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님은 먼곳에> 남성 지식인 이준익이 빠진 함정
2008-07-29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순이의 집착은 숭고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이 영화는 장점과 단점이 명확하다. 이중 어디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릴 것이다. 장점은 첫째, 베트남 참전에 대한 당시 한국사회의 콘텍스트를 보여준다. 둘째, 한국대중음악사의 중요 지점인 베트남 위문공연단에 대한 풍속사적 고찰이 담겨 있다. 반면 치명적인 약점은 주인공의 심리가 불가해하여 서사의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베트남 참전의 콘텍스트를 보여주다. 베트남전은 8년간 한국군 32만명이 참전하고 5천명이 전사한 사건이지만 이에 대한 성찰적 텍스트가 부족하다. <하얀전쟁>(1992)과 뮤지컬 <블루 사이공>이 꼽히지만, 이들 역시 참전자를 냉전체제와 독재정권, 분단과 고엽제의 피해자로 그리는 데 그친다. <알포인트>에 이르러서야 한국군 역시 가해자였음을 인식하는데, <님은 먼곳에>는 <알포인트>의 그들이 어떻게 해서 혼돈의 늪으로 걸어들어왔는지, 그 후방의 맥락을 보여준다. 그들은 낭만주의와 반공주의에 이끌려,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과 ‘돈을 벌겠다’는 실리에 의해 대대적인 환송을 받으며 그곳에 왔다. 또 영화는 주인공 일행을 베트콩의 땅굴에 집어넣음으로써 잠시나마 베트콩과 같은 눈높이에서 전쟁을 바라보게 한다. <황산벌>이 그러했듯, 영화는 전쟁을 끔찍하고 명분없는 짓으로 그린다.

베트남 위문공연단을 풍속학적으로 고찰하다. 감독은 연희(패)를 좋아한다.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 모두 연희(패)에 대한 영화이고, <황산벌>에서도 인간 장기와 욕 대결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님은 먼곳에> 역시 연희(패)에 대한 영화로 볼 수 있다. 영화음악으로 김추자 곡들을 비롯한 당시 노래들이 그대로 쓰이고, ‘미8군 쇼’ 오픈밴드와 베트남 위문공연단의 공연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담겨 있다. 영화의 중반은 여주인공의 심리가 아니라 밴드의 궤적을 그리는데, 이 부분이 훨씬 영화적 재미와 설득력을 지닌다. 영화는 다시 그녀의 의지를 좇으며, 급기야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치달으면서 급속히 ‘구려진다.’ 차라리 밴드를 영화의 중심에 두고, 결말도 가수로서의 재능을 발견한 그녀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뻗어가는 것으로 그렸더라면 훨씬 싱그러웠을 것이다.

순이는 왜 남편에게 집착하는가? 그녀가 찾으려는 게 ‘남편의 아내’ 자리라면 그녀는 지리적으로 남편에게 가까워질수록 가부장제적으로는 멀어진다. ‘딴따라’가 되고, 심지어 미군 장교에게 정조를 바침으로써 그녀는 ‘아내’로부터 점점 이탈한다. 그녀가 찾으려는 게 애초 없던 ‘남편의 사랑’, 즉 “니는 사랑이 뭔지 아나?”에 대한 존재론적 응수라면 이 역시 불가하다. 남편은 전쟁터에 ‘써니’가 되어 홀연히 나타난 그녀를 무서워할지언정 사랑할 수는 없다. 이건 멜로가 아니다(만약 그녀가 도중에 죽었다면 후일 남편에 의해 추도되며 <파이란>식 멜로가 가능하다). 그녀에게 남편은 가부장제의 준거점도, 사랑의 정박지도 아니다. 남편은 불가능한 목표점으로만 의미가 있다. 즉 ‘먼곳의 님’으로, <남극일기>의 ‘도달불능점’에 해당한다. 그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의 타개책으로 베트남행을 결행한 것은 대단한 모험이다. 그녀는 여전히 가부장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추동하기 위한 상징으로 ‘님(남편)’이 필요했다. 따라서 ‘남편’은 자신도 잘 의식하지 못했던 ‘딴따라적 욕망’이 불러들인 ‘이데올로기적 외피(초자아)’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녀는 점차 존재가 변한다. 그녀는 ‘곧 옷 벗고 춤출 수 있을’ 만큼 변했지만, 최초의 화두 ‘남편’을 놓지 않는다. 왜? 이는 감독의 의지이다. 그녀가 끝내 남편을 찾는 건 가부장적 정절이나 사랑의 힘이 아니라 오기/결기인데, 여기에 존재 전체를 거는 행위를 감독은 숭고한 윤리로 여기며, 남성에게선 불가능하지만 여성에게선 가능한 미덕으로 파악하는 모양이다. 여기에 <오래된 정원>에서도 보았던, 반성하는 듯한 남성 지식인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 있다. ‘호랑이는 가죽 땜시 죽고, 사람은 이름 땜시 죽는다’는 삶의 윤리를 터득한 이라면, 존재의 변형을 가로막고 죽음을 불러오는 오기 역시 어리석은 집착임을 알 것이다. 그녀는 뺨을 후려치고 결국 자기 길을 갈 것이다. 하지만 찌질한 남자는 무시하면 그뿐인데, 끝까지 찾아와 ‘맴매’를 해달라니, 여성을 정말 엄마로 보고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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