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금보는 홍콩영화의 전설이지만, 그가 지금 서 있는 곳은 홍콩영화의 중심은 아니다. <삼국지: 용의 부활>의 나평안의 처지도 그렇다. 조자룡보다 일찍 전쟁터에 뛰어들었지만 그는 제대로 창 한번 휘둘러보지 못한다. 전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용맹스러운 장수들을 부러워하다 늙어버린 나평안. 조자룡의 마지막 출정을 거드는 나평안의 눈물은 전설을 지속하지 못한 홍금보의 아쉬움이 아닐까. 하지만 현실의 홍금보는 울지도, 비관하지도 않았다. 외려 그는 “홍콩을 떠나면서 후배들을 책임지지 못했다”는 말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다고 했다. 짧은 인터뷰였지만 “좀더 글로벌하고 보편적인” 홍콩영화, 그리고 또 다른 중국영화의 신세기를 점치는 그의 진심을 대하면서 전설이라는 수사가 너무 이른 것 아닐까 싶었다. 그 또한 전설이라기보다 맏형으로 불리고 싶어했다.
-어제(3월23일) 한국 기자들과의 그룹 인터뷰는 어땠나. 다들 지난해 말 터져나온 사망설에 대해서 물었을 텐데.
=지겹지. 사실 중국에서 그 기사가 나오기 전에 비서가 어디선가 그 소문을 듣고 전해줬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근거없는 소문을 퍼트렸나 궁금해하고 있던 차에 기사화된 것이다. 여기저기서 전화 걸어서 살아 있느냐고, 괜찮냐고 물어보니까 나중에는 성가시더라. (갑자기 한국말로) 당신 죽었어? 나 안 죽어. 당신 죽었어. 아, 안 죽어! (웃음) 변호사들이 소문을 퍼트린 장본인을 고소하자고 했는데 그냥 참고 넘어갔다.
-무술감독을 맡으면서 연기를 하는 것이 이제는 하나만 하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러울 것 같다. 감독으로부터 어떤 역할을 먼저 제안받았나.
=무술감독이 먼저지. 영화 들어가기 2년 전에 이미 프러포즈를 받았다. 나평안 역은 시나리오가 나온 다음에 내가 달라고 한 거다. 원래 그 배역은 다른 대륙 배우가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스케줄이 맞지 않아서 감독도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 배우밖에 없다고, 그가 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시나리오 수정 뒤에 욕심이 났다. 이런 방식의 합작영화는 대륙과 홍콩 출신 배우들의 비율을 애초 합의한 대로 지켜야 하는데 대륙 출신 배우 대신 내가 들어가면서 좀 복잡해지긴 했을 것이다. (웃음)
-최근 중국에서 만들어지는 대작영화들은 스케일이 엄청나다. 과거 본인이 주로 맡아왔던 액션영화와는 규모가 달라서 애먹지 않았나.
=무술감독으로서 해야 할 일은 별로 다르지 않다. 나야 주로 주인공들의 액션을 맡으니까 거기에 포커스를 맞추면 된다. 다른 인물들의 경우 무술 부감독이 따로 있고, 그들과는 사전에 여기 30명은 누가, 저기 30명은 또 누가 이런 식으로 나누니까 큰 문제는 없다.
-나평안의 경우 액션장면이 많지는 않지만 말 타는 것도 젊었을 때만큼 쉽지는….
=(이미 질문을 간파하고 한국어로) 아파, 여기 아파. (웃음) 아직 젊다. 난 슈퍼맨이라고 전에도 말했잖나. 물론 말 타는 건 좀 조심해야 한다. 말이 흥분해서 날뛰는 수가 있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 사실 18살 때는 말 타는 것도 전혀 두렵지 않았는데 요즘은 조심을 해야 한다. 벌써 스물여덟 아닌가. 하하하하하. 내 몸을 쓰는 건 좀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 몸에 익숙해져 있으니 다른 이에게 액션 연기를 지시하는 것보다는 쉽다. 게다가 내가 액션을 좀 잘하지 않나. 머리 회전도 좀 되고. 하하하하하. 과거 <패가자>(1983)에서 술독 떨어뜨리는 장면을 찍다가 쉰네번이나 NG를 낸 적도 있지만. 사실 그 영화는 다행히 내가 감독이어서 원 모어, 투 모어가 가능했다.
-지금까지 출연작들은 대개 선한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살파랑>(2005)에서는 악역으로 나왔다던데.
=암흑가 보스로 나온다. 그런데 관객은 암흑가의 세계가 어떤지 다 알지 않나. 영화 또한 아내와의 사랑이나 경찰과 충돌을 빚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결국 용서할 수밖에 없는 악인이다. 다른 부하들은 다 죽고 감옥에 가서 속죄까지 하게 되니까.
-1997년 홍콩 반환 뒤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홍콩 영화계를 마주했을 때 기분이 어땠나.
=떠날 때는 모든 상황이 어지러웠다. 1997년 9월경에 미국 가서 <동양특급 로형사> 등을 찍으면서 활동하다 2001년 무렵을 전후해서 다시 홍콩에 돌아왔다. 주역들이 떠나 있는 동안 홍콩영화는 새로운 액션을 만들지도, 그렇다고 새로운 가능성을 품은 인재들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걸 보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가 계속 남아서 작업을 했더라면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여전히 내 눈에 홍콩영화는 침체기이고 새로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나의 숙제다.
-대륙과의 합작 형태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들이 많다.
=대륙이어도 좋고, 한국이어도 좋다. 합작을 통해 홍콩영화가 자극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당신은 홍콩영화를 중국영화의 한 지류라기보다 여전히 독자적인 영역으로 여기는 것 같다.
=물론. 홍콩영화는 홍콩영화다. 액션만 하더라도 다르잖나. 홍콩의 액션은 글로벌하다. 가두지 않고 받아들인다. 반면 여전히 대륙은 전통무술뿐이다. 그것만을 고집한다. <삼국지: 용의 부활>이야 배경이 고대니까 그런 다름이 두드러지지 않지만. 조자룡에게 복싱을 시킬 수는 없잖은가. (웃음)
-당신은 감독이고, 제작자이고, 배우다. 창작자 입장에서 여전히 대륙의 검열을 고려해야 하니 부담스럽고 갑갑할 것 같다.
=아무래도 소재 제한이 많다. 홍콩영화로만 활동할 때보다는 제한이 많다. 기획 제작서를 올린다고 해도 그쪽에서 노, 노 하며 비준을 해주지 않으니까. 현실적으로 대륙과의 합작을 원한다면 수정을 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앞으로 출연할 작품이 있나.
=<투사>라는 영화가 있다. 홍콩에서는 이미 상영 중이다. 암흑가 보스로 나온다. 꼭 보라. 아주 좋다. 그리고 무술감독으로도 참여한 작품이 있다. <엽문>이라고 이소룡의 스승에 관한 스토리다.
-‘홍금보’는 이미 전설이다. 전설인 당신이 영화로 살아오면서 전설로 삼아왔던 이는 누구인가.
=전에도 말했지만 호금전은 홍콩영화의 전설이자 나에겐 스승이기도 하다. 그리고 서극. 테크니션으로서의 전설이다. 배우의 캐릭터를 빚어내고 빛을 다루는 솜씨는 일품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