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다시 또 보게 될 거야. 넌 나를 죽일 수 없어. 나 역시도 너를 죽일 수 없지.”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에게 던진 조커의 마지막 대사와 달리 관객은 앞으로 그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히스 레저의 마지막 모습이기 때문이다. 히스 레저는 지난 2008년 1월22일 자신의 아파트 침대 위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당시 그는 <아임 낫 데어> <다크 나이트>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등을 촬영하면서 연기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수면장애를 겪었고, 그때마다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복용했다고 한다.
<다크 나이트>에서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는 만인의 찬사를 받고 있다. 팀 버튼 감독의 1989년작 <배트맨>에서 잭 니콜슨은 연극적인 과잉 연기로 익살스럽고 여유만만한 강한 카리스마의 조커를 표현해냈다. 그에 반해 히스 레저가 그려낸 조커는 ‘혼돈’ 그 자체다. <버라이어티>는 “관객은 갈라진 흰색 얼굴 메이크업과 붉은 핏자국의 입술을 하고 방긋 웃는 조커의 얼굴 뒤로 히스 레저의 얼굴은 완전히 잊었다. 그래서 오히려 캐릭터는 완전해지고 조커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조커는 히스 레저의 기념비적인 캐릭터다. 이런 히스 레저를 과거의 조커 역할을 했던 세자르 로메로(1966년 로렌조 샘플 주니어 각본의 <ABC> TV시리즈 <배트맨>에서 조커 역을 맡았었다. 당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콧수염을 면도하라는 감독의 지시를 거절하고 콧수염을 그대로 지키고 얼굴에 흰색 메이크업을 하고 조커를 연기했다), 잭 니콜슨과 동일선상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히스 레저의 조커는 침착하고도 교활한 목소리로 배트맨의 감정을 뒤흔들며 선과 악의 딜레마에 빠지게 하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완전무결한 정의의 사나이 하비 덴트를 무너지게 하고, 고담시를 혼돈의 무대로 바꾼다. 그가 연기한 조커는 <배트맨> 시리즈의 어떤 악당보다 냉철하고 차갑다. 음악잡지 <롤링스톤>의 영화평론가 피터 트래버스는 “미치고-정신 나가고-불타오를 정도로 영리한 성격의 조커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게다가 병원 폭파 시퀀스에서 마지막 버튼을 눌렀을 때 병원의 남은 건물들이 폭발하지 않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두번, 세번 거듭 눌러 확인하는 조커는 순간 당황하지만 이내 그것마저도 즐기는 귀여운 표정까지 보여준다. 일관성을 보이다가도 의외의 모습이 나올 때 관객은 조커의 모습에 어리둥절하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하고 예측 불가능한 모습, 행동에 목적이 없는 순수 ‘악’ 그 자체다. 그리고 그것이 각본가 조너스 놀란과 데이비드 S. 고이어가 설정한 조커 캐릭터의 핵심적인 모습이다. 그들은 조커의 행동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려 할수록 조커의 매력이 반감한다고 말한다.
억누르는 연기로 더 깊은 어둠을 드러내다
그들의 설명과 달리 재미있는 점은 히스 레저가 조커를 연기하면서 흔들림없는 어떤 원칙을 세워놓은 걸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관객은 조커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커는 등장할 때마다 명확한 목표의식(배트맨, 하비 덴트, 고담시)을 보여준다. 캐릭터가 상징하는 ‘카오스’와 달리 히스 레저의 조커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계산을 가지고 행동한다. 가령, 조커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 히스 레저는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한다. 관객의 동정심을 사양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조커는 그 차원을 넘어섰다는 것을 대변하듯 말이다. 그리고 폭발적으로 감정을 내뱉는 연기가 아닌 감정을 계속 억누르는 연기로 더 차갑고 깊은 어둠을 보여준다. 그 결과 배트맨, 하비 덴트, 고담시 그리고 관객은 조커가 파놓은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이것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연출 목표와 맞닿아 있다. 아무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 같고 세계의 모든 것들은 방향을 잃은 혼돈 그 자체다. 조커와 부딪힐수록 딜레마에 빠져들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방황하는 배트맨과 달리 조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냉철하게 자신만의 행동을 한다. 여기서 히스 레저는 조커가 배트맨, 하비 덴트 나아가 고담시를 압도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달리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동시에 관객이 히스 레저라는 배우의 존재감이 아닌 철저하게 조커 캐릭터와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감정을 겉으로 쉽게 내지르지 않는 연기는 그의 전작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리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에서 히스 레저는 수줍음이 많은 청년 에니스를 연기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에니스가 잭(제이크 질렌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 거기서 그와의 추억이 깃든 셔츠를 챙겨 거실로 내려와 잭의 부모님을 마주했을 때 에니스는 슬픔을 내보이지 않고 안으로 집어삼킨다. 2년 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아임 낫 데어>(2007)에서 밥 딜런의 가정사와 연애사를 들려주었던 영화의 로비(히스 레저)에게도 이런 모습이 보인다. 극중 아내 클레어와 말다툼을 할 때 소리를 내지르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하면서 표정만으로 불만을 표출한다. 이처럼 히스 레저는 영화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철저하게 캐릭터 안에 숨겨왔고 감독의 의도와 이야기의 테두리 안에서 캐릭터를 해석하고 살을 붙였다. 게다가 감정을 드러내야 할 때 아낄 줄 알았다. 즉 역설적인 방법으로 감정을 더 진실하게 표현해왔던 것이다.
많은 이가 히스 레저의 이런 특별한 재능을 아쉬워하겠지만 그는 이제 없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의 마지막 대사 “언젠가 다시 또 보게 될 거야”는 영화팬들에게 큰 울림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