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작품에 관해 말할 때 이준익은 남의 작품을 말하듯 감동도 잘하지만 꼼꼼한 분석도 피하지 않는다. 그는 진지하고 열광적이다. 물론 너무 광의적으로 논점을 가져갈 때는 조금 아슬아슬하지만, 자기의 생각을 늘 흥미롭게 듣게 만드는 데 재주가 있다. 어쩌다 벌어지는 시시비비도 호쾌하게 또 다른 화두의 단초로 삼는다. <님은 먼곳에>는 그동안 이준익의 영화에서 여성이 묘사된 방식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 영화라고 그는 이미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어쩌면 그의 말하기는 꼬리를 물고 자신의 생각과 열광을 이어나가는 방식에서 그가 만드는 영화와 닮아 있다. <님은 먼곳에>를 설명하는 그의 말 속에는 때때로 논리적 비약과 쟁점이 있지만, 적어도 이 자리가 그의 진심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준익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첫 번째 여성주인공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인지, 이 영화의 여성성에 관해 특히 더 주의 깊게 의견을 피력했고, 거기에 작은 의심이라도 보일라치면 이 영화를 기존의 남성적 역사관에서 벗어나 여성적 역사관으로 보아달라고 더 깊은 열변을 토했다.
-이 영화의 시작은 최석환 작가가 인터넷에서 발견한 한장의 사진이라고 했다.
=60년대 말, 70년대 초, 베트남에 파병된 병사들을 위해 현미, 김세레나, 패티김, 그리고 무명의 여러 가수들이 전쟁터의 병사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했고, 남아 있는 사진들이 무척 많다. 그중에서 익명의 여가수가 수백명의 병사들 사이에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공연하는 사진이다. 거기서 나는 아름다운 여성성의 숭고함을 보았다. 그전부터 최 작가와 베트남전 영화를 하자고 말은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 지점들을 영화화하려고 대강 10개 정도를 생각해둔 게 있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 현대사를 정리해내지 못한 반성없는 20세기를 영화로 풀어내자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영화 총정리랄까.
-한장의 사진이 마음에 든 것과 그 사진에서 얻은 인상을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확실히 차이가 있고,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그만한 다른 구체적 요소들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최석환 작가와 조철현 대표가 현미씨, 김세레나씨, 당시 밴드 마스터들을 인터뷰했고, 영화 속 일화들로 많이 넣었다. 물론 가공도 많이 했다. 영화가 구라 아닌가. 어떤 감독은 영화란 큰 거짓말을 먼저 해놓고 그 다음 말이 되게 메우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맨 마지막에 순이(수애)가 전쟁터 끝까지 가서 상길(엄태웅)에게 싸대기를 날린다는 큰 거짓말을 일단 해놓고 거꾸로 계단을 쌓듯이 작은 공갈들로 메우는 것이다.
-어떤 공갈들을 쳤나.
=예컨대 순이와 정만(정진영) 일행이 베트콩에 잡혀 땅굴 속에 들어가서 생활하게 된 거. 그게 말이 되나, 안 되지. 하지만 중요한 건 왜 이런 공갈을 치는지, 이 공갈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하는 것이다. 공갈의 용도는 그거겠지. 재미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쓰이는 도구다. 재미만 전달하려면 개콘 해야지. 아니 개콘도 다 의미가 있는데. 영화가 의미를 추구하지 않으면 돈 낭비다. 나는 인물의 내면의 진정성을 도드라지게 보여주려고 애쓴다. 그리고 나는 신 바이 신에서 신이 드라마가 아니고 바이가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신이 텍스트라면 바이는 컨텍스트다. 중요한 건 바이에 있는 거다.
-<님은 먼곳에>서 그 ‘바이’(컨텍스트)란 어떻게 표현됐다고 말할 수 있나.
=비약된 점프로. 실은 이 영화에는 생략된 사건이 굉장히 많다. 압축파일이 신마다 관객에게 계속 다운로드되는데 성능이 조금만 떨어지면 이게 잘 안 풀릴 수도 있다. (웃음) 영화를 한 세번 보면 보일 것이다. <왕의 남자>가 그렇지 않았나. 여러 번 봐야 장생, 공길, 연산, 녹수, 초선까지 보인다. 소실점을 계속 바꿔가면서 봐야 한다. 할리우드에서는 이런 걸 구조주의 시나리오라 부른다더라. 나도 옛날에 <씨네21> 읽고 알았다. 이런 건 캐릭터 시나리오가 아닌 거다. 감독은 오직 구조만 사고하면 된다. 그리고 나는 <황산벌>부터 <님은 먼곳에>까지 다 그렇게 해왔다.
-그러면 <님은 먼곳에>의 구조화 과정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남자들의 전쟁, 수컷의 전쟁은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암컷의 본능은 편을 가르지 않는다. 20세기에 수많은 전쟁을 일으킨 남성의 이성을 믿을 수 없다. 르네 마그리트는 “이성의 끝에 와보니 전쟁이더라”라고 하지 않았나. 한편, 베트남전쟁을 그린 대중영화는 전부 할리우드영화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각은 다 할리우드적이라는 얘기다. 베트남전쟁을 미국식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베트남전쟁을 우리의 시각으로 반성해보자는 의미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모든 장면들이 그에 대한 구조적 은유로 점철되어 있다.
-대의적인 이야기인 것 같은데, 조금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할리우드 전쟁영화의 모든 여자들은 전쟁터에 나간 남자를 기다리는 역할 아닌가. 하지만 <님은 먼곳에>는 그 전쟁터에 여자를 보내는 영화다. 그럼 여자를 거기 보내는 목적이 있을 것 아닌가. 내가 멜로드라마 찍으려고 순이를 거기 보냈겠나. 물론 상업영화 관객을 위한 두 가지 장르적 접근은 있다. 하나는 멜로드라마적 소구력, 또 하나는 전쟁 스펙터클이다. 그런데 <님은 먼곳에>는 전쟁영화라고 말하기에는 전쟁 자체를 다루고 있지 않고 멜로드라마라고 하기에는 사랑 자체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전쟁이든 사랑이든 어떤 다른 것을 위해 쓰여진 것인데, 그건 역사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그걸 위해 전쟁과 멜로를 공갈로 써먹은 거다. 순이와 시어머니의 가족사가 70년대에 돈을 좇는 정만을 만나는 순간 사회사가 되고, 국가가 베트남으로 보내는 군인들과 함께 순이와 정만이 함께 갈 때 국가사가 되고, 베트남에 그들이 도착하면 세계사 안에 있는 거다.
-“드라마의 사이즈가 예산의 크기를 결정하는데 <님은 먼곳에>는 딱 70억원짜리다”라고 언젠가 말했다. 영화의 사이즈라고 말하지 않고 드라마의 사이즈라고 칭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전쟁, 전쟁에 동원되는 물량과 해외 로케에 들어가는 경비, 시대물이 갖고 있는 프로덕션 비용 등으로 70억원이 필요했다. 시대물이 아니고 전쟁이 아니라면 30억이었으면 됐을 거다. 똑같은 소재라도 전쟁, 시대물, 해외 로케였기 때문이다. <왕의 남자>는 사극이지만 전쟁이 없기 때문에 43억원에 찍었다. <황산벌>은 전쟁이 있지만 한 장소에 몰았기 때문에 34억원. <라디오 스타>처럼 두명이 주인공인 영화는 28억원이면 딱 맞는 영화다. 그 영화를 40억~50억원에 찍었다면 낭비한 거다. <즐거운 인생>은 27억원이면 충분한 거고. <님은 먼곳에>는 내 입장에서 70억원을 써야 했다.
-상길 부분에서 눈에 띄었던 건 공들여 찍은 참호에서의 전투신이다. 이준익 영화에서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전투 재현 장면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이 장면을 빼고도 아마 영화가 전하려던 정서는 유지되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공들여 찍은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상길의 아픔에 대해서 관객이 공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에서 순이 한 사람의 아픔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님은 먼곳에>는 다초점 드라마다. 이 영화는 상길의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부남이 바람피우다가 군에서 사고치고 베트남 간 거 아닌가. 이놈은 어쨌거나 반성을 해야 했다. 전쟁터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걸 보여주는 것이 순이에게 나중에 싸대기를 맞을 때 반성의 기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나리오와 완성본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알고 있다(스포일러를 피하실 분은 다음 답변을 건너뛰십시오).
=가장 큰 차이는 시나리오에 에필로그로 들어 있던 두신을 촬영하지 않고 지금처럼 영화를 끝낸 것이다. 그 에필로그는 사실 처음부터 안 찍을 생각이었다. 그래도 투자자들이 보면 무언가 그럴듯한 결말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시나리오에만 넣었던 거고 영화 마지막 장면은 순이가 상길의 싸대기를 올리는 걸로 끝냈다. 그 마지막 장면에서 순이가 때릴 때 상길이가 무릎 꿇고 반성하지 않나, 순이는 용서한 거다. 용서받자 상길은 구원받는 거다. 20세기 남자들의 끊임없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종점에 가서 순이가 반성의 기회를 준 거다. 그런데 그때 정만이 보고 있는 거다. 그걸 봤으니까 그도 실은 구원을 생각한 거고. 영화에는 없지만 시나리오상에서 정만은 제니(정만이 서울에 버리고 온 애인. 임신 중이었다)에게 돌아가고, 순이와 상길도 한국으로 돌아와 있다. 시나리오에 있던 에필로그 내용은 상길과 순이의 두신이다. 상길은 이태원에 있는 제니에게 돌아가고 아이 돌잔치를 한다. 돌상에 달러, 실, 드럼 스틱이 있고, 정만은 아이에게 달러를 잡게 하는데 아이는 결국 드럼 스틱을 잡는다. 순이의 에필로그는 영화 첫 장면에서 노래 부르던 첫신과 비슷한 상황이다. 순이가 노래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시어머니가 온다. 하지만 순이의 표정이 첫 장면과는 다르게 당당하다. 상길은 제대하고 서울에서 고시 공부하고 있다. 시어머니가 상길에게 안 갈 거냐고 하니까 순이가 간다고 하면서 아이를 시어머니에게 당당하게 맡긴다. 아들도 아니고 딸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 장면들을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게 왠지 어영부영 봉합하는 것 같아서 뺀 거다. 재미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의 가치의 문제를 선택한 것이다. 이런 에필로그를 넣으면 다시 개인사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나. 이 영화를 개인사가 아니라 인류사에서 멈추고 싶었다.
-<즐거운 인생> 직후 인터뷰에서 이미 <님은 먼곳에>를 “남자들의 오만한 자만심에 싸대기를 날리는 여자들의 존엄성에 대한 페미니즘영화”라고 말한 걸 보면 이 장면이 즉흥적으로 선택된 것은 아니다.
=당연하다. 나는 머릿속으로 한번 다 본 다음 이 영화를 찍었다. 현장에서도 시간 많이 끌지 않았다. 예를 들면, 수애가 <간다고 하지 마오>를 부르는 장면은 오전에 1절 찍고, 오후에 1절 찍고, 이런 식으로 빠르게 진행했다. 테이크도 적게 갔다. 심지어 편집은 8시간 만에 다 끝냈다.
-순이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순이가 얼마나 도발적이냐 하면 제삿상 앞에서 시어머니에게 “상길씨 애인 있다 아닙니까” 하고 말하지 않나. 기막히게 봉건적인 어머니의 경우는 첩자식이라도 들여서 아들을 낳겠다고 하지 않나. 그 시어머니 입장도 그 당시 관습적으로는 당연하다. 하지만 순이가 친정으로 돌아가니 친정아버지는 “그 집 귀신 돼라”고 하지 않나. 순이가 이때 시댁에 안 돌아가는 것으로 결정을 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70년대에 집에 안 가면 어딜 가겠나. 서울 가는 거다. 당시에 서울 오면 80%는 공장 가고, 나머지는 식모 되고, 나머지는 창녀가 되는 거다. 순이는 아버지 말대로 그 집 귀신이 되기 위해 시댁에 다시 간 거다. 끝내 순이는 시어머니 대신 베트남까지 가지 않나. 베트남에 가는 건 순이의 과감한 선택이다. 시어머니 대신 자기가 간다는. 그리고 상길이가 순이를 만났을 때 상길의 연기를 자세히 보라. 순이가 가까이 다가가니, 상길이 잠깐 헷갈려 한다. 순이인지, 어머니인지.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어미의 본능인 모성애를 강조한 영화라는 거다. 여성으로서의 욕망은 다음 영화에서 하려고 미뤄놓았다. 이 영화는 모성성의 얘기를 한 거라고도 볼 수 있다. 상길이 싸대기를 맞는 건 모성에 대한 승복일 수도 있고.
-순이는 남편을 찾으러 갔는데 상길에 대한 감정은 잘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의도적이다. 순이는 내게 이상형과 같은 여자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이 여자는 정만이 사기꾼인 걸 알면서도 약속한 걸 지키려고 한다. 순이는 베트남에 도착해서 바로 정만을 버리고 호이안으로 혼자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이 밴드를 배신하는 것 아닌가. 어쨌든 자기의 청을 들어준 사람이 정만이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무대에 나갔던 거다. 순이는 이런 약속을 지켜가면서 결국에는 억압된 여성성을 버릴 수 있고,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거다.
-<님은 먼곳에>가 완전한 여성성을 갖춰가는 이야기라는 뜻으로 들린다.
=그렇다. 떠난 자가 다시 돌아올 때는 원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오디세이의 서사가 바로 그런 것 아닌가. 순이는 이 영화에서 단 한 사람, 남편에게만 비겁했다. “니 내 사랑 하나? 니 사랑이 뭔지 아나?”라고 베트남 가기 전 남편인 상길이 순이에게 묻는 장면이 있지 않나. 그때 남편이 바람피우는 걸 뻔히 아는데 순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나. 그때 수애에게 아무 대답 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화를 내라고 말해줬다. 증오의 눈으로 본다. 눈빛이 다르다. 사실 순이는 그때 얘기했어야 하는 거다. 나는 당신 사랑 안 해. 당신에게는 애인 있잖아, 라고. 하지만 아들을 가져야 한다는 관습 때문에 그러지 못한 거다. 하지만 그 뒤에 시어머니도 등을 돌리고 완전히 고립된 거다. 그래서 자기 의지로 시어머니 대신 베트남에 가는 거다. 순이는 거기서부터 거짓말을 안 한다. 춤 못 추면 못 간다는 걸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순이는 그 뒤로 베트남군, 미군 등 한번도 에둘러 피해간 적이 없다. 당당하게 모든 걸 뚫고 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도착해서, 남편 앞에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다. 비겁한 남성성의 반성을 촉구하는 거다. 어떤 사람들은 남편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도대체 거길 왜 가냐고 하는데, 내 대답은 사랑 안 하니까 간다는 거다. 이 영화의 남자들은 순이를 한번도 성적 도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순이의 선택이다. 하다못해 미군 중령과의 관계도 그렇다.
-보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이 영화를 히스토리가 아니라 허스토리로 봐주었으면 좋겠다. 순이가 상길이 있는 호이안에 데려다 달라고 하니까 미군 장교가 안 된다고 하지 않나. 밴드 멤버인 용득(정경호)도 순이에게 안 된다면서 문을 열고 나가는데 순이가 용득이를 밀어버리고 돌아서서 미군 장교 방에 남는다. 순이를 위안부로 보면 안 된다. 위문가수다. 전쟁에서 여자를 도구로 보는 남성주의적 시각이 있기 때문에 도리어 그렇게 보는 거다. 나는 정확하게 그걸 구분했다고 생각한다. 미군 장교가 교묘하게 순이를 탐하는 거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보는 건 히스토리다. 허스토리로 보면 한국군은 이미 철수했고 순이 남편 상길은 실종됐다고 미군 장교가 단지 팩트를 얘기했던 것뿐이다. 오히려 순이가 나는 한국으로 못 돌아가, 라고 한 거 아닌가. 나는 여성의 성적 도구화라는 클리셰를 역전시킨 것인데 그걸 못 읽어내고 되레 지적하는 사람들이 좀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다음 영화는 여성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7번 국도에 사무치다>라는 영화다. 유라시아 대륙의 땅 끝을 무대로 한 저예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