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44도 찜통더위와 황사바람에도 놈놈놈은 달린다
2008-07-01
글 : 문석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2007년 8월9∼14일, 중국 둔황의 촬영장

2007년 8월9일, 중국 둔황공항
-‘나쁜 놈’들 등장하다

“아니, 저희가 무슨 일 하는 사람인 줄 아세요? 이렇게 마음대로 와서 취재를 하겠다뇻!”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마케팅을 책임지는 K 대표가 분을 가누지 못한 듯 신경질적으로 따져 묻는다. “에… 그게….”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뭔가 재치있는 농담이라도 던져서 상황을 모면해야 할 텐데, 예상보다 거친 항의에 머릿속이 하얘진다. 다혈질인 그녀는 이내 가방을 끌고 씩씩거리며 공항 로비를 거쳐 한밤중의 공기 속으로 빠져나갔고, 우리 취재진은 중죄를 지은 범인마냥 터덜터덜 뒤를 따랐다. 비행기를 두번 갈아타며 거의 하루를 꼬박 날아 서울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 도착한 우리가 곧바로 구박데기가 된 사정은 이렇다.

<놈놈놈>의 현장 방문은 영화기자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리는 ‘원추 아이템’이었다. 김지운 감독이 어떻게 서부극을 찍고 있을까, 송강호, 이병헌, 정우성이 한자리에 모이면 어떤 분위기가 나올까,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인 현장의 모습은 어떨까 등등 현장에 대한 궁금증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작진은 좀처럼 촬영장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중대한 정보가 입수됐다. 2007년 8월9일 마케팅팀과 포스터 촬영팀이 둔황 현장으로 가는데 김지운 감독과 절친한 몇몇 영화인들도 동행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때를 디데이로 삼은 것은 마케팅팀이 있으니 현장과 다리를 놓기 쉽고, 감독과 친한 영화인들 사이에 묻혀 있으면 취재진도 눈총을 덜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프로젝트에는 위험부담이 있었다. 만약 현장에서 취재를 거부당하면 빈손으로 돌아와 회사로부터 받은 적지 않은 출장비를 고스란히 뱉어내야 하는데다 좋지 않은 눈길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고 마케팅팀에 미리 허락을 맡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허락을 구하는 바로 그 순간, 거사는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결국 현지에서 사후(事後)허락을 구하느냐, 깨끗하게 포기하느냐,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고민의 순간, 머리 위로 삼지창을 든 조그마한 악마가 펑하고 나타나더니 달콤하게 말한다. “막상 거기까지 갔는데 쫓아내기야 하겠니?” 오케이, 클릭, 클릭. 항공권은 결제됐고, 일은 되돌릴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악마의 말을 쉽게 믿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둔황공항에 내리자마자 증명됐다. 취재고 뭐고, 발마사지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출장비를 벌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2007년 8월10일, 둔황시 외곽 판자촌 세트장
-‘좋은 놈’들을 만나다

K 대표는 여전히 뿔난 상태다.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해 성격 좋아 보이는 마케팅팀의 P 실장에게 딱 달라붙어 애원의 눈길을 보내니 “일단 현장까지는 같이 가는데, 취재 가능 여부는 감독님, 제작진과 상의해서 알려주겠다”고 말한다. 이것만 해도 어딘가 하면서 현장으로 향한다. 버스 옆자리에 앉은 정두홍 무술감독이 “괜찮아,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라고 말하지만, 불안에 떠는 우리를 위로하는 차원의 발언임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사막을 가로질러 1시간30분가량 달린 끝에 도착한 판자촌 세트장은 하얀 모래언덕 아래쪽에 지어져 있었다.

이곳은 193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하는 <놈놈놈>의 주요 공간 중 하나인 조선인 빈민촌 세트장이다. 이 공간은 나름의 역사적 개연성을 갖고 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의 권력을 획득한 일제는 이듬해 만주국 수립을 선포하고, <마지막 황제>의 주인공 푸이를 허울뿐인 권좌에 앉힌다.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 그러니까 일본을 중심으로 조선, 만주, 몽골, 중국의 다섯 민족이 함께 화목하게 살아보자는 구호를 내세웠고, 드넓은 만주땅에 대한 개척을 장려했다. 핍박한 조선땅에서 고통받던 조선의 민중은 열차를 타고 만주로 건너와 불하받은 땅을 경작하거나 철도공사에 뛰어들었고, 독립운동가들 또한 상대적 자유를 찾아 이곳으로 왔다. 1932년 60만명이던 조선 이주민은 42년 150만명에 이르렀을 정도. 결국 이곳은 신대륙이자 기회의 땅인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비루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꿈꾸던 땀내나는 터전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감회에 젖을 입장이 아니다. 취재를 성사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단층과 2층으로 이뤄진 허름한 목조건물이 양쪽으로 늘어선 서부극풍 세트장의 중앙에서는 스탭들이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눈부신 햇빛에 달아오른 사막의 공기가 아침 일찍부터 후끈거리는데도 스탭들은 긴팔 셔츠와 두건, 후드 등으로 온몸을 칭칭 감싼 채 기자재를 나르고 있다. 사막이라 땀이 거의 나지 않는 대신 태양광에 노출되면 온몸이 훌러덩 타버리니 몸을 최대한 가리는 게 최선이라고 P 실장이 말해준다. 그때 보라색 점퍼를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김지운 감독이다. “어… 그래… 어떻게 왔어?”라고 그는 말했다. ‘잘 왔어’도 아니고 ‘왜 왔어’도 아닌 ‘어떻게 왔어’라니. ‘비행기 타고 왔다’고 썰렁한 농담을 하려다가 “감독님이 너무 보고 싶어 왔죠”라면서 속보이는 아부를 떤다. “어….” 야릇한 한마디를 남긴 채 스탭들 속으로 그는 걸음을 옮긴다. 이제 <놈놈놈>의 60회차 촬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때 P 실장이 다가오더니 “일단 보는 건 괜찮은데 사진은 찍을 수 없다”라는 입장을 말해준다. 고개를 들어 저쪽을 보니 조금은 누그러진 듯, 스탭과 깔깔거리고 있는 K 대표가 보인다.

이날 촬영은 윤태구(송강호)의 장면으로 시작됐다. 거인국에서 선풍기로나 쓸 법한 초대형 강풍기가 돌아가면서 모래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감독은 “레디”를 외치고,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는 태구의 모습을 뒤에서 찍기 시작한다. “병헌이랑 우성이는 멋있잖아요. 그 친구들은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찍는데 나는 보다시피 뒷모습이나 찍고 있다고. 우헤헤….” 카메라 위치를 옮기는 동안 유난히 홀쭉해진 얼굴의 송강호가 농담을 던진다. 그는 가죽바지와 가죽조끼에 ‘깔깔이’라 부르는 누비조끼를 겹쳐입었고, 가죽으로 된 파일럿 모자까지 쓰고 있다. 그늘 아래서 잠시 옷을 풀어헤쳤다가 앞모습을 찍기 위해 다시 햇빛 아래로 나서는 그를 보니 마음이 짠해진다.

오후가 시작되자 이병헌과 정우성이 촬영장에 나타난다. 이제 세 사람의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좋은 놈 도원(정우성), 나쁜 놈 창이(이병헌), 이상한 놈 태구, 이 세‘놈’들은 영화 초반부에 운명적으로 스쳐간다. 마적단 두목 창이는 김판주라는 친일 인사로부터 내용을 알 수 없는 지도를 손에 넣으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 지도는 가네마루라는 일본인의 손에 있는데, 창이는 그가 타고 있는 기차를 세워서 지도를 뺏으려 한다. 그런데 이 기차에는 열차강도 태구가 타고 있다. 태구는 승객들의 금품을 털다 얼떨결에 지도를 손에 넣게 된다. 한편 창이를 잡기 위해 기차에 타고 있던 현상금 사냥꾼 도원은 기차를 세운 창이를 발견한다. 이때부터 지도를 쥔 태구와 그를 쫓는 창이, 창이를 쫓는 도원의 엎치락뒤치락 추격전이 시작된다. 조선인 빈민촌은 여러 군데를 돌며 서로 쫓고 쫓기던 3명의 주인공이 마침내 다시 만나게 되는 공간이다.

도원이 작은 목마에 앉아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된 오후 촬영은 시간이 지날수록 버겁게 느껴진다. 무르익는 햇살에 모두가 녹아난다. 카메라와 조명을 세팅할 때마다 스탭과 배우들은 그늘 안에 파묻혀 숨을 몰아쉬고 물을 들이켠다. 이병헌의 촬영이 시작된 5시30분이 돼서야 햇살의 힘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는 건 오후 9시 정도지만 7시30분 정도만 돼도 태양광선이 다른 분위기를 내는 탓에 이제 촬영은 끝물인 셈이다. 스탭들은 촬영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자 활력을 되찾는다. 고된 하루 일이 끝나서이기도, 더위가 덜해져서기도 했겠지만 스탭들을 신나게 했던 것은 무엇보다 다음날이 휴일이라는 사실이었을 터. 중국에서 촬영을 시작한 7월 중순 이후 하루도 쉬지 못한 채 한달 가까이 줄창 일해야 했던 스탭들로서는 하루의 휴식이 그토록 절박했던 모양이다. 촬영을 마치며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외치는 스탭들의 목소리가 우렁차다.

2007년 8월12일, 둔황 외곽 판자촌 세트장
-‘좋은 놈’들, ‘나쁜 놈’들을 받아들이다

이틀 전만 해도 얼굴을 구기고 있었던 사진기자 S의 표정이 밝다. ‘사진 촬영 불가’라는 지침이 풀렸기 때문이다. 지난 방문 때 사진 장비를 들고만 다녀야 했던 S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카메라를 처음 잡아보는 아이처럼 연신 셔터를 눌러댄다. 하루의 휴식은 스탭들뿐 아니라 취재에도 활력을 준 셈이다. 이틀 전 오후부터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한 K 대표의 분노(?)는 휴식날을 맞아 완전히 풀렸다. 낮에는 둔황의 명승지인 막고굴과 다른 세트장을 오가며, 밤에는 소박한 술자리에서 이인조로 연신 아양을 떤 게 먹힌 모양이다(“어쩜 그리 안 늙으세요?” 또는 “어떤 화장품을 쓰기에 피부가 그렇게 좋아요?” 등등). 동행한 L감독, O대표, L대표 등의 지원사격과 혹시나 해서 가져온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00년> 미국판 DVD를 김지운 감독에게 ‘공물’로 바친 것도 도움이 된 듯하다. 이 기쁜 소식을 서울에 전하자 N편집장은 “어, 그래? 잘됐네”라고 무심하게 말한다. 이틀 전과 별 다르지 않은 반응이다. 상황이 이렇게 안 좋고 저렇게 나쁘다며 엄살을 부렸을 때도 N편집장은 “어, 그래? 잘되겠지”라고 덤덤하게 말했었다. 원 참, 박자 좀 맞춰주면 안 되나.

구름 한점없이 새파란 하늘이 무섭게 느껴지는데도 하루를 쉰 스탭들은 활기차게 움직였다. 오전 분량의 마지막은 이병헌이 말에서 내린 뒤 태구와 도원을 향해 서서히 걸어가는 장면이다. 연기를 준비하던 이병헌이 감독과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다. 김지운 감독은 “그럼 두 가지 버전으로 찍어보죠. 첫 번째는 태구를 바라보면서 가고, 두 번째는 자기(이병헌) 느낌대로 가보세요”라고 말한다. ‘감독 버전’ 연기가 끝난 뒤 ‘이병헌 버전’ 연기가 시작됐다. 첫 번째 테이크를 찍은 뒤 모니터를 보던 이병헌이 “한번 더 해봤으면 좋겠는데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뒤에 앉아 있던 송강호가 “뭘 한번 더 해? 완벽한데”라고 말하면서 푸하하 웃는다. 그의 말에 뙤약볕 아래로 다시 나가려던 이병헌과 긴 몸을 척 구부리고 있던 정우성이 씩 웃는다. 스트레스와 긴장이 가득한 현장에 여유로운 웃음을 불어넣는 것은 역시나 분위기 메이커 송강호의 몫이었다.

사막의 허기는 빨리 찾아온다. 오전 촬영이 끝나자 한국 스탭들은 한국에서 모셔온 주방장들이 차린 점심을 먹기 위해 거대한 ‘식당 천막’으로 향하고, 중국 스탭들은 중국식 식사가 차려진 다른 천막으로 걸음을 옮긴다. 한국 스탭과 배우만 100여명, 여기에 중국 스탭까지 더하면 전체 스탭 수가 300명에서 400명을 오간다고 하니 밥을 차리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식사를 마친 스탭들이 속속 세트장의 건물 내부나 그늘 아래서 축 늘어진다. 김지운 감독은 “점심식사 끝난 뒤는 가장 더울 때라 능률도 안 오르고 기운도 안 나서 1시간 반쯤 쉬게 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마라톤 코치마냥 스탭과 배우들의 페이스 조절에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오후 촬영은 늦어지고 있다. “지금 44도래.” 김지운 감독이 허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중국 노동법은 기온이 40°C를 넘으면 노동을 금지하도록 규정돼 있다는데 법문제가 아니더라도 촬영은 쉽지 않아 보인다. 스탭들에게 시원한 생수를 나눠주고 뜨뜻한 생수병을 아이스박스 안에 집어넣는 제작팀의 손길 또한 바빠지고 있다. 하루에 소비되는 생수도 1천병에 육박한다. 김정화 프로듀서는 “최고 기록은 하루 1700병이다. 이날 식사 뒤 마신 물까지 더하면 2천병은 족히 들었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가방 안에 꿍쳐둔 여분의 생수병이 생각나 갑자기 발이 저린다.

2007년 8월13일, 둔황 외곽 판자촌 세트장
-‘좋은 놈’들과 ‘이상한 놈’들의 호흡

아침 일찍부터 하늘이 잔뜩 흐리다. 1년 강수량이 33mm 남짓(한국은 1000mm 이상)하다는 이곳에서 비를 구경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갖다가 이모개 촬영감독의 날씨처럼 어두운 표정을 보니 자연 자중하게 된다. 그는 “평소의 광선이 너무 강해서 흐린 날에 찍은 분량과 맞추기는 쉽지 않다”며 한숨쉬듯 말한다. 7월 중순 자위관이라는 곳에서 기차 탈주 장면을 찍을 때도 사흘 내리 비를 맞이하는 ‘사건’을 겪었던 <놈놈놈> 팀으로서는 흐린 날씨가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다.

태구가 지닌 지도를 쫓는 또 다른 조직인 삼국파의 마을 진입신을 찍으면서도 연신 하늘을 바라보던 스탭들은 날씨가 개자 몸놀림이 빨라진다. 조선, 러시아, 중국인으로 구성된 삼국파는 부대장 병춘 역을 맡은 윤제문을 제외하곤 낯선 얼굴들이다. 이름만큼이나 다국적 배우들로 구성된 이들은 옷이나 헤어스타일도 제각각이라 영락없는 오합지졸의 인상을 준다. 삼국파가 탄 10여필의 말과 지프차, 오토바이가 동시에 빠른 속도로 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장면을 준비하는데 꽤나 위험해 보인다. 카메라 3대 중 1대는 말이 들어오는 길바닥에 나와 앉았고 이모개 촬영감독은 그 뒤에 서서 다른 카메라를 들고 찍으려는 태세다. 그는 “말이 안 위험해요. 사람을 피해가요”라면서 여유있는 웃음을 지었지만, 말들이 우당탕 지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아찔하다. 슛에 돌입하자 “쪼우(走), 쪼우” 하는 구호와 함께 말의 행렬이 속도감있게 카메라를 지나친다. 감독의 “컷”이라는 사인이 떨어지자 스탭들이 우르르 튀어나와 촬영팀의 안전을 확인한다. 다행히도 먼지를 뒤집어쓴 것 외에 별 이상은 없어 보인다. 모든 배우들이 말타는 것만큼은 웬만한 스턴트맨 이상의 기량을 갖게 됐다더니, 촬영팀 또한 스턴트맨만큼의 담력을 갖게 됐나보다.

마을로 들어오는 삼국파 중 한명이 창이가 쏜 총을 맞고 떨어지는 장면 또한 가슴을 졸이게 했다. 살아 있는 말과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이 장면이 제작진 마음대로 될 리는 없다. 옆에 있던 말과 부딪혀 스턴트맨이 바닥에 떨어지지 못하거나 이병헌이 쏘는 총이 격발되지 않는 등 통제되지 않는 변수들이 속출하자 김지운 감독은 난감한 모습이다. 하지만 “컷” 신호가 나자마자 말발굽에 밟힐세라 바닥에 떨어진 스턴트맨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는 동료 스턴트맨들의 모습은 이상한 감동을 준다. <놈놈놈>이 실감나는 액션을 담고 있다면 상당 부분은 이들의 몸사리지 않는 용기와 진득한 우정, 그리고 단단한 책임감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2007년 8월14일, 둔황 외곽 판자촌 세트장
-‘나쁜 놈’들, ‘좋은 놈’들과 이별을 고하다

둔황에 도착한 이래 최악의 날씨다. 전날 오후에는 대단한 황사바람이 불어 둔황시 전체를 감쌌다. 하긴 이곳은 황사의 발원지 중 하나다. 봄에 헌팅차 이곳을 방문했다는 한 스탭은 “황사 때문에 한치 앞이 안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거센 바람에 문짝과 기와가 날아다니더라”고 말한다. 황사는 잠잠해졌지만, 쿡 찌르면 빗방울을 쏟을 것 같은 하늘 때문에 제작진은 오전부터 촬영 진행 여부를 고민하고 있었다. 배우들이 맨얼굴과 평상복 차림으로 앉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결국 제작진은 건물 폭파 장면을 찍기로 결정내린다. 이 조선인 빈민촌에는 세 주인공과 삼국파뿐 아니라 일본군과 조선 독립군까지 시간차로 진입하게 된다. 이 카오스 같은 상황에서 태구, 창이, 도원 등은 마을 너머의 대평원으로 빠져나가 대추격전을 펼치게 된다. 이 빈민촌은 결국 대평원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약점이자 30년대 만주의 모순이 한데 모인 결절점이기도 하다. 이날 찍게 될 분량은 일본군의 포탄에 맞은 건물이 터져 사람이 날아가고 말이 벽으로 고꾸라지는 장면이다. 여기에선 말 더미(dummy, 모형)가 사용됐다. 특수효과의 달인들인 셀이 제작한 이 말 더미는 윤기나는 털과 반짝이는 눈은 물론이고 핏줄까지 실감나게 묘사됐다. 촬영이 시작되자 건물 폭파와 동시에 레일 위에 올라탄 말이 도르르 굴러가더니 벽에 콱 처박힌다. 감독의 오케이 사인 이후 엉망이 된 말을 끌고 나오는 셀 팀원들의 모습은 애완동물을 응급실로 싣고 가는 주인의 애처로움마저 담고 있다. 폭파되는 건물 안에 있던 사람이 폭발력에 날아가는 장면, 폭발 소리에 놀란 말이 흥분하고 거기서 떨어진 사람이 벽을 뚫고 떨어지는 장면 등을 찍던 도중 해가 다시 나오자 제작진은 기다림에 지쳐 숙소로 돌아간 이병헌을 다시 불러내 촬영을 재개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스탭들의 함성과 함께 촬영이 끝나자 K 대표가 슥 곁으로 오더니 “어땠어요?”라고 다정하게 묻는다. “에… 그게….” 마지막 날이라서였는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고개를 드니 저 멀리 사막의 지평선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다. 낮과 밤의 경계인 ‘매직 타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마술, 하긴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렇게 무리해서 <놈놈놈>의 현장을 찾은 것도 이 영화의 마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절망적이었던 순간도 마술처럼 잘 풀렸다. 그런데 정작 입에서 튀어나오는 건 엉뚱한 말이다. “고마워요. 회사에서 안 쫓겨나게 해줘서.” 둔황에서의 마지막 석양이 만들어낸 그림자들이 깔깔 웃고 있었다.

사족- 좋은, 나쁜, 이상한 결말

제작진은 최근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전했다. 우리가 취재한 이 현장이 편집과정에서 거의 날아갔다는 얘기였다. 이럴 수가. 태구와 창이, 그리고 도원이 서부극의 한 장면처럼 멋지게 대치하거나 스턴트맨들과 배우, 스탭들이 몸을 던져가며 보여준 폭파장면이나 질주장면을 영화에선 볼 수 없는 것이다. 좋고, 나쁘고, 이상한 기분 속에서 생각해보면 꼭 나빠할 일만도 아니다. DVD가 나오기 전까지 이 장면들은 오직 <씨네21>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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