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행복> 에세이 2. 은희는 사랑을 알지 모른다
2007-10-11
문화평론가 남재일이 본 <행복>

어쨌거나, 허진호 감독은 줄곧 남녀간의 사랑을 탐구해왔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전작들과는 좀 결이 다르다. 간이 굳어가는 남자와 폐에 고름이 잡히는 여자가 요양원에서 만나 빈집에서 함께 산다. 거기에 대고 ‘행복’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잃을 게 목숨밖에 없는 삶의 막장에서 동병상련의 연대로 만난 두 남녀의 사랑은 투명한 단순성 때문에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생활 속에서 행복을 유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물론 아닐 게다. 이 영화의 전언이 ‘소박한 일상 속에 행복이 있다’는 따위의 김빠진 설교는.

실제로 두 남녀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지 못한다. 병세가 호전된 남자는 떠나고 여자는 병이 악화돼 죽음을 맞는다. 남자는 다시 그들이 만났던 ‘희망의 집’으로 돌아온다. 이들의 러브스토리는 ‘조강지처 버린 자는 벌 받는다’는 신파극 같다. 혹자는 70년대 호스티스영화를 요양원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것 같다고 한다. 설마 감독이 보여주고자 한 것이 이건 아닐 테지. 도대체 <행복>은 뭘 주장하고 있는 거지?

<행복>의 남녀관계를 호스티스영화의 한 유형으로 보면 ‘멍청한 년과 나쁜 놈의 관계’로 귀결된다. 하지만 나는 이 둘의 관계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가 주체가 되어 남자를 끌고 다닌 여자 중심의 러브스토리로 봤다. 그 전말은 이렇다.

여자는 중병을 앓고 있다. 부모도 일찍 여의었다. 그에게 남은 인생은 요양원에서 죽어가는 것이 전부다. 너무나 투명하게 자신의 정리된 미래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의 생의 의지는 하나의 문체로 강렬하게 통일돼 있다. 그 앞에 남자가 나타난다. 여자는 그와 관계 맺기를 결심한다. 영화에서 관계를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사람은 분명 여자다. 여자는 자신의 의지대로 남자를 자신의 정신세계로 캐스팅한다. 그리고 여생을 함께하기를 욕망한다. 남자는 여자에 비해 병세가 약하다. 회복해서 서울로 돌아갈 수도 있다. 기다리는 어머니와 옛 애인도 있다. 시한부인 여자와 평생을 약속하기에는 아직 여지가 많아 보인다. 그런데도 그가 여자의 뜻에 따르는 것은 그 상황에서는 여자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그는 의존적인 캐릭터다. 관계는 여자에게 의존하고 일상의 기분은 술과 담배에 의존한다. 그래서 두 남녀의 만남은 고양된 정신과 나쁜 습관의 만남이다. 둘의 사랑은 그렇게 처음부터 여자의 승리로 예정돼 있었다. 실제로 남자는 여자에게 정착하지 않았지만, 도망가지도 못했다. 하여 결국은 다시 죽어가는 여자의 임종자리로 호명당한다. 여자는 자신이 꿈꾸었던 대로 그 남자를 곁에 두고 죽어간다. 요양원으로 돌아온 그 남자 역시 곧 죽으리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나쁜 놈이라는 죄의식 속에서 생을 마감하리라. 진정 불쌍한 사람은 그 남자이다. 아버지없이 담배 피우는 어머니(아마 아버지가 속깨나 썩였을 것이다) 밑에서 참으로 난감한 성장과정을 거쳐, 제 딴에는 열심히 산다고 살았을 법한 이 남자. 세계가 경합하는 힘들의 관계라면, 이 남자는 그 여자처럼 정신의 힘으로 초월하기에는 불순하고, 가게를 인수해준 친구처럼 삶을 육체로 버텨내기에는 허약하다. 나는 그에게서 허진호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머뭇거리고 배회하면서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남성 캐릭터의 한 유형- 잡놈 버전- 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서는 이 남자들의 판타지 속에 존재하는 사랑을 위해 생의 의지를 일목요연하게 불태우는 더 고양된 존재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 두 남녀의 불화는 사랑에 대한 감독의 모순적 내면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랑은 없거나 환각으로만 있는 것 같은데 사랑하고 싶은 이 분명한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라는. <행복>에서 감독은 그 답을 여자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 같다. “저렇게 완전히 몰입하는 여자는 그 답을 알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허진호는 남녀관계에 몰입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맺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회의적인 만큼 사랑의 판타지에 탐닉한다. 그 세계는 허무주의를 동력으로 한 나른한 정념의 세계다. 남녀관계에 대한 현실이 비관적일수록 사랑에 대한 갈망은 깊어지고, 갈망이 깊어질수록 더불어 초연해지고자 하는 미학적 나르시시즘으로 귀결되는 세계. 나는 종종 그의 영화가 사랑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그리움에 대한 영화 같다. 그는 한국 감독 중에서 그리움을 가장 잘 표현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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