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주목받는 사람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타인의 시선을 감내해야만 하는 사람들 말이다. 주목의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차승원의 경우 시작은 찬란한 외모였다. 188cm의 훤칠한 키에 깊은 눈매와 날렵한 몸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 영화 제작자들은 단번에 대중의 시선을 잡아끌 이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가 런웨이에 머물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모델 차승원은 10년간 몸담았던 무대에서 내려와 1997년, <홀리데이 인 서울>로 스크린 신고식을 치르며 배우 차승원이 되었다. 당시 배우 차승원이 가장 두려워했던 건 스크린에 모델 차승원의 잔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이슈가 될 만한 남자들을 끌어다가 잘못된 용도로 쓰는”(<씨네21> 393호) 영화산업의 본질을 진작에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안 어울리는 말투를 멋있게 하려다가” 흔적없이 사라진 모델 출신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라의 달밤>이나 <광복절특사> 등의 코미디영화로 필모그래피를 채워온 건 어쩌면 그의 배우 인생에 독이 될 수도 있을, 외모에 집중되는 대중의 관심을 분산시키려는 하나의 전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작정하고 멋있게 등장하는’ 이번 영화가 수상한 이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서 악역 안현민의 모습은 영락없는 모델 차승원이다. 정돈된 콧수염, 메이크업이 의심되는 스모키한 눈매, 살갗처럼 보디라인을 타고 흐르는 검은 슈트 차림의 차승원이 무방비로 스크린에 노출되는 것이다. “(출연작) 편수가 늘어나면서 생각도 많이 변하는 것 같다. 배우라면 누구나 미장센이 돋보이는 영화에 대한 욕심이 있을 텐데, 배우 초창기에 그런 역할 맡았으면 분명 어색하고 딱딱해 보였을 거다. 그런데 이제는 (외적으로 멋진 역할을) 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던 2년 전, 그는 큰 고민없이 출연을 결정했다. 10년이란 세월 동안 끊임없는 검증을 거치며 단련된 연기력이 그에겐 든든한 담보가 되어준 듯했다. 한편 차승원은 이번 작품을 거치며 영화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겪기도 했다. “예전에는 시나리오를 선택할 때 이야기만 좋으면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게 아킬레스건이 된 거지. 그런데 요즘엔 꼭 영화가 서사로 승부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고, 재미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봤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닌데, 그냥 서서히 그렇게 변해가더라.”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화면과 배우의 스타일이 돋보이는 영화야말로 감독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필수다. 그런데 차승원은 공동작업이 처음인, 게다가 본인의 표현대로 원체 “찐득찐득한” 영화를 만들어왔던 곽경택 감독과 만나게 됐다. “워낙 감독님 특유의 스타일이 강하시니 나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었다. 그런데 그분도 나름대로 예전 영화들과 다른 쪽으로 시도를 하시는 것 같고, ‘시원하고 쿨하게’란 컨셉이 내 생각과 맞아떨어졌다. 내 촬영 분량의 85%를 곽 감독님이 맡으셨는데(나머지는 안권태 감독이 연출), 별 어려움없이 편하게 잘 찍었다.” 편하게 찍었다는 말은 선수끼리 뭉쳤다는 말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투톱 영화일수록 영화의 전체적인 균형이 중요하다. 어느 한 부분에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일관성있게 연기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이번엔 애드리브도 거의 안 했다. 좀 다르게 해보면 어떨까 싶은 장면들이 꽤 있었지만, 결국엔 그냥 가는 게 맞더라.” 상대배우 한석규에 대한 평가를 아끼는 것도 이러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제는 연기에 대한 고민을 넘어 영화 전체를 생각한다”는 그는 영화를 대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하다. “이제까지 1년에 한편 이상 꾸준히 영화에 출연해왔다. 생각해보니 특별히 하고 싶지 않더라도 필요에 의해 출연한 작품도 있더라. 이제는 본전 생각이 난다. 똑같이 에너지를 소비하는 건데 내가 좋아하는 작품, 흥미를 느끼는 작품에 에너지를 쓰는 게 생산적이지 않을까.” 알랭 들롱이 출연하는 프랑스 누아르와 <플래닛 테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그의 관심사는 전방위다. 어쩐지 전에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던 차승원의 다음 작품을 이제부턴 알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