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주성치 생애 최고의 순간들 [1] 1988~1991
2008-08-28
글 : 주성철
글 : 박성렬 (객원기자)

주성치의 신작 <CJ7: 장강7호>가 뒤늦게 개봉한다. 이제 더이상 침을 뱉지 않고, 인간 슬로모션으로 등장하지 않는 그이지만 여전히 팬들의 오감을 마비시키는 이름이다. 어느덧 영화 데뷔 20년을 바라보는 그의 과거를 되짚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주성치의 의미있는 변화의 순간들과 잊지 못할 명장면들의 추억이 바로 여기 있다. 진지한 데뷔작 <벽력선봉>(1988)부터 홍콩 무협영화의 화려했던 전성기에 바치는 오마주 <쿵푸허슬>(2004)까지 모두 15장면을 엄선했다. 그리고 <CJ7: 장강7호>를 향한 우리의 질문에 정성스레 답한 그의 서면 인터뷰를 덧붙인다.

귀여운 양아치로 데뷔하다, <벽력선봉>(1988)

주성치가 말없이 등을 보인다. 동료들의 얘기에 대한 대답으로 점퍼에는 커다랗게 ‘Fuck’이라 새겨져 있다. 지금 생각하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주성치 개그의 전형이지만 사실 그의 데뷔작인 <벽력선봉>은 꽤 심각한 영화다. 너무나 앳되고 진지한 모습의 그에게 금마장 남우조연상을 안겨준 <벽력선봉>은 억울해서 징징 울기도 하는 주성치 정극 연기의 표본이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차 도둑인 그는 잔인무도한 무기 밀매 악당들로부터 ‘몇시까지 차를 가지고 어디로 와’라는 메시지를 받으면 그대로 실행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다 한 카지노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주성치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하지만 그는 정말 대리운전만 할 뿐 아무것도 모른다. 주인공 이수현이 때리면 때리는 대로 불쌍하게 맞던 주성치는 결국 그의 정보원으로 일하게 된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현장에서 악당들을 속이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위험천만. 4인조 악당으로 출연한 성규안, 황광량, 하가구, 한곤은 당대 최고의 악역들만 골라 모은 조합이다. 이후 주성치가 지니게 된 연기자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졸지 않는 담력은 그렇게 <벽력선봉>에서 다 얻었다.

이 사람! 이수현
이수현은 주목받던 방송인 겸 탤런트 주성치를 영화배우로 키워낸 장본인이다. 그가 제작한 <벽력선봉>에 이어 <풍우동로>(1990), <도성타왕>(1990)에서도 주성치는 맹활약. ‘한때’ 주성치가 가장 은인으로 여기던 선배.

첫사랑 장민의 겨드랑이 점에 빠지다, <도성>(1990)

사실 주성치의 영화에서 히로인들은 하나를 성취하면 딸려오는 덤 같은 존재다. <도성타왕>의 모순균은 마땅한 조건없이 주성치를 몸 바쳐 사랑하고 <007 북경특급>의 임원화가 주성치의 한심한 모습을 보면서도 애증을 느꼈던 것을 보라. <도신>의 뻔뻔한 패러디로 더 유명한 <도성>은 좀 별난 히로인을 앞세운다. 덜떨어진 촌놈 주성치는 카드만 쥐면 놀라운 신통력을 발휘한다. 대만의 갱단은 주성치를 도박판으로 몰고, 주성치의 목숨과 도박판에서의 승리를 노리는 홍콩 갱에 맞서 경호원(장민)이 투입된다. 보디가드와 주성치는 이미 구면. 주성치가 첫 만남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클로즈업되며 나타나는 것은 장민의 겨드랑이 점이다. 뜬금없는 매력 포인트처럼 색다르고 한편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이 히로인은 주성치와 반드시 사랑에 빠져야 한다는 공식에서도 자유롭다. 역할의 관습을 깬 장민은 놀랍도록 매력적이다. 이 독특한 배역 덕인지 장민은 이후에 거듭된 반복출연으로 주성치의 첫 번째 연인 자리를 확정짓는다.

이 사람! 오군여
<도성>에서 장민의 겨드랑이 점을 흉내내는 아줌마는 멜로영화 <망부성룡>의 히로인 오군여다. <천왕지왕>과 <럭키가이>에서도 또다시 주성치와 부부로 등장하며 매염방과 함께 주성치 사단을 빛내는 왕언니 격 존재다. 장국영과 함께 지금은 죽고 없어 추억만 아련하다.

이소룡과 조우하다, <도성타왕>(1990)

홍콩 주변 섬들 중 가장 크다는 란타우섬, 그곳에서 수상가옥들이 밀집돼 있는 마을 타이오는 바로 영화 속 주성치의 고향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이제는 너무나 유명한 아시아 최대의 불상인 포린사의 청동불상이 막 지어지는 모습이 보이고, 첵랍콕 공항이 들어서면서 일대를 노리는 부동산 투기꾼이 주성치 가족에게 으름장을 놓는 장면도 있다. 그렇게 <도성타왕>은 홍콩의 급격한 개발 붐 속에서 풋풋한 향수로 가득 차 있는 작품이다. 이소룡을 너무나 좋아한 아버지(원화) 때문에 주성치는 주소룡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괴력의 사매(모순균)와는 달리 무술 수련에는 별뜻이 없고 오직 밤낮으로 당구에만 열중이다. <도성>의 기록적인 대성공 이후 도박을 당구로 치환하고, 대륙에서 홍콩으로 넘어온 설정을 대륙이 아닌 란타우섬으로 바꾼 <도성타왕>은 이후 주성치 이미지의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이소룡의 그림자가 처음으로 드리운 작품이라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아뵤!’ 하는 괴조음은 물론 마음씨 좋은 아버지와 일편단심 여주인공 모순균, 뮤지컬을 보는 것처럼 상대 여배우와 율동을 펼치는 주성치의 모습 등 이후 그의 영화를 규정짓는 원형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이 사람! 원화
원화는 사람들에게 과거 이소룡의 <정무문>(1972)에 출연했던 기억을 떠벌리며 그를 사형이라 말한다. 그가 실제로 <정무문>에서 단역이었기에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신격대도>에서는 악역이었지만 <신정무문2> <쿵푸허슬>의 그는 급호감.

침 뱉으며 무술하다, <신정무문>(1991)

대륙에서 건너오자마자 가방을 빼앗긴 주성치는 도둑 종진도를 잡자마자 가공할 가래침 대결을 벌인다. <도성>처럼 대륙의 촌뜨기라는 설정은 여기서도 유효하며 이번에는 도박이 무술로 변했다. 커다란 자판기를 번쩍 들어올릴 정도로 신기의 초능력을 숨기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도성>과 <소림축구>의 괴력의 오른발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주성치 특유의 설정들이 자리잡아가는 가운데 <신정무문>은 이소룡에 대한 매혹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또한 능청스럽게 분비물 유머를 자유롭게 구사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주성치 마니아의 초창기 형태는 이런 분비물에 대한 열광이었다. <도성>의 인간 슬로모션(주변 속도는 그대로인데 당사자만 천천히 움직이는)이 홍콩 누아르에 대한 패러디였다면, 몸을 날려 쌍권총을 쏘는 게 아니라 가래침을 뱉는 그의 모습 역시 같은 의미다. <쿵푸허슬>의 원조가 <신정무문>이었다 해도 좋을 정도로 코미디 이상으로 액션배우로서의 주성치가 존재를 드러낸 작품. 이소룡의 노란색 <사망유희>(1978) 트레이닝복을 걸친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

이 사람! 종진도
<사랑의 스잔나>(1976)로 유명한 영원한 ‘아비’(알란 탐과 함께 그룹사운드 ‘위너스’를 할 당시의 별명). 하지만 주성치 앞에서는 천연덕스레 도둑질을 일삼고 침을 모아 발사! 당연히 속편 <신정무문2>에도 출연했고 <녹정기>에도 출연.

특급스타 유덕화를 농락하다, <정고전가> (1991)

자칭 ‘멋쟁이 해결 전문가’(정고전가)인 전이(주성치)는 신출귀몰하는 심부름꾼이다. 바로 이 정고전가의 그물에 회사원 차문걸(유덕화)이 걸려든다. 회장의 딸 루시 정(관지림)과 약혼한 마이클이 연인과 유덕화의 진득한 관계를 눈치챘기 때문. 이 음모에 맞서야 할 유덕화는 별다른 능력없이 올곧은 신념이 전부인 샌님이다. 정고전가의 승리는 불보듯 뻔하다. 뮤지컬로 바뀐 화면에서 유덕화와 합창을 하던 주성치는 이윽고 유덕화의 입술마저 빼앗아버리고 유덕화는 연인에겐 동성애 혐의로 눈총을 받는다. 영화 한편으로 주성치는 톱스타와 어깨를 견주는 상대에서 진정한 고수로 거듭난다. <지존무상>(1989)으로 시작된 ‘카지노 무비’의 유구한 역사에 비춰볼 때, <도성> 이전 <정전자>(1989)의 원조 톱스타였던 유덕화를 떡 주무르듯 주물대는 주성치의 모습에 홍콩영화계의 톱스타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그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사람! 성규안
첫 장면에서 아내의 의뢰 사실도 모르고 사무실로 들어왔다가 유덕화만큼이나 호되게 당하는 남자를 기억해둘 것. 홍콩영화계의 악역대장 성규안이다. <정고전가>는 홍콩의 본격 누아르영화에 나왔던 주인공(유덕화)과 악당 모두를 주성치가 가지고 놀았다는 의의가 있다. <첩혈쌍웅> 같은 범죄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거물이지만 <도성타왕> <도협> <도성2> <신정무문> 등의 주성치 영화에도 자주 출연했다.

또 다른 선배 허관문을 떠올리다, <신격대도>(1991)

주성치가 현재 홍콩 코미디의 제왕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에게도 선배의 존재는 크다. <미스터 부> 시리즈로 유명한 허관문, 허관영, 허관걸 ‘허씨 3형제’는 바로 홍콩 코미디영화의 원조나 다름없다. 특히 주성치처럼 감독을 겸하며 소시지를 쌍절곤처럼 돌리던 <반근팔량>(1976)의 허관문은 황당무계 혹은 서민적 광둥어 코미디의 전형이라는 점에서 주성치의 직속선배나 다름없다. 주성치가 이소룡과 더불어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는 영화인이 바로 허관문이다. 이력지가 감독을 맡은 <신격대도>는 그런 점에서 <미스터 부> 시리즈 중 일부를 연출하기도 했던 오마, 그리고 허관걸과 함께 <최가박당> 시리즈의 스타였던 ‘빡빡머리’ 맥가가 출연해 선후배간 우정의 무대를 연출한 영화다. 이수현의 영화사 매그넘과 맥가가 주축을 이뤘던 영화사 시네마시티가 공동으로 제작했다. 서로 속이지 못해 안달인 사기꾼들이 급기야 힘을 합쳐 더 큰 적을 속이기로 결심하는 <신격대도>에서 주성치는 혼자 도드라진다기보다 오마, 맥가와 함께 코미디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 속 글래머 애플(엽자미)의 오바이트를 키스하듯 다 받아먹고, 아침에 일어나 계단에서 굴러 내려오며 이 닦기와 옷 갈아입기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주성치의 모습은 영락없이 그만의 ‘인증숏’이다.

이 사람! 엽자미
<옥보단>(1992)의 히로인이기도 한 홍콩영화계 최고의 ‘왕가슴’ 엽자미를 안다면 당신은 확실한 주성치 마니아. 이미 <도성타왕>에서 미친 듯이 그녀의 거유를 카메라에 담았던 주성치는 <신격대도>에서는 자신의 ‘찌찌’에 계란 프라이를 갖다붙여 무한애정을 고백한다.

혀로 박스오피스 정상에도 오르다, <도학위룡>(1991)

<도성>의 대대적인 성공으로 주성치는 1년에 4∼5편 이상 주연을 맡게 된다. <도성>이 박스오피스 최고 기록을 세운 이듬해 1991년의 최고 흥행작은 뭘까. 바로 그의 인기를 확고히 해준 학원코미디물 <도학위룡>이다. 이후에도 1992년 <심사관>, 1993년 <당백호점추향>까지 그의 영화는 4년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또한 <도학위룡>은 침 뱉기로 종진도와 대결을 벌이는 <신정무문> 등과 더불어 주성치의 엽기 행각이 가장 빛을 발하던 시기의 영화이기도 하다. 콘돔으로 풍선을 불고 혀로 휴대전화를 누르는 장면 등은 언제 봐도 흐뭇한 감동적인 장면들이다. 홍콩 현직 경찰인 주성치가 사라진 권총의 행방을 찾아 고등학교에 들어간다. 사라진 경찰 국장의 권총이 불량 학생들의 수중에 들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기 때문. 이제 공부라면 질색인 주성치 앞에 날마다 끔찍한 학교생활이 이어진다. 교복을 입고 등장하는 주성치의 모습은 너무 귀엽다. <백 투 스쿨>(1986)의 홍콩 버전인 <도학위룡>에서 숙제를 안 해와 벌을 서고, 쉴새없이 장난기를 발동시키는 모습은 그때까지 형성됐던 주성치 이미지의 집대성과도 같다.

이 사람! 원경단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이라며 겁도 없이 ‘학생’ 주성치에게 칠판지우개를 날리던 선생이 바로 원경단이다. 사실 어지간한 주성치 영화에 짧게라도 늘 웃기게 출연했던 그녀는 <무장원소걸아> <주성치의 007> <구품지마관> 모두에서 소신있게 계속 기방의 여주인이었다.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