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주성치 생애 최고의 순간들 [2] 1992~2005
2008-08-28
글 : 주성철
글 : 박성렬 (객원기자)

거성 김용을 알현하다, <녹정기>(1992)

승승장구하던 주성치가 하나의 정점을 찍은 것은 <신룡교>라는 속편까지 만들어진 <녹정기>다. 그가 사극에도 어울린다는 것을 증명함은 물론 홍콩 스타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던 김용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 김용이 창조한 캐릭터 중 가장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그러니까 엉큼하고 약삭빠르고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위소보의 모습은 주성치를 통해 전혀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가 됐다. 반청복명을 외치며 결성된 천지회와 신룡교는 황제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데, 천지회의 일원인 위소보는 황궁에 들어갔다가 그만 황제의 인품에 반해 그를 돕게 된다. 주성치를 이루고 있는 삼각형이 이소룡과 허관문과 김용이라면 그 마지막 조각이 <녹정기>로 꿰맞춰지게 됐다. 실제로 김용과 주성치는 절친한 사이인데 <쿵푸허슬>에서 돼지촌 주인 부부가 스스로를 양과와 소용녀라고 말하는 것, 야수가 합마공을 사용하는 것 등 김용 소설의 많은 부분을 가져오면서 하나당 1만위안씩 총 6만위안의 판권 사용료를 지불하기도 했다. 그렇게 주성치가 이후 시대극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건 김용이라는 엔진을 달고서다. 또한 <녹정기>에서 호랑이 모자를 쓴 주성치의 모습은 그의 가장 사랑스런 이미지 중 하나다.

이 사람! 구숙정
주성치의 여인들 중 빼놓을 수 없는 미녀. <녹정기>에 건녕 공주로 나온 그녀는 주성치의 거시기를 잡고 흔들었고, 급기야 호랑이 붕알로 만든 수프로 유혹하기도 했다. <정고전가>는 물론 <산사초>에서 유랑 인형극단의 어여쁜 수연 낭자도 매력적이었다.

심금을 울리는 눈물을 배우다, <무장원 소걸아>(1992)

만사에는 원인이 있게 마련이니 자식의 방황은 대개 아버지 탓이다. <무장원 소걸아> 이전까지 주성치 영화에 나오는 가장들은 대개가 답 없고 한심한 웬수들이다. <도성타왕>의 아버지는 배포 크게 일을 벌렸다가 부끄러워 원숭이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얼뜨기이고 <도성>의 삼촌은 시골에서 올라온 사촌에게도 막되게 구는 인간말종이다. <무장원 소걸아>의 가장은 좀 다르다. 하루아침에 거지꼴이 난 오맹달과 주성치 부자. 오맹달은 얻어맞고 자존심까지 피떡이 된 아들을 위해 허풍을 떨고, 매일 아침 아들의 먹을 것을 구걸하는 훈훈한 아버지다. 뒤늦게 불타오른 부정은 개밥까지 함께 나누어먹는 수준으로 발전한다. 가난과 핍박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단단한 부정은 올림픽 금메달감이다. 세심하고 인정 많은 아버지의 등장으로 주성치 영화는 빠져 있던 퍼즐 조각 하나를 맞춘다. 인간다운 아버지가 등장하고 인간다운 주성치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눈물 흘리는 <서유기>의 인간다운 지존보, <장강7호>의 듬직한 아버지상은 <무장원 소걸아>에서 시작되었다.

이 사람! 이건인
일명 ‘코파는 남장 여자’ 이건인은 주성치 사단의 진정한 비기다. <무장원 소걸아>에서는 거지가 된 부자를 도와주는 대신 오맹달의 몸을 요구하는 여인으로 등장하여 코를 파고 <당백호 점추향>과 <식신>에서도 오로지 코만 판다. <장강7호>에도 나오는 코파기 개그의 원조라 할 만하다.

코미디를 넘어 기예의 경지에 이르다, <당백호 점추향> (1993)

디제이, 아니 당인(當人) 백호는 명왕조의 슈퍼스타였다. 무릇 향기로운 꽃에 나비가 몰리게 마련이니 당백호(주성치)는 시와 그림에 능한 당대의 인재였기 때문이다. 뭇 여성들은 당백호의 시구 하나에 가슴을 콩닥였고 황제와 관료들은 당백호의 도장 찍힌 풍경화 한점을 벽에 걸기 위해 절교도 마다않았다. 능력에서 시대를 앞서간 당백호는 동생의 알몸을 인간 붓으로 삼아 그림을 그려냈으며 맥박을 악기삼아 남아당자강의 리믹스를 연주한 전위예술가였다. 예리하게 현실을 재단하고 이어붙이는 그의 즉흥시는 가히 하나의 디제잉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겸손하기까지 한 당백호는 호화로운 관료생활도 마다한다. 유일한 소망 한 가지는 내조에 무관심한 변태주부들을 내쫓고 참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 여자를 얻기 위한 당백호의 여정이 섬세한 음악과 미술의 바탕 위에 펼쳐진다. 이로써 주성치의 영화는 코미디와 휴먼드라마에 이어 고전 예술의 경지에 오르는 셈. 실제 <황비홍>의 작곡가인 황점이 음악을 맡았다.

이 사람! 진백상
착하게 생긴 게 죄는 아니지만 당하기에는 딱 좋은 구실이다. 서글서글한 인상 때문에 당하고만 살았을 것 같은 탤런트 진백상은 <당백호 점추향>의 첫 장면에서 주성치에게 인간 붓으로 휘둘리고 <도학위룡3>에서도 액자 안에서 알몸 연기를 펼친다.

그토록 고대하던 제임스 본드가 되다, <007 북경 특급> (1994)

여자는 제임스 본드를 좋아한다. 그리고 각종 첩보물과 남성 누아르물을 인용하는 주성치는 ‘짝퉁’ 제임스 본드다. 여자들이 주성치 주변에 우글대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여자를 강렬히 욕구하는 본능, 믿거나 말거나 살인면허가 교부되었다고밖에 믿을 수 없는 강렬하고 무책임한 주먹, Q의 아이디어를 뺨치는 기발한 프롭들, 주인공의 옆구리에 착 달라붙는 쌔끈한 히로인은 ‘짝퉁’의 의혹을 굳히는 유력한 증거다. <007 북경특급>은 제임스 본드에 대한 지적인 패러디이자 영국 첩보영화의 주성치식 완성이다. 십년 만에 돌아온 중국 정부의 007(주성치) 요원은 이중첩자 이향금(임원화)의 공격을 견뎌내고 황금총을 가진 악당과 대면한다. 중국의 Q가 주었던 신무기들은 요란한 겉보기에도 불구하고 별 쓸모가 없다. 이날을 위해 십년 동안 갈아온 돼지 잡는 칼은 마침내 무엇에도 끄떡없던 악당을 쓰러뜨린다. <정고전가>에서 톱스타와 어깨를 겨누었던 주성치는 <007 북경특급>에 이르러 자기가 갈아온 칼로 첩보영화의 전설을 뛰어넘는다. 근면하게 칼을 갈아온 주성치의 날선 승리다. 원래 주성치는 제임스 본드 같은 그런 멋진 남자였으니까.

이 사람! 나가영
<서유기 선리기연> <서유기 월광보합>에서 손오공을 향해 ‘Only You’를 열창한 삼장법사는 월광보합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다. <007 북경특급>에서는 괴짜발명가 다비치, <식신>에서는 요리대회 사회자로 열연했던 나가영은 <산사초> <도신2>에 출연했으며 성룡의 <빅타임> <취권2>에도 얼굴을 비췄다.

왕가위의 경지를 넘보다, <서유기 선리기연> (1995)

주성치 팬들 사이에서 거리낌없이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 중 하나. <서유기 월광보합>으로부터 이어지는 속편 <서유기 선리기연>은 거의 모든 장르를 종횡무진하는 판타지영화이자 시간여행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500년 뒤의 미래에 두고온 처 백정정(막문위)을 잊지 못하고 자하대선(주인)의 사랑을 거절하는 지존보(주성치)는, 그녀가 내민 칼 앞에서 “그때 검과 내 목과의 거리는 0.01mm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또한 눈물을 흘리며 “만약 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년으로 하겠소”라는 말까지 내뱉는다. 명백하게 자하대선은 <동사서독>의 모룡연(임청하)를 패러디한 것이며, 지존보 역시 구양봉(장국영)과 맹무살수(양조위)를 섞어놓은 것이다. 뻔뻔하게 왕가위의 <중경삼림>부터 <동사서독>까지 꼼꼼히 재해석해서 만든, 그러니까 패러디의 반복이 쌓이고 쌓여 원본의 경지까지 가닿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주성치식 세계의 완벽한 소우주다. 주성치의 가장 슬픈 표정을 볼 수 있는 작품.

이 사람! 막문위
주성치의 여인들을 미녀와 추녀로 구분할 수 있다면, 막문위는 유일하게 그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이다. <서유기> 시리즈는 막문위의 가장 아름다운 사극이며 <희극지왕>에서도 잘나가는 미모의 영화배우였다. 하지만 <식신>에서는 추녀였고 <홍콩 레옹>에서는 어울리지 않게 마틸다였다.

홍콩영화계의 최후지존이 되다, <식신> (1996)

1997년 홍콩 반환은 통쾌한 합일이 되어야 옳았건만 홍콩 국민들 사이에선 대란의 원인이었다. 영국의 식민지로 남는 편이 낙후된 공산당에 복속되기보다 낫다는 판단 때문. 홍콩 반환의 전후로 출애굽기를 능가하는 대탈출이 이어졌고 탈출의 움직임은 특히 영화계에서 뚜렷했다. 오우삼과 서극, 주윤발 등 홍콩영화의 대스타들은 할리우드에서 새 활로를 찾았다. 홍콩영화계에 홀로 남은 주성치는 문자 그대로 유아독존이자 지존이었다. 까마득한 고층 빌딩의 옥상에서 호사를 누리는 영화 속의 식신은 90년대 홍콩영화계의 주성치 자신이다. 자고로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여야 하거늘, 식신(주성치)의 오만방자한 태도는 동업자들에게 분노를 사고 주성치는 바닥부터 다시 재기한다. 잠시 휘청거리던 주성치는 원래의 자리를 수복함과 동시에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에게 인정받으며 ‘신이 인정한 요리사’로 등극한다. 하늘도 인정하는 주성치 진화의 종점이다.

이 사람! 유이달
소림사의 찌질한 방장으로 열연하는 유이달은 주성치 영화의 숨겨진 고수 중 하나. 80년대에는 ‘달명일파’라는 밴드에서 작곡과 기타를 맡기도 했으며 <라스트 템테이션>으로 홍콩 금마장상을 수상한 유능한 작곡가다. <천왕지왕 2000>과 <산사초>, <주성치의 007>(1996)에도 등장한다.

최고의 자리에서 과거를 회고하다, <희극지왕> (1999)

소년은 어른이 되고 어른은 소년을 추억한다. <식신>과 <파괴지왕>으로 홍콩영화계에서 일약 정점에 오른 주성치는 번잡한 홍콩의 거리에서 한적하고 쓸쓸한 해변도시로 배경을 옮긴다. 작품마다 알고보면 그래도 꽤 능력있는 놈이었던 주성치는 <희극지왕>에 이르러 정말 보잘것없는 엑스트라로 등장한다. 바다 위에 선 영화 속의 주성치는 모래성처럼 한 꺼풀의 파도에 밀려 사라져버릴 것 같은 존재다. <식신>의 위압적인 요리기술도 없으며 <희극지왕>처럼 우연히 잠재력을 발견하는 일도 없다. 주머니에는 돈푼조차 없어 근면함으로 버티며 살아가지만 한 꺼풀씩 밀려오는 운명의 힘에 좌절하는 시시포스다. 유일한 무기는 “분발! 노력하자!”라는 힘없는 구호뿐. 실제 이소룡이 우상이었던 소년 주성치는 부모의 이혼과 가난 때문에 무술학원의 등록증을 끊을 수 없었다. 가난과 멸시, 무엇보다 존경하는 이소룡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 앞에 좌절하고 슬퍼하는 영화 속 주성치의 모습은 배고프고 어려웠던 소년 시절의 주성치를 생각나게 한다. 실제로 주성치의 영화계 데뷔를 전후한 시절 고생담이 이 영화에 담겼다 한다. 성공한 자의 여유있는 자만(<식신>)에서 갑자기 정색하고 아득한 회고조로 돌아온 <희극지왕>은 정말 지독하게 슬픈 영화다.

이 사람! 팔량금
주성치 사단 배우들 중 최고의 추남. 깎지 않은 코털과 눈곱의 앙상블, 수줍고 해맑은 미소로 우리를 졸도하게 만드는 이 추남은 팔량금. <식신>에서는 1인2역을 소화하고 <럭키가이>와 <도성3>에도 출연했다. 이건인마저 초라하게 만드는 지독하게 못생긴 얼굴 덕이다.

거장들에게 헌사를 바치다, <쿵푸허슬> (2005)

<쿵푸허슬>은 홍콩 무협영화 전통에 바치는 절대적인 오마주의 세계다. 눈물을 훌쩍일 만큼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는 바로 도끼파를 돼지촌의 숨은 세 고수가 물리치는 장면이다. 주인 부부인 원화와 원추는 수수방관하고 양복점 주인 조지릉과 짐꾼 행우, 그리고 찐빵가게 주인 동지화가 정말 가슴 뭉클한 결투를 벌인다. 보통 중국 무술을 남권북퇴(권=손, 퇴=발)로 정리하고 가장 일반적인 무기술을 봉술이라고 한다면, 이들은 중국 무술의 정수를 모아 삼위일체로 (홍콩에 대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돼지촌을 지켜낸다. 그리고 마지막 대결, 주성치는 거대하고도 위대한 마침표를 찍는다. 이소룡과 김용, 장철과 유가량의 영화를 오가던 주성치가 드디어 최후의 오마주를 홍콩 무협영화의 위대한 거장 호금전에게 바치는 것. 쓰러진 양소룡이 <협녀>(1969)의 한영걸처럼 항복하는 시늉을 하며 주성치를 공격하고, <협녀>의 수도승 교굉의 머리 뒤로 태양이 내리쬐던 숭고한 열반의 숏이 무려 30년이 훌쩍 지나 주성치의 머리 뒤에서 펼쳐진다. 이윽고 솟구치는 부처님의 손바닥 ‘여래신장’, 이것은 정말 무협영화라는 거대한 강을 건너 홍콩영화사를 가로지르는 가장 숭고한 애정의 시퀀스다.

이 사람! 진국곤
<소림축구>에서 골키퍼를 연기했던 진국곤이 <쿵푸허슬>에선 도끼파의 야비한 보스로 출연했다. 이소룡을 사랑해 마지않는 주성치가 보자마자 이소룡을 떠올리며 캐스팅했다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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