 말했는데, 그런 얘기는 그때 처음 들었어. 그런데 저녁때 초대시사에서 영화를 다시 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원래 그 대사는 왜 만들었냐면, 은희가 별로 아파 보이지 않는 거야. 은희가 숨차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확히 전달하려고 그랬던 거야.

박진표 제가 만드는 멜로영화는 판타지가 있는 멜로잖아요. 사실에 입각해서 만들긴 하지만 훨씬 더 각색되고 더 많은 판타지가 들어 있고. 허진호 감독님의 멜로가 독보적인 대목은 가족과 사회와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게 투영되면서 서정적이면서… 결국엔 판타지가 없다는 것 같아요.

허진호 나는 나름대로 판타지라고 생각하는데.

박진표 어제 어떤 영화인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네가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이지만, 오히려 허진호의 영화가 리얼다큐다”라고 말하더라고요. 실제로 영화를 보면 정말 저렇게 리얼할 수가, 라는 생각을 한다는 거죠. 그러면서도 서정성이나 설렘이나 이런 것들을 유지하는 배경이 뭐냐 이거죠. 그냥 사실적이면 드라이해 보이고 재미도 없고 하나도 안 설렐 텐데.

허진호 내가 봤을 때 사실적이라는 느낌은 카메라에서 오는 게 더 많은 것 같아. 영화가 컷 수가 많지 않으니까 거기서 사실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컷이 분할되면 사실성이 없어지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고. 물론 내가 컷을 많이 나누지 못하는 건 익숙하지 않아서기도 하고 하나의 테이크로 찍는 게 편하기도 해서인데, 사실 판타지가 많다고. 나도 어떤 부분에서는 조금 포장하는 느낌이 있어. 그게 꼭 나쁘다는 얘기는 아닌데, 하여간 포장하는 것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있는 것 같긴 해. 사실 포장을 잘하면 재미로 다가올 수도 있고 정서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나는 약간 어색하고 거짓말일 수도 있어서 불편함은 생기더라고.

박진표 카메라도 그럴 수 있지만, 형 영화 속 인물들이 갖는 사랑에 대한 감정이나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전체적으로 형의 사랑에 대한 생각들이 판타지를 갖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너무나도 사실적이고 너무나도 폐부를 찌르거든요. 물론 거기서 그치면 안타까울 텐데 그러면서도 굉장히 로맨틱한 그 무엇이 있다는 거죠. 그 지점이 뭘까 굉장히 궁금한 거예요.

허진호 그건 오히려 내가 로맨틱하지 않아서인 것 같은데. 결혼해서 생활해보니까 내가 로맨틱한 행동을 너무 못해. 선물을 사준다든지 깜짝 놀라게 뭘 한다든지. 내 나름대로는 잘해주려 하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는….

박진표 그걸 못하셔도 형의 지금 이 자세라든지,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미소라든지, 긴 손가락이라든지, 이렇게 평상시에 낭만적이거든요. 그게 허진호의 낭만이거든. 그게 영화에도 나타나요. 이를테면 <행복>에서 박인환 선생이 들꽃을 묶어서 정민이한테 선물하잖아요.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형 자체가 낭만이기 때문에 그런 장면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허진호 그게 아니라 그런 낭만을 동경해서 그런 것 같아. 난 절대 그런 거 없거든. 그 장면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찍을 때 내 경험이거든. 그때 난 보조출연자 담당 연출부였는데 정말 광부하던 분들이 오셔서 보조연기를 해줬어. 그런데 그중 어떤 분이 산에 올라가다가 들꽃을 꺾어가지고 나한테 삭 주시더라고. 내가 조금 힘들어 보여서 그려셨는지. 그걸 받으면서 감정이 묘했어. 동성애적인 게 아니라 어떤….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 물론 좀 다른 의미로. 내가 잘 그러지 못하니까 낭만적인 것이 막 간질간질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런 부분을 동경하는 것 같아.

박진표 형 영화는 굉장히 사실적이지만, 그런 소소하고 세세한 장면들이 전체적으로 모여서 굉장히 로맨틱해진다는 거지. 판타지라서가 아니라. 형은 판타지 없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감독이야. <너는 내 운명>이 나왔을 때 기자들과 그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나는데, ‘쿨한 멜로’와 ‘핫한 멜로’라는 얘기 말이에요. 당시 저는 다분히 공격적으로 ‘당신들 마음속은 결국 핫하지 않냐’고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생각해보니까 형 영화들도 쿨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심은하가 유리창에 돌 던진 것부터 절대 쿨한 거 아니에요. 형도 카메라를 인물에 더 가까이 대고 싶다고 했지만, <행복>만 해도 이전 작품보다 감정적으로 한 걸음 더 나갔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이전에는 안 그랬는데 주인공들이 격한 감정을 말로 표현하시더라는 거죠. 저는 내심 반가웠지만, 그동안 허진호의 영화를 사랑했던, 분석했던 사람들이 봤을 때는 ‘어, 좀 달라졌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인 것 같아요.

허진호 그런 부분은 분명히 있지. 나는 감정표현을 하는 데 있어서 좀 불편함이 있어. 영화뿐 아니라 나 스스로도. 되도록이면 화를 안 내. 화를 내기 시작하면 내가 다치는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 성격상 뭔가 잘 표현을 안 하는 것 같기도 해.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감정을 움직여주는 것들이거든. 건조한 영화도 재밌게는 보지만, 웃음으로 가든 눈물로 가든 마음이 움직이든, 하여간 그렇게 내 감정을 건드리는 영화를 좋아하거든. 이번에는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어. 내가 표현을 잘 못해서 못 만드는 경우는 있겠지만, 그런 감정의 움직임을 고민하게 될 것 같아.

박진표 그러니까 한발 더 다가서신 것은 인정하는 거죠?

허진호 글쎄, 그전부터 계속 하려고 했었는데…. (웃음)

박진표 저는 얄팍한 생각에 형이 결혼을 하면서 ‘표현하는 게 좋구나’라고 생각하신 것 아닌가 했어요. 어딘가에 난 임수정 인터뷰를 보면 “감독이 나한테 자꾸 표현하라고 했다”고 하던데, 그것도 한 걸음 더 나아간 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요. 좀처럼 표현하지 않던 감독님께서…. 아, 임수정은 어떻게 연기지도를 하셨어요?

허진호 촬영 전에는 한두번 정도만 이야기한 것 같아. 이 시나리오 쓸 때의 느낌들을 대략 얘기해줬어. 그리고 현장에서는 정확한 디렉션을 주지 못한 것 같아. 그 이유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길게 찍을 때는 디렉션을 주기가 어려운 것 같아. 수정이는 김지운 감독이 <장화, 홍련> 찍을 때 처음 만났어. 그때는 아주 어렸는데, 이현승 감독과 현장에 가 있다가 김지운 감독이 소개해주더라고. 근데 그때 이현승 감독이 약간 반말투로 말했어. 그랬더니 순간 서늘해지면서…. 약간 당찬 데가 있고 해서 인상에 남았어.

박진표 아무튼 부럽네요. 당대의 톱 여배우들이 줄서서 기다리게 하는 감독이시잖아요.

허진호 상당한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다른 데 줄서 있는 사람을 데리러 가곤 해. (웃음)

박진표 어쨌든 모두 톱으로 만드시잖아요. 심은하, 이영애, 손예진, 임수정까지. 특히 정말 여자배우를 진정한 여성으로 만드는 데 굉장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하시는 건가요.

허진호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이런 게 있어. 배우와는 너무 친해도 안 되고 너무 거리가 멀어도 안 되고. <8월의 크리스마스>를 찍을 때 심은하씨가 굉장히 힘들어했어. 군산에서 본격적으로 촬영을 시작했을 때인데, 그땐 신인감독이라서 그랬는지 촬영에 들어가니까 ‘컷’을 못 부르겠더라고. 나는 그러고 있는데 다들 그게 감독 스타일인가 하면서 받아들이고. 그렇게 어떡하다 보니 길게 찍게 된 것 같긴 한데, (웃음) 하여간 그때도 15번인가 17번인가 테이크를 갔다고. 그런데 뭐라고 얘기도 안 해주고 똑같은 장면을 자꾸 찍으니까 심은하씨가 화가 났나봐. 그래서 서울로 올라간다는 얘기까지 나왔었어.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그렇게 친하지 않았다는 거야. 많은 대화는 하지 않았던 것 같아. 또 한번은 어떤 일이 있었냐면 심은하씨가 한석규씨 얼굴에 안경을 씌워주는 장면이 있었어. 근데 심은하씨가 그 장면이 유치하다는 거야. 나는 그게 기분 나쁘더라고. (웃음) 그 다음부터는 심은하씨와는 얘기를 안 했고, 대화를 해야 할 땐 당시 조감독이던 박흥식 감독에게 다 시켰어. 삐쳤던 거지. (웃음)

박진표 아니, 겨우 한번 유치하다고 한 걸 갖고 뭘 그래요. 저는 <너는 내 운명> 찍을 때 황군과 전양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유치하다는 말을 백번도 넘게 들은 것 같아요.

허진호 넌 안 삐쳤지?

박진표 열라 삐쳤죠. (웃음) 속으론 삐치는데 뭐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저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치하다는 소리 들었어요. 영화 마지막에 ‘그대는 선샤인…’ 하는 노래 있잖아요. 두 배우를 불러놓고 그 노래를 녹음하는데 제가 그 가사를 유치하게 번역했잖아요. 그랬더니 ‘그거 너무 유치해’ 그러면서 진짜 막…. (웃음)

허진호 아까 이야기를 이어가면, 그렇게 촬영하면서 얘기를 안 했는데도 결과적으로 심은하씨에 대한 기억이 되게 좋았던 것 같아. 차라리 많이 얘기를 안 하는 게 낫겠구나…. 참 어려워 그게. 많이 얘기해서만 좋은 게 아닌 것 같아. 그렇다고 얘기를 안 하면 촬영이 너무 비효율적이 되고. 배우에게 다 알아서 하라는 거니까. 그 중간은 뭘까, 고민도 많이 하지.

박진표 사실 대한민국 배우들이 허진호 감독은 그런 스타일이다, 란 걸 아니까 스스로 막 연구하는 것 아닐까요.

허진호 <행복>은 다른 영화에 비해 촬영기간이 짧았던 편인데 어떨 때는 나 스스로에게 굉장히 화가 나기도 했어. 도대체 왜 결정을 못 내리는 거야, 이러면서. 감독이 어떤 결정을 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기보다 어떤 하나의 방향으로 간다는 것인데 그걸 못하는 거지. 그렇게 결정을 미루면서 오는 손실이나 나 자신에 대한 압력을 느껴오면서 이번에는 그런 부분을 어떻게 바꿀까 고민도 했어. 그러면서 뭔가 결정을 해야겠다, 배우에게 디렉션도 주자, 이러면서.

박진표 그동안 사랑 영화를 네편이나 찍으셨잖아요. 다음 영화도 사랑 이야기인가요. 그런 기대를 배신해볼 생각도 있으신가요.

허진호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를 네편 한다면 참 부담이 생겨. 첫 번째 할 때는 괜찮은데, 두 번째에는 전작을 신경쓰고, 세 번째는 앞의 두편을, 네 번째에는 세편을 돌아봐야 하잖아. 이런 이야기를 다 섯번째 만들려니까 앞의 네편을 신경써야 하는데,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박진표 다른 장르인가요?

허진호 사실, 처음 <8월의 크리스마스>를 만들었을 때 이 영화가 멜로냐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어. 멜로라고도 할 수 있고 그냥 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게 한쪽은 굉장히 현실적이면서 또 한쪽은 굉장히 정서적이어서 부딪힘이 생긴다는 건데, 그건 내가 이야기를 어떤 두 인물에서 시작하는 경우보다는 다른 이야기에서 시작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해. 그러다가 두 인물 이야기뿐 아니라 내가 이 영화를 왜 만들까라는 질문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중간중간 섞이면서 애매해지는 경우가 있거든. 그래서 <외출>은 정말 남녀 둘만의 멜로를 만들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지금도 또 그런 영화를 만들 생각이 있는데, 아까도 말했듯이 네편이 쌓여 있는 상태가 꼭 좋지는 않은 것 같아. 그래서 다음에는 다른 이야기에 중심을 두고 남녀 이야기는 비중을 줄여서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아니면 아예 어떤 장르를 선택하든지. 코미디를 해보고 싶어.

박진표 코미디를 하고 싶으시다고요?

허진호 장르영화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는 거지.

박진표 형은 안 웃기기 때문에 코미디는 하지 마세요. (웃음) 하나도 안 웃겨요. 물론 <행복>은 진짜 웃겼어요. 저게 진호 형이 만든 영화야 할 정도로 초·중반까지 웃기더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몸개그까지 나오고. 굉장히 유머가 풍부해진 것을 보면서 감정의 표현이나 이런 게 풍성해진 느낌이 들긴 해요, 진짜. 그래도 본격 코미디는 하지 마세요. (웃음) 허진호의 멜로영화를 2년, 3년에 한번씩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배신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하여간 <행복>을 찍으셨는데 행복하신가요. 진짜로 그게 너무 궁금했어요. 영화를 보고 나서 이 형이 여기다가 왜 ‘행복’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허진호 행복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내가 영화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스스로에게 질문했던 어떤 것인데, <8월의 크리스마스>를 만든 뒤에 행복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언젠가부터 나도 행복이라는 단어를 안 썼거든. 굉장히 주관적이고 어떻게 보면 유치하고. 또 너무 거창하잖아. 하여간 ‘이것이 행복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만든 것 같지는 않아. ‘도대체 왜 행복일까’ 이런 생각은 많이 했지.

박진표 그러면 질문인가요? 행복이란 과연 뭘까, 하는.

허진호 나도 굉장히 걱정이 되는 부분이 이 영화와 <행복>이라는 제목이 연결성이 있긴 한가, 이런 거야. 사실 행복이라는 단어가 포괄하는 게 워낙 크잖아.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행복>이라고 갖다붙일 수 있었을 거야. <봄날은 간다>를 만들고서 <행복>이라고 붙였어도 크게 어색하지는 않겠지. 어쨌든 결과적으로 <행복>이라는 제목으로 정해지면서 이런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까 스스로에게 물었던 것 같아. 사실 내가 영화에서 ‘사랑해’라는 말을 잘 안 쓰는데, ‘행복’도 약간 비슷한 단어야.

박진표 그럼 ‘사랑해’를 실생활에서도 안 쓰시나요.

허진호 잘 안 쓰지. 너무 어색해서.

박진표 형수님이 좀 서운해할 것 같은데.

허진호 같이 안 쓰니까 괜찮아. 모르겠어… 얘기를 하면 그게 날아갈 것 같고…. (웃음) 그런 단어는 그 자체로 완전한 것 같아. 그런 완전함을 얘기하는 게 불편해. 나도 <행복>이라는 제목이 그런 불편한 게 힘들었지. 누군가가 내게 만약 ‘행복하니?’라고 묻는다면 난 ‘참 좋아’ 이 정도로 답할 것 같아. 그런데 주변에서 그러더라고. 그런 말은 자꾸 써야 익숙해진다고. 그래서 나도 써볼까 생각 중이야. 너는 ‘사랑해’라는 말을 쓰지?

박진표 쓰죠, 쓰니까 ‘열라 유치하다’는 얘기를 듣죠. (웃음) 죽을 만큼 사랑해, 죽어도 좋아, 이러니까 배우들이 미쳐버리죠. (웃음) 그게 대본에 써 있으니까. 형이 고수라고 느낀 또 다른 장면이 있는데, 두 사람이 잠자리에서 같은 잠옷을 입고 말하는 거 있잖아요. ‘나 어디가 그렇게 좋아’, 그러니까 ‘다 좋아’, 그러고 ‘너도 나 그렇게 좋아?’, 그렇게 끝내버리잖아요. 나 같으면 ‘죽을 때까지 사랑해줄 거야?’, 그러면 ‘물론이지’, 이런 식으로 질질 짜내는데. (웃음)

허진호 그런 표현을 한다는 것은 복이고 내가 닮고 싶은 부분이야. 아까 쿨한 멜로와 핫한 멜로 이야기를 했는데 나도 핫하고 싶은 욕망이 많이 있지. 그래서 배우들에게도 감정 표현을 해야 한다고 말했던 거고. 아까도 말했지만 감정이 움직이고 표현하는 이런 영화들이 좋아. 예를 들어 어떤 영화를 보는데, 다른 사람이 울 때 같이 울 수 있는 감성은 굉장히 좋은 거야. 하여튼 나로서는 개봉을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복잡한 시기에 이렇게 좋은 얘기를 들어서 오늘은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아. 잠시 착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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