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놈놈놈의 무한도전
2008-07-01
글 : 문석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2007년 12월12일~13일, 전북 정읍 귀시장 오픈세트

이런 곳에 세트장이 있다니. 논 사이에 난 작은 포장도로를 따라 몇 백미터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또 길을 잘못 찾는구나’ 싶었는데, 안쪽으로 쑥 들어가니 거짓말처럼 넓은 공터가 나온다. 2007년 12월12일 전북 정읍시 태인면 박산리의 3천평 남짓한 이 공터에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또 다른 주요 공간인 귀시장 오픈세트가 차려져 있다. 밖에서 볼 땐 휑한 골조만이 드높이 세워져 있는 이곳의 내부로 들어서니 완전히 별천지가 펼쳐진다.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을 마주하고 2층, 3층의 건물들이 빽빽하게 밀집돼 있고, 각 건물 안에는 온갖 물건들이 그득 들어차 있다. 서부극의 주무대처럼 큰길을 사이에 두고 단조로운 건물들이 죽 세워졌던 둔황 빈민촌 세트와는 영 다른 분위기다. 이곳은 기차에서 내린 태구(송강호)가 지도를 들고 숨어드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 지도를 쫓아 창이(이병헌)와 도원(정우성)이 나타나면서 이런저런 충돌 또한 불가피해진다.

144회차 촬영이 한창인 스탭들은 여전히 피로한 기색이었지만 결승점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한 덕분인지 그럭저럭 견디고 있는 듯했다. 12월치곤 따뜻한 영상의 기온이었지만, 스탭들이 옷가지로 온몸을 칭칭 감고 있기는 4개월 전과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털옷과 점퍼, 머플러와 털모자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게다가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설정 때문에 일부 스탭들은 비옷까지 걸치고 있다. 옷에 관한 한 승자는 단연 송강호다. 섭씨 40도의 기온을 두터운 겹옷으로 견뎌냈던 그는 이제 “인생이란 건 아무도 몰라”라면서 추위를 즐기고(?) 있다. 반면 가장 얇은 옷으로 여름을 났던 이병헌은 이 겨울이 빨리 지나가기를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2007년 12월12일 오전
-명사수 카우보이 도원의 액션은?

오전 촬영의 주인공은 정우성이다. 취재진이 처음 접한 장면은 도원이 창이의 패거리를 피해 건물 위에 매달린 줄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이다. 단순한 도르래 원리를 이용한 것이지만 줄을 당기는 스탭들의 정확한 타이밍이 중요하다. 크레인에 매달린 살수기에서 비가 주룩주룩 뿌려지는 가운데 촬영이 시작되자 줄이 당겨지고 정우성이 주욱 올라간다. 이때 한손으로 든 장총으로 펑, 한발을 발사하는 센스까지. 몸이 길어서 그런지 그의 동작은 다 시원하게 느껴진다. 정우성이 연기하는 도원은 동물이건 현상 수배범이건 돈 되는 건 뭐든 사냥하는 명사수다. 멋진 카우보이 차림의 그는 사냥꾼답게 장총을 애용한다. 둔황에서 정우성의 별명은 ‘중국 전문 배우’ 또는 ‘승마 특기 배우’였다. <무사> <중천>을 통해 오랫동안 중국 현장을 익혀왔고 말을 능숙하게 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한손으로 말고삐를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샷건을 돌려 장전하는 연기를 보였을 때는 여성 스탭은 물론이고 남성 스탭들의 마음까지 두근거리게 했다는 후문이다. 하긴 미세하기 떨리는 그의 까만 눈동자를 보고 빨려들어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도원’역의 정우성
‘태구’역의 송강호

2007년 12월12일 오후
-태구의 액션은 잔재미?

오후 촬영은 송강호의 독무대다. 하늘로 날아가버린 도원을 보면서 당황하는 태구의 모습을 찍어야 한다. 도원으로부터 총을 빼앗긴 태구는 결사적이다. 하긴 서부, 아니 <놈놈놈> 속 만주에서 총없이 돌아다닌다면 관을 등에 메고 다니는 꼴 아니겠나. 3대의 카메라가 비쳐지는 가운데 송강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야, 도원이! 어디 가!” 하자 스탭들은 쿡, 터져나오는 웃음을 틀어막느라 정신이 없다. 한때 객잔으로 쓰였던 건물 안에서 모니터로 송강호의 연기를 보던 김지운 감독도 푸핫, 해버린다. 하지만 연기는 연기일 뿐이라는 듯 감독의 오케이 사인을 받은 송강호는 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며 예의 진지한 태도로 말한다. “태구는 처절한 놈이다. 다른 놈들도 처절하기는 하지만 태구는 가장 처절하게 살아가는 인물이다. 태구의 액션은 도원이나 창이처럼 장르적 액션이라기보다 캐릭터에 묻어나는 재미있는 액션이 많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자 전통적 서부극과 차별되는 점도 다양한 캐릭터들의 잔재미가 있다는 점이다.” 아하 그렇군요, 하고 있는데 숙연해지는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송강호는 이내 “아, 감독님, 죽이지 않아요? 하하하하…” 하면서 모니터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2007년 12월12일 밤
-정교한 살인기계 창이의 액션은?

‘창이’역의 이병헌

밤 촬영의 영웅은 이병헌이다. 창이는 지하 아케이드를 연상시키는 반지하 공간에서 귀시장을 지키는 패거리의 여러 상대와 맞장을 뜨게 된다. “창이는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을 가진 태구와 달리 삶을 별로 생각하지 않는 놈”이라고 촬영을 준비하던 이병헌이 말한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걸 수 있는, 이기는 것이 사는 것보다 중요한 친구다.” 총과 칼을 모두 잘 쓰는 창이지만 주특기는 칼이다. 그는 단검으로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해치울 수 있는 “정교한 살인기계 같은 느낌”(정두홍 무술감독)의 소유자다. 하지만 그가 아끼는 단검이 다른 이의 허벅지에 박혀 있는 상태라 창이는 오늘 액션장면에서 손에 잡히는 것을 아무렇게나 들고 귀시장 패거리에 대항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상대의 얼굴을 석탄불이 타고 있는 화로에 짓이겨넣는 장면은 오늘의 하이라이트. “악역하는 건 굉장히 신선하다”고 말하는 이병헌은 “결국 모두가 나쁜 놈이다”라고 말한다. 재밌는 점은 송강호 또한 “나쁜 놈과 좋은 놈도 어찌보면 이상한 놈이다. 그래서 처음 대본을 볼 때 이상한 놈이 누군지 몰랐다”고 말했다는 사실. 하긴 세상에 절대적으로 좋은 놈과 나쁜 놈과 이상한 놈이 따로 있겠나.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촬영이 끝나가면서 김지운 감독의 긴장도 차츰 풀리는 분위기다. 취재진이 막 도착했을 때만 해도 요리조리 피해다녔던 그는 이제 우리쪽으로 슥 다가와 “보니까 어때?”라고 자상하게 묻기까지 한다. 게다가 현장편집기사와 함께 이 장면 저 장면을 이어붙여보면서 취재진에게 은근슬쩍 자랑도 한다. 심지어 이런 경우도. 밤이 깊어가면서 애초 당일치기 일정으로 현장을 찾은 취재진이 서울로 올라가려 하는 순간, 나지막한 목소리로 김지운 감독이 말한다. “왜 더 있지 그래? 내일 재밌는 장면이 있는데 보고 가지.” 호스트의 초대를 마다할 이유가 있겠나. 대부분의 취재진이 흔쾌히 동의하고 다시 눌러앉는다. 그런데 그가 하루 더 있으라고 한 건 정말 다음날 장면이 흥미로워서였을까, 아니면 외로워서였을까. 홀로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김지운 감독의 뒷모습이 유난히 쓸쓸해 보인다. 역시나 이 감독, 아니 이 남자, 정말 결혼을 하긴 해야 할 것 같다.

2007년 12월13일 오전
-곰, 태구를 날려버리다

12월13일 오전, 김지운 감독이 자신감을 보였던 바로 그 장면이 촬영 준비를 끝마치고 있다. 그 회심의 장면은 한 건물의 입구로 들어가려는 태구를 창이파의 3인자인 곰이 던져버리고, 태구의 몸뚱이가 붕 날아가 목조벽이 박살나는 신이다. 곰을 연기하는 마동석은 전날 밤 맥주집에서 송강호가 주관한 술자리에서 만난 터다. 전날에는 기자떼가 낯설어서였는지 조용히 맥주잔만 비웠던 그는 이제 무시무시한 괴수로 변신해 있었다. 산만한 덩치와 해괴한 옷과 헤어스타일의 부조화가 그의 야수성을 더욱 북돋운다. 촬영이 시작돼 마동석이 송강호를 던지자 목조벽이 우당탕 먼지를 내며 부서진다. 이 장면은 와이어 액션을 이용해 촬영됐다. 송강호를 집어던지는 장면과 와이어를 단 스턴트맨을 뒤에서 확 잡아당겨 벽이 부서지는 장면을 따로 찍어 이어붙이는 영화의 마술을 이용한 것.

우와 신기하다, 역시 비장의 장면이군, 하는 표정으로 김지운 감독을 봤더니 그는 감동없는 표정으로 조감독과 무술감독에게 “더 빠르게, 더 높게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강하게’(Citius, Altius, Fortius)라는 근대올림픽의 표어를 연상케 하는 그의 주문을 듣고나니 <놈놈놈>과 올림픽 정신의 관계가 꽤 깊지 않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자신의 한계에 도전함으로써 인간을 완성시켜간다는 올림픽의 이상이나 감독, 배우, 스탭들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하고 있는 이 현장이나 매 한가지 아닌가.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글오글 모여 즐거운 수다를 떠는 스탭들만큼은 메달색으로 평가받는 현실의 올림픽과 달리 자신들이 벌인 무한도전을 그 자체로 흡족하게 여기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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