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님은 먼곳에> 이준익 감독 최선의 페어플레이
2008-07-29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순이의 내면을 알 수 없게 만들어 단순한 여성성의 함정에서 벗어나다

<황산벌> 이후 이준익이 지금까지 만들어온 영화들은 모두 겸손하고 정직하다. 적어도 그는 자신이 분명히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을 만든다. 그의 영화들이 지금까지 계속 남성 중심적이었던 것도 사실은 그런 정직함의 반영이다. 그는 자신이 여성주인공을 내세워 영화를 만들 만큼 여자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가 수애를 주인공으로 여성주인공 영화인 <님은 먼곳에>를 만들었다. 어떻게 된 걸까. 그동안 여자들에 대해 연구를 좀 한 걸까? 아니면 여성 캐릭터에 몰입할 만한 자신감이 그냥 생긴 걸까? 아니면 여성성이나 여자들에 대해 할 말이 생긴 걸까?

이준익 영화 최초로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다 그중 가장 정확한 답은 맨 마지막 것인 듯하다. 최근 그가 한 인터뷰를 보면 그는 여성상, 여성성, 페미니티로 변주되는 비슷비슷한 단어들을 끝도 없이 남발한다. 그에게는 여성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숙제와 같다.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면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반쪽짜리로 남기 때문이다. 그가 만든 몇 안 되는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보라. 그들은 대부분 남자들에 대한 코멘터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

<님은 먼곳에>를 자세히 보면 이 역시 이준익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들의 영화라는 걸 알 수 있다. 적어도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남자들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며, 여자들을 버리고 달아나는 남자들의 이야기며, 남자 딴따라들과 관객의 이야기다. 주제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를 통해 이준익은 남자들이 여자들 앞에서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길 바란다.

그럼 이 남자 세계에서 유일하게 의미있는 여성 캐릭터 순이는 뭐하고 있는가? 테마와 기능성을 따지면 순이는 바그너 오페라의 여자주인공과 비슷하다. 순이는 남자들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하다가 그들의 모든 죄들을 용서한다. 미치겠는가? 하지만 이건 가장 단순한 비교일 뿐 바그너만큼 심하지는 않다. 적어도 순이는 남자를 대신해 죽지도 않으며 무작정 종교적 용서를 베풀지도 않는다. 심지어 순이는 상대방인 남자를 그렇게 사랑하지도 않는 것 같다.

여기서 영화의 재미있는 점이 드러난다. 이준익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님은 먼곳에>를 만들었다. 그것은 구닥다리 여성성에 대한 진부한 예찬이기도 하고 양성간의 관계의 재정립에 대한 반성적 선언이기도 하다. 이는 이준익이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계속 이야기하고 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정작 영화 속의 캐릭터 순이는 이준익의 선언만큼 분명하지 않다. 영화는 단 한번도 순이의 내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관객은 순이가 대체 왜 사랑하지도 않는 남편을 따라 베트남으로 가는지, 중간 중간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인터뷰들을 읽어보면 이에 대한 감독, 각본가, 배우들의 생각이 그렇게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도 않다. 이준익이 사랑과 용서를 강조한다면 수애는 오기를 강조한다. 내 생각엔 사랑을 완전히 빼고 오기만 넣는다면 이야기가 딱 맞아떨어질 것 같다. 하지만 그 역시 내 생각에 불과하다.

순이는 창작자의 의도를 넘어선 캐릭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순이는 재미있다. 순이는 자신을 만든 사람들을 넘어선다. 속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미리 제시된 이데올로기에 쉽게 종속되지도 않으며 감독이 제시한 단순한 여성성의 함정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 맘만 먹는다면 관객은 순이를 통해 이준익의 온화한 해석과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끌어낼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이 페어플레이라고 본다. 여전히 이준익은 자신이 여성 캐릭터의 내면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남자가 여성주인공을 내세운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솔직할 수 있는 방법은 내면을 묘사하지 않고 그 빈자리를 미스터리로 남겨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진짜 칼자루는 이준익이 아니라 순이가 쥐고 있다. 나는 이준익이 기자들 앞에서 ‘완벽한 여성상’ 운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순이가 냉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받아치는 광경을 상상한다. “난 그런 것 따윈 아니거든?” 그 뒤에 무슨 이야기가 이어질지 난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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