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영화의 범주는 한없이 넓다. 실존하는 뮤지션의 이야기라면 그것이 다큐멘터리든, 극영화든 음악영화다. 뮤지컬? 당연히 음악영화다. 실존하는 뮤지션도,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과 사람이 음악으로 교감하는 이야기라면 그때도 음악영화는 기꺼이 팔을 벌릴 것이다. 이번 제천영화제 상영작 가운데에는 음악에 관한 직접적인 소묘는 아니지만, 음악과 필연을 맺은 작품들이 더러 있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에 출연한 가호의 신작 <노래 혼: 연어 합창단의 멜로디>(이하 <노래 혼>)와 톰 매카시 감독의 <비지터>가 음악을 통한 사람들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라면, 일본만의 독특한 음악 장르인 ‘가요곡’을 주제로 11명의 감독들이 11개의 단편을 연출해 구성한 <도쿄 랩소디>는 또 다른 하모니를 들려주는 영화다.
<노래 혼>은 한 소녀의 청아한 목소리로 시작한다. 해변을 무대삼아 맑고 고운 노래를 부르는 카스미는 지금 자신의 노래에 잔뜩 취해 있다. “지금 모든 사람이 내 노래를 듣고 있겠지? 아마 내 실력에 깜짝 놀랄 거야. 나는 내 노래를 몹시 사랑해.” 그러던 어느 날, 평소 흠모하던 학생회장 마키무라가 카스미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내민다. 마키무라의 말에 따르면, 사진 속 카스미의 모습은 “알을 낳는 연어의 표정”이다. 항상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해 듣고, 자신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사랑했던 카스미는 그 말에 상처를 받고 노래를 포기한다. 영화는 카스미가 다시 노래를 부르게 되는 과정을 묘사하는데, 보기에도 여린 이 소녀에게 용기를 주는 건 뜻밖에도 학원폭력만화에나 나올 법한 불량 청소년들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이 교감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음악 덕분이다. 소년들의 합창에서 감동을 얻은 카스미는 그들에게서 “노래를 부를 때는 가식이 없어야 한다”는 것과 “자기 목소리만 신경쓸 게 아니라 다른 이의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얻는다. 이들의 만남이 음악을 향한 순수한 열정에서 온 것이라면, 제천영화제의 폐막작인 <비지터>의 만남은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시작하고 음악이 그들의 관계를 돕는다. 경제학 교수인 월터는 학술회의 참석을 위해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뉴욕의 아파트로 향한다. 그러나 이미 그의 아파트는 낯선 방문객(혹은 불청객)이 차지한 상태. 이들은 시리아인인 타렉과 세네갈 출신의 불법이민자 자이납으로 사기꾼에게 속아 그의 아파트를 잠시 빌리고 있었다. 아내와 사별한 뒤 외롭게 지내던 월터의 삶에 이들은 큰 변화를 가져온다. 타렉이 아프리카 드럼인 젬베를 두드리는 소리에 매료된 월터는 타렉에게 젬베 치는 법을 배우고, 그 과정에서 그는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열정을 되찾는다. 낯선 이민자들과 만난 한 중년 남성의 깨달음을 통해 불법이민자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담담히 비판하는 <비지터>는 정치적인 동화인 동시에, 음악이 가진 치유의 힘을 보여준다. 시네 심포니 섹션 상영작인 <너바나>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부류의 만남과 우정을 다룬 작품이다. 모스크바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중 외로움에 지친 알리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그녀가 룸메이트를 찾던 중 만난 사람은 두명의 마약중독자 연인인 발레리와 데드맨. 살아온 방식과 생각이 다른 그들은 사사건건 부딪치고, 심지어 데드맨을 사이에 두고 알리사와 발레리의 묘한 경쟁구도가 생겨난다. 하지만 조금씩 서로 이해하게 된 이들은 서로의 생활에 물들기 시작한다. 음울한 세트와 강렬한 메이크업의 묘사, 그리고 각종 펑키한 음악들이 그들의 우정에 독특한 색깔을 입히는 작품이다.
이들 세편의 영화와 비교할 때, <도쿄 랩소디>는 또 다른 형태의 음악적 만남을 보여준다. 영화의 원제는 <가요곡이에요. 인생은>이다. 가요곡이란 전후 일본의 두 세대가 즐겼던 음악을 설명하는 용어로 부분적으로는 일본 근대 민요의 전통을 따르는 한편, 1950, 60년대 서양음악의 흐름에서 영향을 받은 음악이다. 당시 일본인이 즐겨 불렀던 11개의 히트곡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11편의 단편들이 공유하는 것은 일본인의 삶이다. 도쿄로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는 남자의 회상, 혹은 시골 청년의 순박한 사랑 등을 그리는 이 단편들은 통속 가요의 신파적인 가사와 이를 형상화한 뮤직비디오 같은 영상의 재미가 더 뛰어나다. 11명의 감독들이 각각의 개성으로 합주한 컴필레이션 앨범 같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