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기자 J의 <밤과 낮> 20일간의 감상일기
2008-02-28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1월26일.
영화보기 이틀 전

즐겁게 술 마시는 밤보다 술이 덜 깬 다음날 낮이 사실은 더 좋을 때가 있다. 늘 둘러싸여 있는 것들에서 약간 붕 뜨거나 살짝 밀려나온 느낌. 감각이 솔직해지고 더불어 마음도 좀더 선량해지는 느낌. 몸은 부대끼지만 감각은 예민해져서 평소 둔감했거나 외면했던 것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제대로 보게 되는 그런 느낌. 숙취로 괴로운 낮에 그런 느낌이 종종 온다. 홍상수의 영화를 본 날에도 어김없이 관객으로서 늘 그런 경험을 한다. 이번 영화도 어떨 것인지 궁금하다. <밤과 낮>이 빨리 보고 싶다…. 술이 정말 덜 깼는지, 오늘따라 1호선 전철역 철로 주변에 아무렇게나 삐져나온 풀포기가 무진장 예뻐 보여서 휴대폰으로 찍는 시늉을 해보았다.

1월28일.
<밤과 낮>을 보다

<밤과 낮>을 보았다. 이야기만 말하자면 주인공 성남(김영호)의 도피성 여행기다. 2007년 유학생 두명과 함께 대마초를 나눠 피운 것이 문제가 되자, 성남은 두려워 파리로 피신한다. 그 사연을 알려주는 짧은 전문이 나오고 나면 그는 파리 공항에 막 도착해 있다. 성남은 여기서 뭔가 새출발하는 마음을 먹어보려고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아니 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갑자기 길거리에서 10여년 전 연인이었던 민선을 만나게 된다. 민박집 주인의 소개로 알게 된 현주라는 유학생과 오르세 미술관에 그림도 보러 간다. 유명한 미술대학에 다니는 그녀의 룸메이트 유정(박은혜)도 알게 된다. 그냥 할 일 없이 보내는데 성남은 유정이 좋아진다. 성남의 구애가 시작된다. 그럼에도 서울에 두고 온 아내 성인(황수정)과는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김영호를 다시 만났는데 확실히 홍상수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것 같다. 홍상수는 “배우들이란 자기의 알몸을 다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존재를 항상 칭송한다. 그건 그의 영화에서 배우가 연기를 할 때 자기도 모르는 자기의 어떤 면모가 술술 생성되어 영화 속 하나의 인물로 재탄생되는 과정을 즐겨야 한다는 말도 된다. 그건 배우에 따라 매우 어렵거나 신이 나는 일이 될 텐데, 김영호는 영화 속에서 확실히 후자다. 영화 속 성남은 김영호처럼 정말 뚝심있어 보이기도 하고 영 상관없는 것처럼 나사가 좀 풀린 것도 같고, 하여간 김영호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그렇다면 성공적으로 성남이 된 것이다.

1월30일.
<해변의 여인>의 중래가 떠오르다

<해변의 여인>의 중래가 완성했다는 세쪽짜리 시놉시스가 혹시 <밤과 낮>은 아니었을까 쓸데없이 연결 지어 보았다. 작은 기적들 그리고 실패가 이 영화에는 많기 때문이다. 여하간 중래가 선보였던 이미지 론과 그림이 생각났다. 가령 <밤과 낮>을 <해변의 여인>의 중래가 한 것처럼 도형으로 설명해본다면 어떤 게 그려질 수 있을까. 시간이 나면 그려봐야겠다.

1월31일.
일기체가 주는 불균질한 느낌

안 쓰던 일기를 써보려니 막상 잘 안 된다. 그런데 왜 홍상수는 일기체를 쓴 걸까. “이번에는 그냥 그걸 해보고 싶어서”였겠지만, <밤과 낮>이 일기체가 됐다는 건 적어도 이 영화에 관해 두 가지는 말해준다. 홍상수의 영화는 항상 돌덩이 같은 형식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다 점점 그걸 풀어왔다. 이 영화에서 일기체를 쓰면서 그가 미리 알린 것처럼 정말 그의 영화 중 가장 불균질한 영화가 나온 것 같다. 하루는 생각하기 나름이라 1초 같기도 하고 1년 같기도 해서인가. 신들의 질량이 예고대로 조금씩 제각각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떤 큰 리듬에 따라 순조롭게 결합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일기체를 선택했다는 건 거의 모든 신에 성남이 나온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김영호가 안 나오는 신은 거의 없다. 그를 따라 진행돼서인지 그의 심리묘사도 전에 없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적극 반영되고 있다(하지만 다 믿을 건 못 된다). 성남이 북한 유학생(이선균)을 만난 뒤 갑자기 김일성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둥 운운하다가 성급히 빠져나와 “북한 사람을 만났으니 어떻게 하지. 대사관에 연락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장면이나 “당신에게 미술은 어떤 의미”냐고 묻는 사람을 앞에 두고 “이 집 음식은 너무 비싸고 맛없다”고 생각하는 장면 등은 큰 웃음을 자아낸다.

2월2일.
파스칼의 문구

합본호 휴가 첫날이다. 메모장을 뒤지다 보니 어디서 읽고 받아적어놓은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이런 게 있다. “파스칼은 이렇게 적고 있다. ‘두 얼굴이 꼭 닮았을 때 그 자체로는 어느 것도 재미있지 않지만 나란히 있으면 그 유사함이 우리를 웃게 한다’.” 홍상수의 영화는 이 말을 상기시키는 면이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좀더 기묘해진다.

2월3일.
그림과 홍상수

서울에서 열리는 고흐 전시회를 보러 가려는데, 계속 늑장만 부리고 있다. 영화에서 성남이 “고흐는 착해 보여요. 그리고 위대하고요”라고 말한 것 때문에 더 가고 싶은 모양이다. <밤과 낮>에는 고흐에 대한 성남의 대사가 나오지만 쿠르베의 그림도 나온다. 연출부 중 한명이 들려준 에피소드. 오르세 미술관이 오슨 웰스 이후 미술관을 대여해준 게 처음이라고 한다(아마 무료 대여를 말하는 거겠지). 그런데 관계자가 벌써 다 찍은 것이냐고 놀랄 만큼 성남과 현주가 쿠르베의 그림을 보는 장면은 빨리 찍혔다고 한다. 아마 홍상수는 굳이 그 그림에 의미를 부여했다기보다 화가 성남이 무엇을 할까 가정하는 과정에서 그곳에 가는 장면을 넣은 것일 거다. 어쨌든 여기서 홍상수는 배우들이 촬영 전에 나눴던 대화를 통째로 썼는데,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여자의 하반신 나체 그림 <세계의 근원>을 보는 장면이다. 두 인물의 결론은 “그림이 좀 그렇다”는 거다. 그 대화가 끝나고 나면 내내 그림을 등으로 가리고 있던 성남이 살짝 왼쪽으로 빠지고 영화는 우리에게도 그림을 보여주고 생각을 묻는다.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나는 그것을 그릴 수 있다”고 쿠르베는 J. A. 앵그르에게 말했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다는 뜻일 거다. <강원도의 힘>을 찍었을 때 홍상수는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성남이 비켜났을 때, 그럼 당신은 여기서 무엇이 보이는가, 영화는 묻는 것 같다. 이 장면 뒤로 홍상수가 정말 영화에 넣고 싶었다던 쿠르베의 다른 그림 <돌깨는 사람들>과 똑같은 장면을 파리 시내에서 우연히 봤고 홍상수는 그 장면을 촬영해서 영화에 넣었다. 정말 비슷하다.

2월7일.
시간의 실마리, 민선

언젠가 기사에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이라고 쓴 적이 있다. 당사자가 항의도 하지 않아 잘 몰랐었다. 왜 그런 착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1년쯤 지내다가 그 사람이 정말 세상을 등지고 며칠 뒤 우연히 사실을 알게 된 적이 있다. 많이 죄송했다. 성남의 아주 먼 옛날 애인 민선을 떠올리다 그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갑자기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성남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새까맣게 잊혀졌던 사람이었다. 기억 속에서 죽은 거나 진배없었다. 그녀를 만난 지 얼마 뒤 신문 한쪽에서 그녀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 성남은 운다.

나는 민선이 이 영화의 어떤 시간의 실마리인 것 같다. 민선이 중요하다기보다는 민선에서 시작되어 유정으로 그리고 아내로 관계 맺어지는 성남의 여자들이 꼭 시간의 현현인 것처럼 느껴진다. 처음에는 <밤과 낮>의 시간성이 지구 이편과 저편에 존재하는 같은 시간이되 빛과 어둠으로 갈리는 말 그대로 밤과 낮의 시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동시간대의 다른 느낌. 하지만 성남이 있는 파리는 두어 장면을 빼고는 거의 빛의 시간이다. 밤이라도 밝다. 밤과 낮의 비율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 홍상수에게 모티브는 모티브일 뿐 그는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건 실마리이며 말 그대로 그 실을 잡고 조금씩 앞으로 간다. 밤과 낮이 같은 시간에 공존한다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일까. 어찌 보면 서로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 더 진실이다. 성남은 밤마다 아내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것 같지만, 거짓말이 많다.

여기에는 차라리 ‘임신’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아주 긴 시간이 개입해 있다. 임신이라는 사건이 기억으로 혹은 앞으로 올 미래일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남겨진다. (믿기 힘들지만) 민선은 성남 때문에 중절 수술을 여섯번이나 했다고 말한다. 성남이 파리 생활을 접고 아내 성인에게 돌아가는 이유는 그녀가 임신했다고 거짓말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나려고 할 때 유정은 자기가 성남의 아이를 가졌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성남에게 그것은 거의 겹겹이 둘러싸인 죄의식이거나 골탕이거나 두려움인데 그때 민선은 꼭 미리 나타난 유정의 미래 같다. 그런데 성남이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이다. 여자들이 줄지어 등장할 때 성남의 모순된 진실과 시간의 퍼레이드를 보게 된다.

2월8일.
우연

전철역에 서서 돌아오는 월요일에 이창동 감독에게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창동’행 전철이 왔다. 이런 게 <해변의 여인>의 중래가 말하는 우연이라는 건가?

2월12일.
<밤과 낮>을 다시 보다

<밤과 낮>을 다시 보았다. 무대인사가 없었는데 감독과 배우들이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아 갔기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이창동 감독을 초청하여 함께 보았다. 그러니까 영화평론가 허문영식으로 표현하면 의미와 함께 앉아 비의의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이창동 감독이 들려준 새겨들을 만한 두 가지 의견. “홍상수의 영화는 그전까지 컨벤션에 대한 거부가 주된 관심사였다. <극장전> 이후로는 예술가의 자기 풍자로 향하고 있다. 이 영화의 구조는 주인공이 예술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밤과 낮>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상의 리얼리티로서의 장면은 제거되어 있다”.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이건 홍상수가 지금 무엇에 매진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홍상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대구와 반복,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상의 리얼리티를 적절히 사용했는데, 이제는 그것들을 점점 더 납작하게 누르고 있다. 어떤 예술가의 자기 고민의 심리적 흔적과 궤적도 더 짙게 보여준다. 그러나 홍상수는 항상 누군가의 말을 빌려 그걸 “다림질한다”고 표현한다. <밤과 낮>은 제대로 다림질된 영화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홍상수의 말은 그가 “상투적인 것들을 제하고 그중에 남는 것들로 이루어지는 일관성을 추구한다”는 것인데 지금 그 일관성을 납작하게 누르고 있거나 동글하게 말아쥐고 있는 구조로 가고 있다. <해변의 여인> 인터뷰 때 그에게 들었던 말. “중립적 표면, 완전한 구체.” 홍상수는 점점 더 맨들맨들한 영화에 이르고 있다. <밤과 낮>은 그런 영화다.

2월13일.
홍상수 영화의 배우가 되는 꿈을 꾸다

마감 압박 때문인지 지난 밤 꿈을 여러 개 꿨다. 홍상수가 나오는 꿈도 꾸었다. 그가 긴 레게파마를 하고 머리에는 기다랗게 솟은 모자를 쓰고 옷은 카바레 무대의상 같은 금색 옷을 입고 있다. 나는 그의 영화 속 배우다. 우리는 영화를 찍고 있는 중이다. 내가 연기가 잘 안 되자, 옆방에 있던 그가 내가 있는 방으로 건너오더니 “처음 봤을 때부터 널 배우 시키려고 했다니까”라며 식당 메뉴판을 보여준다. 거기에 이 영화에 출연하는 다른 배우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기억은 안 난다. 방을 나가면서 그는 내게 큰 방을 줬다는 표정으로 “내 방은 두평 반이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람은 원래 자기 틀 못 버리잖아. 하지만 그걸 버리면 선명해질 수 있어”라는 말도 함께했다. 우리는 액션영화를 찍고 있었고 내 역할은 감옥에 갇힌 죄수였지만 실제 장소는 유스호스텔 같은 곳이었다. 그가 액션을 부르고 잠에서 깼다. 도대체 이 저질 꿈은 뭔가.

<생활의 발견>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고깃집에서 경수가 술을 먹다가 바람 쐬러 나가려 할 때 갑자기 컵이 떨어지자 선영이 “자기가 깼어요?”라고 물으니 경수가 “아니요”라고 답하는 장면. 정말 경수가 그러지 않았지만 컵은 깨졌다. 불가해함. 그런데 꿈보다 더 불가해한 것이 있는가.

장담하긴 어렵지만 올해 나올 또 어떤 영화가 <밤과 낮>의 스산한 불가해함을 뛰어넘을지 자신할 수 없다. 홍상수의 영화는 점점 더 카메라가 포착하는 물질적 공기가 되어가는 한편, 또 한쪽으로는 꿈의 근사치까지 간다. 구체와 추상은 그런 식으로 합체되어가고 있다. <밤과 낮>에는 두번의 꿈장면이 나온다. 나의 저질 꿈과는 비교가 안 된다. 영화가 공개됐으니 어딘가에서는 묘사되겠지만 나는 당신을 위해 남겨두려고 한다. 두번의 꿈장면 중 나는 성남이 집에 돌아와 꾸는 꿈을 촬영할 때 마침 촬영장에 있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촬영날이었다. 하지만 여자 목욕탕신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다만 목욕탕신에 돼지 머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의아해한 기억만 있다. 목욕신을 찍는데 왜 돼지 머리가 필요할까. 그 뿐만이 아니라 이 꿈에는 이상한 혈맹식과 배신, 그리고 무언가 깨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설명할 수 없지만 이건 더할 수 없이 정확한 자리에서 꾸어지는 꿈이다. <오! 수정>에서 재훈은 그토록 원하던 수정과의 섹스를 하려다 수정의 이름 대신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산통을 깼다. 성남은 아내의 품에 안겨 다른 여자의 꿈을 꾼다. 그런데 정작 그 여자가 성남이 그토록 쫓아다니던 유정도 아니다. 그러니 성남의 꿈은 아내를 배신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정을 그리워한 탓도 아닌 것 같다. 아니, 잘 모르겠다.

2월14일.
마지막 장면에 눈물이 나다

영화를 보고 나서 몇몇 평론가에게 100자평을 의뢰했다. 변성찬씨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호평을 써 보냈다. 김봉석씨는 “나는 그다지 좋게 안 봤는데”라며 그래도 받겠냐고 되물었다. 다른 의견도 읽고 싶으니 받겠다고 했다. 남다은씨는 거절했다. 오늘은 술을 마시면서 영화의 감정에 취하고 싶지 평하고 싶지 않다고 전해왔다. 이해가 가서 그러라고 했다. 이 일이 아니면 나도 그냥 술이나 마셨을 것이다.

<밤과 낮>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어떤 고단함을 느꼈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왔는데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 성남의 대사가 생각나서는 아니다. 아직은 이 느낌이 예술가의 고단함인지 단지 구애에 또 실패한 한 남자의 고단함인지 혹은 그를 둘러싸고 있지만 누구도 성남의 온전한 마음 전부를 얻지 못한 여자들의 고단함인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것은 애석하거나 슬퍼서 그랬던 게 아니다. 어떤 충만함에 대한 지극한 노력이 느껴져서다. 이 영화가 삶의 충만함을 좇아 지고지순한 34일간의 시행착오를 한 끝에 결국 실패한 기록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충만한 순결함에 이르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어떤 자의 탐구와 엉뚱함. 작은 기적들을 믿으면서 사는 게 정말 그렇게나 힘든 일인가의 질문. 하지만 어떤 의미에도 기대지 않고 오로지 삶을 감각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려는 철저함. 그것이 아름다워 보여 울 뻔했다. 삶을 순결한 감각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자의 고단함이다.

<해변의 여인>의 중래는 영험해 보이는 나무 아래에서 엉엉 울었다. 그 나무의 영험함이 <밤과 낮>의 파리에서는 몇 가지 것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길바닥에 흘러가는 물에 휩쓸리는 개똥이나, 그 물에 종이배를 띄우는 성남의 행동, 우연히 성남의 어깨에 떨어져 생명을 부지하는 어린 새, 혹은 날파리가 눈에 들어갔을 때 들려오는, 이제는 이 여행을 끝맺어야 할 귀환의 신호로서의 아내의 거짓말. 작은 기적들과 혹은 그 실패.

마감이 지겹다, 라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인터넷에는 베를린영화제 소식이 이미 여기저기 올라와 있다. <밤과 낮>이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이 글이 인쇄되어 나가는 2월16일에 베를린의 소식도 들려올 것이다. <밤과 낮>에 더없이 어울리게 쓰인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이나 들어봐야겠다. 그러면서 생각을 해야지.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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