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케이블 핑크시대] 19금 케이블 드라마에 중독된 30대 총각 직장인의 고백
2008-01-31
글 : 강병진

모든 게 그녀 때문이었어요. 어느 날 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침대에 누워 리모컨으로 여러 채널을 섭렵해가던 저의 눈이 한곳에 멎었답니다. TV 속에서는 불투명한 커튼과 난데없이 피어오르는 스모그 사이로 한 여자의 실루엣이 등장했지요. 그녀를 바라보는 TV 속 남자의 눈동자가 커졌어요. 저는 한눈에 지금 그녀가 나신인 걸 눈치챘죠. 이건 뭔가. 설마 지금 올 누드로 저 남자를 공략하려는 건가. 아무리 케이블이라지만 TV에서… 헉. 생각의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그녀는 정말 올 누드로 조명을 받았어요.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던 그녀가 말했어요. “정말,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 카메라가 그녀의 가슴과 배와 다리를 훑던 도중 남자의 대답이 들렸죠. “난 한번도 기회를 놓친 적이 없거든. 그런데 내 휴대폰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그녀는 팔로 남자의 목을 안고는 남자의 다리를 걸어 그를 넘어뜨렸어요. 당황한 남자의 몸 위로 올라간 그녀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죠. “그렇게 요령피우다가는, 두 번째 기회를 놓칠지 몰라.” 바로 이어지는 두 남녀의 격렬한 키스. 그리고….

그녀를 저만 좋아하는 게 아니더라구요

<이브의 유혹: 그녀만의 테크닉>

다음날 아침. 회사로 출근하던 저는 지하철역에서 주워온 무료신문에서 다시 그녀를 만났습니다. “서영의 ‘착한 가슴’ 효과?… <이브의 유혹> 동시간대 1위.” “시청률조사회사 AGB닐슨에 따르면 지난 7일 방송된 OCN 에로틱스릴러 <이브의 유혹: 그녀만의 테크닉>은 전국가구 평균시청률 2.5%, 최고시청률 3.9%를 기록했다. 케이블TV에서 시청률 3%는 지상파 40%로 평가되고 있다.” 기사를 읽던 저는 안도했죠. 30대의 평범한 미혼 직장인인 저는 우습게도 TV 속 어느 여배우의 나신을 보며 밤을 보냈다는 사실에 제 자신이 초라해 보였던 겁니다. 저는 애써 제 자신이 하릴없고 추레한 30대 총각 직장인이라는 사실을 잊으려 했어요. 지상파의 40%라면, 이건 국민드라마잖아. 하지만 이미 회사의 동료직원들 사이에서는 서영의 베드신이 회자되고 있더군요. 짐짓 점잖은 체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할 뿐 끼어들지 않았지만,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는 서영의 몸매에 대한 품평부터 그녀의 전작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출연할 드라마에 대한 정보들이 쏟아져나왔어요. 드라마 <여우야 뭐하니>로 데뷔, <달자의 봄> <키드갱>에 출연했고 ‘착한 가슴’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모바일 화보까지 찍었다는. 그리고 곧 <색시몽>이라는 또 다른 성인드라마에 출연한다는 소식이었죠. 당연히 저는 귀가 솔깃했지만 곧 평정심을 찾았어요. 무슨 케이블 드라마까지 때맞춰 챙겨보겠어. 보나마나 허접할 텐데. 하지만 애써 관심을 끊으려는 저에게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어요. 그건 어젯밤에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였답니다. “그렇게 요령피우다가는, 두 번째 기회를 놓칠지 몰라.”

급기야 다른 드라마들은 싱거워서 볼 수가 없었어요

<색시몽>

결국 몇주 뒤 저는 다시 케이블로 채널을 돌렸습니다. 서영을 비롯해 김지우, 강은비가 출연한 <색시몽>은 3명의 여자가 한팀이 되어 각종 성범죄 사건을 해결하고 그 와중에 연애도 하는 이야기였어요. 술 취한 여자승객을 대상으로 성폭행과 강도짓을 일삼는 택시기사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버스 내의 성추행, 직장상사의 성추행, 술집에서의 성추행 등 온갖 성추행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었죠. 사건이 벌어지면 여자 탐정단은 섹시한 옷을 입고 기꺼이 범인들의 미끼가 되었고, 그렇게 붙잡힌 남자들은 홀라당 벗겨진 상태로 여자들에게 놀림을 당하며 사건은 종결되곤 했어요. 서영이 반갑기는 했지만, 왠지 저에게 <색시몽>은 정말 가관으로 보였어요. 뭐랄까, 이건 너무나 값싸게 만들어진 드라마였던 거예요. 드라마는 자극적인 설정만 보여주고는 맥락없이 이야기를 끝내버렸고, 더군다나 제가 그토록 고대했던 서영의 농도 짙은 베드신도 없었어요. 차라리 잠이나 잘걸, 아니면 술이나 마실걸 하고 후회했죠. 하지만 저는 곧 철지난 영화들, 거의 24시간 방송하는 듯한 <무한도전>, 야하지도 않고 재밌지도 않은 페이크다큐멘터리들 속에서 또 다른 성인드라마를 찾아냈어요. <S 클리닉> <화> <애시리즈> <직장연애사> 등등 잘나간다 싶은 영화·오락채널들은 죄다 가슴 크고 미끈한 언니들을 앞세워 성인드라마를 만들고 있었던 거예요. 저는 이 모든 게 서영이란 배우가 가져온 결과가 아닐까 싶었답니다. 여기에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제2의 서영을 꿈꾸고 있을 거라고, 모든 드라마들이 제2의 <이브의 유혹>이 되길 바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 한번 봐주지. 맞아요. 모든 건 그렇게 시작된 거죠. 한번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나니 다시는 지상파의 싱거운 프로그램들로는 채우지 못할 허기를 안고 살아야 했던 거예요. 의사 아니면 왕이 등장하는 드라마들은 이미 제가 이야기를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멀리 가버렸고, 오락프로그램에서는 영화배우들이 출연해 망신당한 연애담만 늘어놓고 있었어요. 도무지 그들에게서는 어떤 즐거움도 찾지 못하는 가련한 시청자가 돼버린 거죠.

야동을 볼 때 들던 죄책감마저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렇게 저는 점점 케이블의 성인드라마에 빠져들었어요. 보다보니 작품성이며 공익성이며 신경쓰지 않는 쿨한 태도가 가벼우면 가벼운 대로 즐겨달라는 애교처럼 보이기까지 했죠. 그래, 내가 아무리 점잖은 체를 해봤자 추레한 30대 직장인이지 뭐.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TV잖아. 내가 야동을 다운받는 것도 아니고 부끄러워 할 일이 뭐 있겠어. 게다가 하루의 대부분을 맥빠지게 보내는 저에게 성인드라마 속의 세계는 너무나 유쾌하기만 했답니다. 이 드라마들 속에는 경제적인 고민이나, 직장 내의 권력암투에 의한 스트레스나,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이성 때문에 겪는 슬픔이 없었어요. 그들은 오로지 섹스에 대해서만 고민할 뿐이었죠. 말하자면 모조리 성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던 거예요. 태어나서 한번도 경험을 갖지 못한 남자는 첫 경험 상대를 찾아나섰고, 같이 자자는 애인의 애절한 구애를 받은 여자는 잘까 말까 고민했으며, 애인과의 섹스에서 문제를 겪은 사람들은 섹스의 고수를 찾아다니며 비법을 전수받곤 했지요. 너무나 단순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명쾌해 보였어요. 누군가는 차라리 야동을 다운받아 보라고 했지만 가벼운 즐거움에 자족하고 있는 저에게 야동을 찾아다니는 수고는 쓸데없는 짓이었답니다. 물론 저도 한때는 매일 밤 P2P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외로운 밤을 달래던 남자였죠. 일본 AV계의 송혜교 소라 아오이, 청순한 매력을 가진 이즈미 하세가와와 사토 히로미, AV의 거성 유아 아이다, 몸매를 보여주기 전에 눈빛으로 남자의 기를 죽이는 호노카, 혼혈의 모든 장점을 가진 마리아 오자와 등등의 배우들을 경배하던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남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게 전부인 야동의 세계는 종종 죄책감을 안겨주곤 했어요. 그에 비하면 성인드라마의 여자들은 어찌나 다들 당당하시던지. 남자들을 유혹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가 하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남자들을 갈아치우며 그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잠자리에서조차 능력없는 남편에게는 가차없이 아웃을 날렸으며, 직접 남자에게 비법을 전수하고 가르치기까지 했죠. 물론 저도 그런 성인드라마의 여성캐릭터들이 어디까지나 남성들의 기대심리를 자극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뭐 어떻겠어요. 어차피 이건 아무런 의지없이 그저 눈이 가는 대로, 리모컨 위의 손가락이 지시하는 대로 보는 성인드라마일 뿐인데요.

몇 번의 배신감도 느꼈었지만…

<천일야화>

그렇게 매일 밤 성인드라마들을 섭렵하던 저는 조금씩 이 세계의 배우들을 기억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듣도 보도 못했던 배우들이 점차 눈에 익어가면서, 다른 드라마에서 다시 보게 될 때는 반가움마저 느껴졌죠. 또한 한동안 지상파나 영화에서 자취를 감춘 배우들이 등장할 때면 뜻밖의 신선함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어떤 드라마는 과거에 보던 에로영화의 히로인들이 출연해 여전한 몸매를 드러내곤 했답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급기야 이 세계에 오묘한 법칙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어요. 마치 그건 어떤 비밀을 자신만이 혼자 깨달은 듯한 착각이었죠. 계기는 나름 이름값이 높은 배우들 때문이었어요. <S 클리닉>의 조한나, <화>의 레이싱걸 임지혜, <천일야화>의 김보경. 설마 이들도 벗을까 싶어 브라운관을 주시했던 저는 연거푸 쓰라린 배신감을 느껴야만 했죠. 그들은 종종 볼륨있는 몸매의 라인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하는 일이라고는 다른 이들이 성생활에서 겪은 사연들을 소개하는 것뿐이었어요. <천일야화>의 김보경은 <햐얀거탑>에서 연기한 희재처럼 와인바를 운영하는데, 그녀는 바를 찾은 손님에게 와인을 따라주고는 그들의 신비한 섹스경험담을 들어주기만 했죠. <화>의 임지혜는 슬립이나 속옷만 입은 채로 첫 등장한 뒤, 바로 한 사이트에 접속해 어느 화류계 여성종사자의 사연을 찾아다녔어요. 그나마 <S 클리닉>의 조한나는 매번 집 안에서 운동을 하며 땀에 젖은 몸매를 드러내곤 했지만, 역시나 그녀의 업무는 성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었죠.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시청자에게 ‘이들도 벗는다’는 기대를 심어주는 일종의 밑밥이었던 거예요. 저는 그 밑밭에 낚시를 당한 거고요. 몇번의 배신감을 경험하고 또다시 지상파로 채널을 돌리려던 순간, 저는 과거의 영화 한편을 떠올렸답니다. 혹시 <레드슈 다이어리>라고 기억나시나요? 맞아요. <X파일>의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매일 어디선가 날아온 편지를 심각한 눈빛으로 읽으며 시작했던, 역시나 듀코브니 자신은 한번도 베드신을 연기한 적이 없었던 그 영화 말이에요(돌이켜보니 <직장연애사>에서 여자들의 고민을 상담하는 키다리 아저씨의 목소리는 멀더를 연기했던 이규화 성우의 것이더군요). 말하자면 모든 성인드라마들이 카운슬링 형식으로 짜여져 있었던 거예요. 대부분의 고민은 충동적인 섹스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고요. 어느 날 술먹고 눈을 떴더니, 처음 와본 여관에 있었고 옆자리에는 어떤 남자 혹은 어떤 여자가 누워 있더라는, 그게 아니면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지금의 성생활에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더라는. 저의 눈에는 점점 이 모든 드라마들이 하나의 스핀오프 시리즈처럼 보였답니다. 그건 제가 야동에서 느꼈던 식상함과 다를 바가 없는 거였죠.

속으로는 벗어나고파 오열하고 있지만 방법이 없어요

<메디컬기방 영화관>

저는 그렇게 케이블에서 멀어지고 싶었어요. 마음 같아서는 차라리 일찍 잠자는 게 나을 것 같았고, 그게 아니라면 새로 시작하는 지상파의 드라마에 취미를 붙여보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죠. 하지만… 저는 결국 다시 그녀 앞에서 무너졌어요. 서영이 다시 케이블 성인드라마에 출연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거든요. <메디컬기방 영화관>이라고 과거에는 성생활에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기방에 와서 상담을 했을 거라는 설정에서 출발한 이야기였죠. 네. 역시나 카운슬링하는 드라마예요. 또 뻔한 거 아닐까 싶었지만, 첫회부터 바로 등장해주시는 서영 때문에 지켜봤습니다. 기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양반이 영화관의 주인인 계월에게 말했어요. “보물은 언제쯤 보여주려는가.” 제 마음도 똑같았답니다. 곧이어 그녀가 등장해서는 다짜고짜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어요. 옷이 하나둘씩 벗겨져 흘러내리다가 드디어 마지막 옷만 남았을 때 양반이 말했어요. “노망난 늙은이로 볼지 모르겠지만, 내가 자네의 마지막 옷고름까지 풀어도 되겠는가.” 이어서 그녀가 말했죠. “아무리 천한 기생이라고 하지만, 마지막 옷까지 벗기시려면 먼저 저에게 마음을 주셔야지요.” 헉. 역시나 그녀는 만만치가 않았어요. 급기야 다음회에서는 상반신 누드로 베드신까지. 환락에 젖은 그녀의 표정과 꽃나무를 타고 오르는 뱀의 모습이 교차편집되는 연출에서 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죠. 하지만 이미 너무나 단순한 이야기에 적응된 저에게 이 드라마는 너무 낯설었어요. 뭐랄까, 이건 제가 즐기던 다른 성인드라마에 비해 너무 복잡했던 거예요. 아니, 무슨 성인드라마에서 사랑이 싹트고 삼각관계가 펼쳐진답니까. 게다가 뭐가 이리도 많은 액션장면과 미스터리가 끼어 있던지. 정교한 고증으로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성생활 정보를 알려준다고 하지만, 제가 그것들을 활용할 만큼 잦은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서영을 좇던 저의 눈은 곧 이 드라마가 얼마나 놀라운 작품인지를 알게 됐어요. 단순히 보자면 이건 섹스 때문에 몸이 상한 사람들을 다시 섹스로 달래는 이야기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기생들을 다룬 전문직 드라마이자, 의학드라마이고 에로와 멜로의 관습에 액션과 미스터리를 가미한 드라마였던 거예요. 게다가 아까 이야기한 카운슬링과 밑밥 배우들의 경향까지. 말하자면 케이블의 성인드라마들이 가져온 모든 관습의 집대성이자 케이블이란 세계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설정을 가지고 만든 작품인 거죠. 저는 그날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꼭 이 드라마를 보라고 권유하곤 했어요. 회사 여직원들의 눈초리가 따갑기도 했고 가끔씩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했지만, 종종 몰래 찾아와 <메디컬기방 영화관>에 대한 애정을 털어놓는 동료들을 만날 때면 반가움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답니다. 뿐만 아니라 서영 외의 또 다른 배우인 진서연과 김세인의 전작들을 찾아다녔고, 그들의 인터뷰 기사를 탐독했어요. 닥치고 본방사수는 기본이고, 재방송까지 섭렵하다 못해 홈페이지를 찾아가 다른 네티즌과 함께 시즌2 제작을 요청하기도 했어요. 네, 전 드디어 이 세계에 진짜 중독이 되고 만 거예요. 이제 더이상 싱겁기 짝이 없는 지상파의 프로그램들은 제 눈에 꽂히질 않아요. 살충제의 공격에 내성을 더해가는 바퀴벌레마냥 저의 취향은 더 강하고 센 것만 찾고 있어요. 저는 이제 어떡해야 할까요. 저의 밤은 이렇게 핑크빛으로 가득한 케이블을 헤매며 보낼 수밖에 없는 걸까요? 정말 저는 어쩔 수 없이 추레하기 짝이 없는 30대 직장남성일 뿐인 건지. 흑, 저는 그냥 TV를 봤던 것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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