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연착으로 14시간이나 걸려 도착했다며 푸념하는 김영호의 얼굴은, 그러나 꽤 상기된 눈치다. 그럴 법도 하다. 김영호는 언제나 좋은 배우였지만 스포트라이트에서는 언제나 살짝 비껴나 있는 남자였다. 많은 TV드라마와 몇편의 영화(<클럽 버터플라이> <돌려차기>)를 거쳐온 그를 홍상수의 페르소나로 만났다.
-베를린에 오니 기분이 어떤가.
=모르겠다. 이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별로 없어서. 내가 주연했던 <블루>나 <클럽 버터플라이>도 반응이 좋았던 적이 없는 터라 이런 상황 자체가 좀 낯설다. 이런 것에 익숙한 성격도 아니다. 어제 누가 그러더라. 처음 배우가 될 때 베를린영화제를 꿈꾼 적이 있냐고. 그런 영화제가 있는지도 몰랐다고 대답했다. (웃음)
-<밤과 낮>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처음 했던 게 누군가.
=감독님이었다. 당시 외국에 있을 때였는데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일정 다 접고 바로 한국에 들어와서 뵀다. 한 두어 시간 이야기를 하고나서 두 번째 만나자마자 같이 영화하자고 하시더라고.
-이전에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좀 봤나.
=예지원이랑 친해서 <생활의 발견> 특별 시사 때도 갔었다. 아주 보기 힘든, 독특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만나서 작업하다보니까 그냥 독특한 정도를 넘어서는 또 다른 게 있더라. 만날 때마다 놀랐다. 지금도 여전히 나를 놀라게 하는 사람이다.
-뭐가 그렇게 놀라운가.
=정말 진실하다. 어떤 면에서는 나랑 세상을 보는 시각이 비슷해서 좋더라. 내가 생각하던 사회적 관념 혹은 내가 느끼는 것들과 일치하는 게 많았다.
-홍상수 감독에게서 왜 자신을 캐스팅했는지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나.
=물어봤더니 잘 모르겠다더라. 주변 사람들에게 <밤과 낮>에 어울리는 배우를 추천받는데 많은 사람들이 웃기게도 내가 맞을 것 같다고 했다더라. 그래서 내가 어떤 인간인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고 하셨다. 만나자마자 두어 시간 엄청 질문을 많이 하셨다.
-주로 어떤 질문들이었나.
=질문이 항상 정해져 있지 않았다. 본인이 불현듯 생각나는 걸 말씀하신다. 미리 정해진 대답을 준비하면 감독님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하여튼 내가 제일 좋아하고 할 수 있는 대답만 했다. 근데 그런 대답이 좋으셨나보더라. 첫날 나를 만나고 나서 정말 뿌듯했다고 하시더라. 그게 정말, 고마웠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배우 선택에 신중한 감독으로 알고 있는데. 김상경씨는 내가 캐스팅됐다는 말을 듣고 역시 홍 감독님은 캐스팅의 천재라고 말하더라. (웃음)
-김상경씨에게 조언을 좀 받았나.
=나는 조언 안 받는 편이다. 미리 알고 가면 재미가 없다. 모르고 가서 부딪히는 짜릿함과 스릴이 좋다.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미리 시나리오를 받은 적이 없다. 파리에서의 촬영 첫날 아침에 처음으로 받았다. 하지만 일단은 믿고 갔다. 감독님에게 그랬다. 나를 주연으로 쉽게 결정하신 것처럼 나 역시 ‘왜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라는 말을 안 하겠다고. 그냥 뛰라면 뛰고 달리라면 달리고 싶다고. 믿음으로 출발했다.
-영화에 대한 믿음인가.
=아니. 감독에 대한 믿음. 만난 지 한달 정도가 되자 완전히 감독님에게 올인 상태가 됐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배우는 배우 나름의 목적이 있고 감독은 감독 나름의 목적이 있어서 부딪힐 수도 있는데 <밤과 낮>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사실 믿고 할 수밖에. 대본도 없고 이야기도 안 해주고. (웃음) 주로 인터뷰당하는 입장으로 살았다.
-주로 어떤 질문을 많이 받았나.
=한번은 여자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더라. 이렇게 대답했다. 여자는 현실적일 필요 없다고. 여자는 꿈만 꾸고 살았으면 좋겠다. 남자는 여자가 꿈을 꾸게 도와주면 된다. 여자가 돈이 어떠니 삶이 어떠니 정치가 어쩌니. 이런 거 말하는 거 정말 싫다. 여자는 하늘이 예뻐요, 구름이 좋아요, 음악이 듣고 싶어요, 이런 이야기만 하면 된다. 대신 남자는 여자가 그렇게 아름답게 살도록 현실을 책임지면 된다. 그랬더니 그게 영화 속 대사가 됐다.
-그거 되게 구식 여성관이다. 욕 들을 소지가 크다.
=어쨌든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너는 행복하게 살라는 거다. 현실의 암울함은 내가 다 책임지겠다는 거다.
-하지만 성남이라는 캐릭터가 또 그렇게 다 책임지는 남자는 아니지 않나.
=아니다. 정확히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다르지 않다. 특히 어느 부분이냐면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고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가는 부분.
-하지만 박은혜가 연기하는 유정 캐릭터는 그대로 버려진다.
=하지만 성남은 매번 진실로 사랑을 하는 남자다. 어쨌든 이 남자에게는 그것 역시 진지한 사랑인 게 아닐까. 다만 사랑하는 상대가 여러 명이어서 그렇지. <밤과 낮>이라는 영화는 그냥 그 순간을 살아가는 한 연약한 남자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성남이라는 캐릭터와 김영호라는 배우는 동일한 사람인가.
=내 이야기를 많이 참조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니까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다른 것도 많다. 다만 완벽하게 성남이 되려고 많이 노력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여자들과 관계를 갖는 부분은 어떤가, 자신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 않았나.
=사실은 많이 안 맞지, 너무 안 맞다 나랑은. 근데 감독님이 그렇게 하라더라. 그런데 술을 먹으면서 내가 꿈꾼 내 안의 또 다른 모습을 생각해보니 그런 모습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예전에는 묻어놨던 그 모습들을 꺼내놓는 작업을 시작했고 영화에다 그걸 풀었다. 거짓말처럼이 아니라 진짜로. 연기가 아니라 그냥 거기에 나와 있는 그대로. 내 안의 다른 남성을 찾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홍상수 감독의 현장이 예전 영화 현장들과 낯선 점이 없었나.
=성남에게 빠지는 데 시간을 다 보냈기 때문에 현장의 새로움을 판단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누구는 파리가 어땠냐고 묻더라. 파리를 볼 시간도 없었다. 게다가 하루에 두장 세장씩 당일 대본이 나왔기 때문에 그걸 하루하루 표현해내기에도 벅찼다. 그런데 홍 감독님은 ‘좋아!’라는 말을 많이 하셨다. 적게는 한 열다섯번 정도 테이크를 가고, 많이 가면 삼십번 정도 갔다. NG없는 테이크 말이다. 뭔가 나한테서 더 나올 게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더라고.
-연기 사상 테이크를 가장 많이 가본 경험이 아닌가.
=근데 나에게는 마치 연극 작업처럼 느껴져서 아주 재미있었다. 나는 연극으로 시작한 사람이다. 그래서 테이크를 따고 잘라가고 이런 거 싫더라. 무당 굿판 하듯이 혼자 외워서 그대로 주욱 흘러가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그게 감독님 스타일과도 잘 맞았던 것 같다.
-살도 좀 찌우라던가. 홍 감독은 배우들 살 찌우는 걸로 잘 알려져 있잖나.
=그건 아니고…. 내가 몸이 원래 되게 좋다. 허벅지와 팔뚝도 굵고. 그런데 그게 고민이 됐다. 짧은 옷 입고 벗으면 몸짱배우처럼 보일 텐데 어떡하나. 그런데 또 아주 망가지는 건 좀 그렇다. 40대 초반의 일상적인 화가라면 운동을 많이 안 하겠지만, 그래도 요즘 화가들은 자기 관리도 아주 잘한다. 미적 감각이 좋기 때문이다. 그런 화가가 가진 몸이 어떤 모양일까 싶어서 나름대로 준비한 게 윗배 약간 나오고 그림 그리느라 팔은 좀 두터운 남자다. 해서 그냥 살을 살짝 찌우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냈다.
-“장군감”이라는 대사도 영화에 나온다. (웃음)
=그것도 감독님이 하신 말씀이다. 영호는 장군감이라고.
-대부분의 대사와 자기 말이 다 들어가잖나. 그거 좀 싫어하는 배우들도 있는데.
=난 좋다. 모든 장면에 자신이 등장하는 영화를 가진 배우는 세상에 또 없을 거다. 사실 그건 좀 걱정이 되더라. 과연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계속 영화 속에서 보고 싶어할까?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감독님이 그러더라고.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영호 네가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 정말 보고만 있어도 좋다고. (웃음)
-딱 연애네.
=딱 그런 느낌이었다. 그게 힘이 됐고. 항상 귀엽다 그랬고, 너무 귀엽다고. 감독님이 제일 좋아하는 표현이 귀엽다다. 너무너무 좋으면 귀엽다. 그게 최고의 표현이라더라. 사실 그런 이야기 들은 적 별로 없었거든. 근데 너무 많이 들어서 이상하지 않더라 나중엔. (웃음) 영화가 끝난 다음에 알게 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제작 도중에 영화사가 바뀌는 일이 있었다. 당시 감독님이 일주일 동안 나한테 전화를 안 하더라. 근데 한국 시사 때 한 스탭이 이야기를 해주길, 감독님이 나만 좋다면 8mm 비디오 하나 들고라도 파리에 가서 영화를 완성시키겠다고 했단다. 다 놔두고 영호만 데려가서 영화를 만들겠다고…. 감동먹었다. 더 좋아졌다. 그거야말로 배우에게는 최고의 찬사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