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크리스천 베일]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
2008-08-14
글 : 안현진 (LA 통신원)
<다크 나이트>의 브루스 웨인/배트맨, 크리스천 베일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에서 백만장자 브루스 웨인과 고담시를 지키는 배트맨을 연기한 크리스천 베일은,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를 한 얼굴에 담고 있는 배우다. <로렐 캐년>(2002), <하쉬 타임즈>(2005)에서처럼 일상적인 인물을 연기한 적도 있지만, 관객은 감정을 포기한 집행인(<이퀼리브리엄>)이나 불면증으로 환각을 보는 기계공(<머시니스트>), 인정받지 못하는 영웅(<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과 같은 극단적인 역할들로 그를 기억한다. “틀에 박힌 배우가 되지 않으려고 하지만, 내가 연기한 캐릭터들에서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가 연기하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양면성에 있다. 선악과 명암이 분리되지 않으며,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동시에 우직하며 천연덕스럽다. 월스트리트 은행가의 가면을 쓴 사이코패스를 연기한 <아메리칸 싸이코>(2000)를 필두로 성인 연기자로 조명받기 시작한 그에게, 야누스적 인물을 중심에 놓은 시나리오가 쇄도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토드 헤인즈는 <벨벳 골드마인>(1998)에서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10대 소년과 자살소동으로 사라진 가수의 뒤를 쫓는 기자로의 변신을 그에게 맡긴 적이 있다. 헤인즈는 변변한 분장없이 한 얼굴로 두 인물을 연기하는 베일의 재능을 발견했고, 2007년 <아임 낫 데어>에서 20년의 시간 폭을 둔 동일인물의 연기를 한번 더 주문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 사이에 만든 <프레스티지>에서 베일이 쌍둥이를 연기한 사실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묘사하기 쉽지 않은 그의 얼굴 역시 상반된 이미지들의 향연이다. 반듯하게 흐르는 이마가 끝나는 곳에 깊숙이 자리한 눈은 보기에 따라 한없이 여리고 선하지만 광기와 복수로 초점을 잃을 때도 있다. 서양인보다는 동양인에게서 많이 보이는 광대뼈를 가진 그의 뺨은 얇은 입술 안에서 울리는 금속성 바리톤과 더불어 그가 가진 분위기를 가장 잘 설명하는 지점이며, 아이러니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형상에 사로잡혀 공존하는 다른 이미지를 헤아리지 못하는 순간이, 배우로서 크리스천 베일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배역에 관련된 모든 걸 소화하는 ‘형상변조기’

“역할에 몰입하는 한 요구되는 모든 것을 소화할 수 있다.” 위키피디아는 크리스천 베일을 소개하는 글의 첫 단락에 “능숙한 영어 억양과 고무줄 체형으로 유명하다”고 적어놓았다. 1974년 웨일스에서 태어난 베일은 런던, 미국, 포르투갈 등에서 보낸 성장기 덕에 영어는 물론 스페인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한다. 1987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눈에 든 13살 소년은 아역배우 대부분이 그렇듯 연기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복화술과 마술에 능했던 할아버지와 서커스단 댄서였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피가 그를 연기자로 이끌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작 그는 중국, 스페인을 여행할 생각에 들떠 있던 어린아이였고 <태양의 제국> 프랑스 기자회견 자리에서 질문 세례를 피해 나가버릴 만큼 지루해했다. 그 뒤 케네스 브래너의 부름을 받은 <헨리 5세>, 디즈니한테는 재앙이, 컬트팬들에게는 희귀 아이템이 된 10대 뮤지컬 <뉴시스>, 로버트 션 레너드와 함께한 <스윙 키드>, 위노나 라이더가 친히 자신의 파트너로 선택한 <작은 아씨들> 등을 거쳤고, <벨벳 골드마인> <한여름밤의 꿈> <아메리칸 싸이코>를 통해 성인 연기자로 발돋움했다. 얼핏 아역 연기자의 모범적인 성장기처럼 보이지만, “<태양의 제국>을 볼 수 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하는 그는 좋은 경험쯤으로 생각했던 영화 출연 때문에 은둔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해안가 마을의 영국 소년은 길을 걷다가도 또래의 시비에 시달렸고, 얼굴도 모르는 여학생들이 그와 데이트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할리우드에서 연기자로서 두각을 드러낸 <아메리칸 싸이코>는 축복이었으나 그 역시 순탄하지는 않았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배역을 탐내 제작비가 오르면서 감독까지 올리버 스톤으로 바뀔 뻔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나중에 감독 메리 해런은 캐스팅이 취소될지 모른다는 소식을 들은 베일이 1시간 반을 울었다고 회상했다. 살인광의 모습 외에도 “행간에 숨겨진 유머까지도 읽어낸” 베일은 8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소비로 존재를 증명하는 여성혐오자를 성공적으로 창조했다. 또한 외모지상주의와 자아도취에 사로잡힌 여피족 남자가 가졌을 법한, 완벽한 신체를 만들어내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3:10 투 유마>(2007)의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거부할 수 없는, 환상적인 몸 연기”라고 극찬한 베일의 육체는 <아메리칸 싸이코> 뒤로도 여러 번 탈바꿈한다. ‘건카타’로 단련된 근육을 선보였던 <이퀼리브리엄>(2002)에서 <머시니스트>(2004)로 가는 사이 역할을 위해 83kg에서 55kg까지 몸무게를 줄였고, 촬영을 마친 뒤 6주 만에 <배트맨 비긴즈>(2005)를 위해 99kg로 살을 찌웠다. 2007년 <레스큐 던>에서 전쟁포로가 된 파일럿을 연기하며 또 한번 체중감량을 시도한 그는 “나 자신을 컨트롤하는 데 성공한 적이 있고, 그것을 다시 증명할 필요는 없다”며 급격한 체중변화에 대한 세간의 우려와 호기심을 일축했다.

실험이고 도전이었던 <배트맨> 시리즈

사람들은 크리스천 베일의 떡잎을 <아메리칸 싸이코> 혹은 <태양의 제국>에서 찾으려고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흥행성적과 무관하게 채워간 의미있는 필모그래피다. 토드 헤인즈가 “함께 일해본 배우 중 최고”로 꼽으며, 베르너 헤어초크가 “동세대 최고의 배우”라고 치켜세운다 한들 <배트맨> 시리즈 이전의 크리스천 베일은 제작자들이 즐겨 찾는 이른바 돈 되는 배우는 아니었다. 그가 출연한 영화는 대부분 저예산 독립영화들이었고, 한때 베일은 생활고 때문에 출연한 영화도 있었다. “어떤 영화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당시엔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다른 사람을 신경쓰기 시작하면 연기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베일은, 그래서 대중성보다는 작품성에 무게를 둔 영화들에 즐겨 출연해왔다. <배트맨 비긴즈>의 출연을 결심했던 것도 저예산으로 만들어지는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라는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슈퍼히어로물이 취향이 아니라고 해도 한번은 해보고 싶었다. 나는 한때 뮤지컬도 했으니까. (웃음)” 하지만 워너브러더스에서 프랜차이즈로 부활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블록버스터급 예산을 책정하자 도중하차할 생각을 했고, 크리스토퍼 놀란이 메가폰을 잡는다는 소식에 남기로 했다. <다크 나이트> 촬영 중에도 베일은 자의식을 내세우거나 영화에 개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의 관심은 오직 크리스(놀란)가 나를 통해 보여주려는 배트맨을 연기하는 데 있다.”

놀란을 향한 베일의 신뢰는 대단하다. 촬영이 끝나는 순간 캐릭터 스위치를 끌 수 있다는 베일은 다른 영화에 출연할 때와 마찬가지로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배트맨을 연기함으로써 얻게 될 명성이나 스타덤에 대해 두려워하고 부정하려고 애썼다. “나는 영화가 가져올 인생의 변화에 대해서 부정하는 데는 전문가다. 한밤중에 일어나 ‘이거 실수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고, 다시 누워서 ‘그냥 다른 영화들처럼 해치워버리자’고 스스로를 달래기도 했다. 진심으로 원하면서도 감당할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질까봐 겁이 났었다. 나에게는 <배트맨> 시리즈가 실험이고 도전이었다.” 유명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일은 베일에게 고통에 가깝다. TV영화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에서 예수 역을 맡았을 때는 손바닥에서 피가 흐르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배트맨이라는 컬트 아이콘에 새로운 주석을 달고 설명을 시도한 크리스토퍼 놀란은 진정한 영웅이었다. <백스테이지웨스트>와 <뉴욕매거진> 등이 크리스천 베일과 가진 인터뷰 서문에는 ‘형상변조기’(shape-shifter)라는 경탄이 빠지지 않지만, 연기력 이전에 물리적으로 캐릭터를 실현함으로써 영화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는 베일은 그런 공치사조차 놀란에게로 돌린다. <배트맨 비긴즈> <프레스티지> <다크 나이트> 세 작품을 함께하면서 관찰한 놀란의 유연한 연출 스타일에 대한 칭찬이리라. “그가 만드는 영화의 결말이 주는 모호함을 사랑한다. 크리스의 대단한 점은 영화를 두세번 봐야 발견할 수 있는 트릭을 곳곳에 남겨 놓는다는 점이다.” 크리스천 베일의 이름이 걸린 세 번째 배트맨을 보고 싶다고? 모두 크리스토퍼 놀란의 결정에 달렸단다.

“영화는 마술이며 수수께끼다”

“사생활을 캐릭터에 몰입하는 데 이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동안 캐릭터와의 유사점을 발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 중 하나다.” 브루스 웨인은 박쥐옷을 입고 고담시를 지키는 흑기사지만, 현실의 크리스천 베일은 사생활을 성역처럼 수호하는 까다로운 배우다. 2003년 잃은 아버지에 대해서도, <아임 낫 데어>와 <다크 나이트>를 함께한 히스 레저에 대해서도 그는 말을 아낀다. 최근 어머니와 누나를 폭행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은 뒤에도 함구로 일관한 그의 PR 정책은 <다크 나이트>의 개봉에 맞춰 벌어진 사건을 조용히 잠재웠다. 할리우드는 10일 만에 흥행수입 3억달러를 넘긴 <다크 나이트>에 열광할 뿐 그를 패륜아로 몰거나 진실을 캐내 폭로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유명세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동료 배우 킬리언 머피가 조언을 구했을 때 “나는 그런 걸 아는 마지막 사람”이라고 대답한 것도 선 긋기가 확실한 그다운 처세술이다. <레스큐 던> 촬영지인 타이 정글로 부인과 생후 6개월 된 딸을 데려간 일화나 DVD 서플먼트로 제공되는 부가영상 공개를 반대하는 사견은, 카메라와 함께 성장한 아역 출신 배우가 확장시킨 사생활의 범위를 말해준다. 린제이 로한이나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사생활마저도 판매 가능한 영역으로 확대해 타블로이드를 달구었다면, 베일은 스크린에서 보이는 모습을 제외한 모든 영역을 사생활로 만들어 감추고 숨겼다. “영화는 마술이며 수수께끼다.” 영화를 향한 맹목적인 그의 신앙은, 열반에 오른 뒤에도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경고하는 현명하고 주의 깊은 수도자가 찾아낸 안식처일지 모른다.

크리스천 베일은 최근 조니 뎁과 함께 출연한 마이클 만의 신작 <퍼블릭 에너미즈>의 촬영을 마무리했고 <터미네이터 샐베이션: 더 퓨처 비긴즈> 촬영에 돌입했다. 그는 새로운 <터미네이터> 3부작에 출연을 결정하기 전 “이걸 정말 또 하고 싶은가?” 몇번이나 자문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배트맨 비긴즈>를 시작할 때와 같은 비전을 보고 있다. “시리즈를 되살리지 못한다면 참여하는 의미가 없다.” 블록버스터와 블록버스터를 건너뛰는 커다란 보폭 사이로 인디영화 출연을 부지런하게 이어간 잰 발걸음. 어떤 방향으로, 누구와 함께 움직일지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보는 숨겨진 사생활만큼이나 궁금하다. 팬들과 관객은 결국 그가 보여주는 만큼만 볼 수 있지만, 베일이 그동안 보여준 연기들을 근거로 할 때 기다릴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에서 <터미네이터 샐베이션: 더 퓨처 비긴즈>로 이어진 도약을 단서로 그의 앞날을 예측하지도 전망하지도 말 것. 크리스천 베일은, 부분으로 전체를 읽을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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