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가) 길죠, 뭐.”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하 <눈눈 이이>)의 캐릭터 백성찬 반장을 어떻게 만들어갔느냐고 물었더니 저런 답이 돌아왔다. 새로운 캐릭터의 연구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을 새삼스러워하는 듯, 나른하게 말하고서 한석규는 덧붙였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그거다. 백 반장은, 담배를 끊으려고 하고 있는 인물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힘들게 담배를 겨우 끊으려고 하는데 이놈의 사건 때문에 못 끊게 됐다. 그러니까 아주 짜증나는 거지.” 캐릭터에 관한 대전제를 밝히고서 그는 디테일에 관해 말을 이었다. <눈눈 이이>의 백 반장은 평소 사람들에게 깍듯하게 굴다가, 꼭지가 돌면 뵈는 거 없이 사납고 히스테릭해지는 극단적인 독종형이다. “상대방에게 극존칭을 쓴다는 건 존경의 의미도 있지만, 반대로 전혀 존경하지 않는 상대에게 벽을 쌓는 방법이기도 하다. 백 반장은 후자쪽이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흠을 보이면 아주 더럽게 변하는 거지. 반백 새치머리는 몇년 전부터 한번 해보고 싶었던 거다. 캐릭터를 만들 때 배우들이 제일 먼저 고민하는 게 헤어스타일이다. 사람의 인상을 반 이상 좌지우지하는 게 그거니까. 적절한 인물을 만나면 그런 머리를 해보고 싶었다.”
나름 구해보았다는 검은 선글라스 착장과 영화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개인적인 배경까지, 백성찬이란 인물 하나가 불러일으키는 호기심은 <눈눈 이이>에서 비중이 꽤 크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답해주는 한석규의 태도에서는 새삼스러움이 떠나지 않는다. 그는 <닥터봉>(1995> 이후로는 영화 미완성본을 보지 않고, <초록물고기>(1997) 이후로는 편집실을 가지 않는다. <그때 그사람들>(2005) 이후로는 캐릭터와 영화에 관해 감독과 그리 잦은 대화를 나누지 않고 “제가 알아서 잘해보겠습니다”라는 말로 거의 모든 준비를 혼자서 한다. 새 작품 촬영을 시작하면 5회차 안에 그 인물에게 편안함을 느껴야 한다고 원칙을 세우고 있다. 15년여의 프로 연기 생활에서 얻어진 그의 몇 가지 내규들은 마치 누군가의 아침 조깅 습관처럼 일상적으로 들린다. 그는 백 반장을 표현하는 연기적 디테일 중에 “새로운 건 별로 없었다”고 건조하게 부연했고, 작품과 캐릭터를 향해 현장에서 솟구쳤을 자신만의 감흥을 좀처럼 묘사해주지 않았다. 한석규는 자신이 만약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어도 그걸 아주 잘했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월급 때문에 별수없이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었을 것 같다.”
섬뜩할 정도로 광적인 히스테리를 보인다는 점에서 <눈눈 이이>의 백 반장은 한석규의 최근작 <구타유발자들>(2006)의 경찰 문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말을 건네자 한석규는 곧 “정말 비슷한 톤의 인물들이지 싶다…. 찔린다. 또 반복해서 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낮게 말했다. “하여튼 내가 연기를 왜 하냐…. 사람이 갖고 있는 모든 걸 보여주고 싶어서. 인간의 모든 본성을 평생 많이 해보고 싶다. 악한 것, 비겁한 것. 영화적으로 멋있게 비겁한 게 아니라 정말 비겁한. 나는 아직까지 선한 이미지의 연기를 많이 한 것 같아서. 이상해… 그게 아닌 것도 같은데….” 아닌 게 맞을 것이다. 대중에게 너무도 강력하게 한석규는 ‘선하고 정적인 젠틀맨’의 이미지로 박혀 있지만 그의 16편짜리 필모그래피는 <접속>과 <8월의 크리스마스> <텔미썸딩> <쉬리>류를 벗어난 궤적들로 뚜렷하다. 배우 자신에게 혼란을 줄 만큼 대중과 미디어의 선택적 기억력의 힘은 무섭다.
열살짜리 맏딸에서 세살짜리 막내아들까지 2남2녀를 둔 한석규는 네 아이들이 투닥거릴 때마다 운명론을 들먹여 분쟁을 잠재운다고 한다. “첫째는 책임의 운명. 둘째는 양보의 운명. 셋째는 배려의 운명. 근데 뭐 여섯살짜리가 배려라는 말을 알아듣겠어? (웃음) 막내는 귀여움의 운명. 둘째가 제일 낑낑대지. (아이 목소리를 내며) 나는 왜 양보의 운명이야!! (웃음) 아주 웃긴 대사야, 그거….” 표지 촬영중 막간에 한석규는 간식을 집어먹으며 한 스탭과 모 남성패션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누구나 알 법한 그 잡지 이름을 생소하게 여기며 그는 “인터뷰를 하다 보면 잃는 게 더 많고…, 치르지 않아도 될 일까지 겪게 되어서 점점 더 불편하다”는 말을 했다. 이날 한석규와 만나기까지도 그래서 두어번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의지로 멈추지 못할 만큼 생각이 많은 배우 한석규는 아주 오랫동안 낚시를 취미로 삼아왔다. 이변이 없는 한 일주일에 사흘, 목요일에서 토요일까지 그는 매주 낚시를 떠난다. 댐낚시를 즐기며, 토종 붕어를 35cm짜리까지 잡아봤다고 한다. <씨네21>과의 일정이 모두 끝난 뒤, 모 TV프로그램의 리포터와 카메라맨이 이들을 찾아왔다. 어렵게 모인 두 주연배우는 나란히 전국의 시청자를 향해 인사했다. 한석규는 ‘왕비호’ 윤형빈 옆에 앉아 그가 들고 있는 퀴즈 글판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