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류(華流)의 새로운 변신이다. 홍콩의 액션이 아닌 중화권의 젊은 문화가 뜨고 있다. 대만의 청춘 드라마를 비롯, <영원한 여름> <말할 수 없는 비밀> 등의 멜로영화가 국내에서 작지만 인상적인 반응을 얻고내고 있다. F4, 비륜해 등 꽃미남 아이돌 스타의 각광, 주걸륜의 부상도 새롭다. 기합을 넣고, 쌍절곤을 휘두르던 중화권에 어떤 바람이 불고 있는 걸까. 최근 국내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중화권의 새로운 대중문화를 살펴봤다. 더불어 현재 중화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기 스타 4인의 소개와 <쿵푸덩크>의 홍보를 위해 방한한 대만의 신성 주걸륜의 인터뷰도 싣는다.
미드, 일드에 이어 이번엔 대만 드라마일까. 인터넷 다운로드, 케이블 채널 등을 통해 최근 대만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2007년 1월25일부터 4월27일까지 SBS드라마플러스에서 방영된 <장난스런 키스>는 평균시청률 1%, 최고시청률 1.5%를 기록했고, 2007년 9월 KBS드라마에서 방영된 <화양소년소녀>는 최고시청률 0.9%를 기록했다. <장난스런 키스>의 경우, 종영 뒤 문의가 쇄도해 SBS드라마플러스은 시즌2의 방영을 올해 4월에 하기로 결정했으며, 출연배우들의 내한도 예정돼 있다. SBS드라마플러스의 유호진 팀장은 “대만 드라마의 반응이 일본 드라마와 비교해도 월등히 크다. 게시판이 도배될 정도다. 요즘 일본 드라마는 시청률 0.5%가 나오기도 힘들지만 대만 드라마는 붐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장난스런 키스>는 ‘2007년 SBS드라마넷플러스 외화 분석’ 결과 구사나기 쓰요시가 출연한 일본 드라마 <푸드 파이터>를 누르고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사실 케이블 채널에서의 반응은 실제 대만 드라마에 대한 수요의 극히 일부분이다. 인터넷엔 중화권 드라마와 스타들에 대한 카페가 최근 5년 사이 급속도로 많아졌다. 중국 무협물, 대만 현대 드라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네이버의 무협중국드라마 카페(cafe.naver.com/mjbox)는 2005년 4월 카페를 개설한 뒤 회원이 지속적으로 늘어나 현재 회원 수가 7만명에 이르며, 최근 대만에서 제작되는 청춘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자주 출연하는 아이돌 그룹 비륜해의 다음 카페도 개설 2년 만에 회원 수가 1만2천명을 넘었다. 대만의 가수이자 배우인 주걸륜의 다음 팬카페(http://cafe.daum.net/jielun)의 운영진 최윤정씨는 “인기 드라마의 경우 대만에서 방영된 지 2시간 뒤면 한국에서도 다운로드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일본 드라마, 미국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드라마의 자막도 제작해 서로 공유한다. 최근 네이버 지식검색엔 현재 대만에서 방영 중인 <장난스런 키스> 시즌2의 방송을 어디에서 볼 수 있냐는 문의가 게시판을 도배하듯 올라오고 있다. 과연 ‘대드의 등장’이다.
2007년 11월, 네이버 인기 검색어 순위에 <말할 수 없는 비밀>이란 제목의 영화가 1위로 등장했다. 주걸륜 감독에 주걸륜 주연작. 국내 개봉일정도 잡히지 않은 이 미지의 영화는 네티즌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화제작이 되었다. 더불어 대만의 스타 주걸륜도 떠올랐다. 2008년 1월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인터넷에서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20여개관을 통해 작은 규모로 개봉했는데 2월 현재까지 16개관에서 상영되며 8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의 수입사인 스폰지의 김민정 대리는 “최근 높아지고 있는 국내의 대만 드라마 인기를 감안해 개봉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비슷한 규모로 개봉했던 일본영화 <황색눈물>과 <허니와 클로버>가 각각 4만명 정도의 관객을 불러모았던 점을 떠올리면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흥행 성공은 신기하고도 놀랍다. 게다가 <황색눈물>은 국내에서도 인기가 많은 일본의 아이돌 그룹 아라시의 전 멤버가 출연한 영화다. 영화사 모인그룹은 최근 두달여 안에 급속히 늘어난 주걸륜의 인기를 타고 그의 최신작 <쿵푸덩크>를 2월28일 국내 개봉한다. 이외에도 현재 인터넷에선 대만 그룹 K ONE의 멤버 달륜이 출연한 <연습곡>, 영화 <영원한 여름>의 장효전이 출연한 <잠자는 청춘>, 국내에서 장나라의 남자친구란 소문으로 유명해진 하윤동 출연의 <기인결정아애니> 등이 다운로드를 통해 인기를 얻고 있다.
홍콩에서 출발, 대만으로 갈아탄 중화권 문화열차
대만의 인기 아이돌 스타가 출연하는 드라마와 영화. 최근 국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중화권 대중문화의 흐름은 90년대 중반 상황과 사뭇 다르다.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에서의 중화권 문화라면 유덕화, 장국영, 주윤발 등이 중심이 된 홍콩의 액션영화였다. <영웅본색> <천장지구> 등. 혹은 <동사서독> <의천도령기> <녹정기> 등의 무협물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남미녀의 만화적인 사랑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학교를 배경으로 꽃미남 꽃미녀가 등장하고 이들의 비현실적인 사랑이 만화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다. 대만에서 제작되는 일명 우상극(偶像劇: 아이돌 스타가 등장하는 청춘물. 주로 일요일 밤 9시에 방송된다)은 모두가 그렇다. 영화의 경우 드라마처럼 그 정도가 심하진 않지만 여성 팬들을 겨냥한 청춘드라마, 코미디가 늘고 있는 추세다. 2007년 국내에서 개봉한 장예가, 장효전 주연의 퀴어영화 <영원한 여름>은 학창 시절의 아픈 기억을 사랑과 우정이란 모티브로 풀어간 작품이고, 주걸륜 연출, 주연의 <말할 수 없는 비밀>도 학교를 배경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서로 다른 시간 안에서 그려낸 영화다. <쿵푸덩크> 역시 쿵후를 소재로 삼고 있긴 하지만 상하이 빌딩 숲 사이로 농구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대륙색은 점점 옅어지고 모던한 일상의 대한 젊은 감각이 두드러지고 있는 셈이다.
중화권 대중문화의 변화는 사실 홍콩에서 대만으로의 흐름 변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변화 안에는 일류와 한류의 영향도 있다. 홍콩 누아르 혹은 중국 무협물이란 장르 안에서 자기 복제를 반복하던 1990년대 후반 이후의 홍콩영화는 국내에서도 인기를 잃었다. 이후 국내 중화권 대중문화 팬들은 일본 문화의 영향으로 세련된 대만 드라마와 한류의 영향으로 친숙해진 중국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최윤정씨는 “90년대 중반까지 홍콩의 4대 천왕을 좋아하다 흥미를 잃고 2000년 이후 주걸륜을 좋아하게 됐다”고 말한다. 실제로 홍콩에서 4대 천왕 이후 새로운 스타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달리 대만에서는 최근 5년간 F4를 비롯해 비륜해, 주걸륜, 정원창, 나지상 등 새로운 스타를 연이어 내놓고 있다. 국내에서 중화권 대중문화가 새로 부각하기 시작한 것도 F4 이후다. 주걸륜한국후원회(www.jaykorea.com)의 한 운영진은 “2002년 F4가 출연한 드라마 <유성화원> 이후 한국 사람들이 대만 드라마를 좋아하게 됐다”고 말한다. 최윤정씨의 말처럼 “홍콩에선 아직도 유덕화가 영화 찍고 장학우가 연창회를 할 정도”로 차세대 스타가 없는데 대만에선 꽃미남 스타가 줄줄이 나와 국내 팬들의 구미를 당기고 있다. 실제로 국내에서 인기를 얻은 작품들은 F4가 출연한 <유성화원>부터 정원창이 출연한 <장난스런 키스>, 비륜해의 오존이 출연한 <화양소년소녀>와 <동방 줄리엣>까지 대다수가 대만의 신세대 스타들의 출연작들이다. “다소 범접할 수 없었던 느낌의 홍콩 4대 천왕”은 대만의 친숙한 꽃미남 스타들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주걸륜이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부른 노래 <Qing Tian Wa Wa>는 일본어로 ‘데루테루 보즈’다. 데루테루 보즈는 일본에서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며 창문에 달아놓는 하얀 인형.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대만은 드라마나 영화 이곳저곳에 일본적인 요소를 그대로 드러낸다. 드라마 <유성화원> <장난스런 키스> <화양소년소녀> <동방 줄리엣> 등은 모두 일본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들이며, <유성화원>과 <화양소년소녀>는 일본에서보다 먼저 드라마로 제작됐다. 최근엔 <허니와 클로버>를 드라마로 찍고 있다. 주걸륜 다음 카페의 윤지현씨는 “주걸륜 사인회날에 이상하게 매번 비가 왔다. 그러면 팬들이 현장에서 직접 데루테루 보즈를 만들어 단다. 대만은 일본 문화가 그대로 묻어난다”고 말한다. 일본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지 않은 경우에도 대만 드라마들은 일본 드라마의 컨셉과 설정을 많이 차용한다. 비륜해의 멤버 세명이 함께 출연한 드라마 <종극일반>은 일본의 <고쿠센>과 비슷한 컨셉의 작품이다. 문제아들이 모인 반에 여선생님이 새로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실제로 대만의 연예인들은 오락프로그램에 나와 ‘가와이~’(귀엽다는 뜻의 일본어)를 연발할 정도로 일본 문화를 좋아한다.
새콤달콤 중독성 강한 대만 드라마
한류의 영향도 상당하다. 드라마 대사 중에 “그 남자 배용준 닮았어?”란 말이 나오기도 하고, 한국 드라마 표절설이 돌 정도로 국내 드라마의 컨셉과 스토리를 그대로 차용한 경우도 많다. 대만판 <풀하우스>라 불렸던 드라마 <미소 파스타>는 스타 남자주인공과 일반인 여자주인공의 설정으로, 정지훈(비)과 송혜교가 출연했던 국내 드라마 <풀하우스>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부잣집 아들이 기억을 잃고 가난한 여자와 만나 사랑을 하는 이야기인 <왕자변청와>는 지성과 유진이 출연한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를 떠올리게 한다. 최윤정씨는 “대만 사람들도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봐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를 안다”며, “이게 대만 드라마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또 한류의 영향을 받은 중화권 드라마의 경우, 한국의 스타를 직접 캐스팅한 작품도 많다. 장나라와 대만의 소유붕이 출연한 <디아오만 공주>, 김정훈, 대만의 비비안 수가 출연한 <연애병법>, 한국의 유하나가 주인공인 <방양적성성> 등. 윤지현씨는 “한국 스타가 나오면 일단 궁금해서 본다. 실제로 대만이나 중국에서도 한국 스타가 나올 경우 시청률이 높다. 시청률이 높거나 주목받는 작품이면 일단 먼저 보게 된다”고 말한다.
일본과 한국의 대중문화를 수용한 중화권의 드라마. 중국 본토에서도 한류의 영향으로 청춘 트렌디물을 만들고 있지만 아직까지 국내에서 인기를 얻는 작품들은 대다수 대만에서 제작된 작품들이다. 그렇다면 국내의 대만 드라마 팬들은 왜 일본 드라마와 한국 드라마가 아닌 대만 드라마는 보는 걸까. 김민정 대리는 “대만의 청춘물이 일본의 드라마보단 국내 팬들에게 더 대중적이고 친근하다”고 말한다. “같은 꽃미남이라 해도 일본은 좀 판타지적이고 현실감이 없다면 대만은 친근하달까.” “이와이 순지 영화적 감성” 혹은 “다소 독특한 느낌”의 일본 드라마와 달리 대만 드라마는 부담이 없다는 거다. 최윤정씨도 “한국 드라마는 사연이 많고 일본 드라마는 대사로 무언가 생각을 하게 한다면 대만 드라마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일본 만화에서 흥미있는 스토리를 가져와 이를 30편 혹은 40편, 길게는 50편까지 원작 이야기 그대로 옮겨놓는다. “일드는 보통 11편이라 같은 만화를 원작으로 해도 압축하고 변형하지 않나. 하지만 대만 드라마는 원작을 그대로 옮기기 때문에 본인이 좋아하는 장면이 대사도 똑같이 그대로 재연된다.” 주걸륜 팬까페의 양희진씨는 “다소 촌스럽지만 친근해서 중독되”고, “별나라 이야기 같은 일본 드라마와 달리 접근하기 쉬워서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아이돌 스타와 감각적인 이야기로 무장한 중화권 대중문화. 아직 그 시장이 크진 않지만 최근 국내에선 세련되게 변신한 중화권 대중문화가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올해 초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유덕화, 이연걸, 금성무 주연의 무협 액션영화 <명장>과 주걸륜 주연의 멜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흥행 성적만 비교해도 그렇다. 1월31일 구정을 겨냥해 300개관 이상의 스크린에서 개봉한 <명장>은 40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그 십분의 일도 안되는 수의 극장에서 8만명을 기록한 것과 대조적이다. 김민정 대리는 “예전엔 구정이나 추석이면 중국 무협영화, 성룡영화는 꼭 된다는 정설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도 않다”고 말한다. 확실히 4대 천왕이 주춤하는 동안 대만의 젊은 스타들은 국내의 새로운 아이돌이 되었다. 기합이 들어간 쿵후 액션 대신 달콤한 느낌의 노래를 들려주고, 핏빛의 뜨거운 복수극 대신 만화 같지만 설레는 사랑을 보여준다. 할리우드의 늘씬한 스타, 일본의 화려한 아이돌과 또 다른 화류(華流)의 감각적인 변신. 2008년 중화권 대중문화는 어느 때보다 신기하고 흥미진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