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영화다>의 깡패 ‘강패’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소지섭은 깡패가 되고 싶은 꿈을 꾸었다. 군 입대로 3년간 떠났던 소지섭이 복귀작으로 <영화는 영화다>를 고른 이유는 매끄럽게 읽힌 시나리오 외에도 강패와 그가 가진, 같은 목마름 때문이었다. “스타가 아니라 배우가 되고 싶었다. 부스스한 머리 모양과 단벌 느낌의 블랙 슈트도, 20번 이상 대본을 읽고 나서 떠올린 스타일이다. 최대한 힘 빼고 신경 안 쓰고 가고 싶었다.” 기왕 하는 것 멋지게 해내야 마지막도 멋있다는 로망에서 벗어나 정말 제대로 배우가 되고 싶었다. 수염은 자라게 내버려뒀고 메이크업도 없었다. “피폐하고 탁한 인물”이라는 그의 표현대로, 영화에서 강패는 강박적으로 문단속을 하며 수면제와 알코올 없이는 잠들지 못한다. 그런 기댈 곳 없는 남자에게 어느 날 꿈을 실현할 기회가 온다. 상대배우를 폭행해 촬영 중단 위기에 놓인 영화배우 수타(강지환)가 출연을 제의한 것. 솔깃한 제안을 받은 강패는 “흉내는 못 낸다. 진짜로 하면 하겠다”고 조건을 건다.
김기덕 감독의 조감독 출신으로 첫 메가폰을 잡은 장훈 감독은 “다른 삶을 사는 두 남자가 서로를 동경한다”고 설명했지만, 소지섭에게는 동경하는 삶도, 연기 모델도 없었다. 모방할 것 같아서 비슷한 영화는 일부러 피했다. 캐릭터에 대한 정보는 모두 시나리오에 있다고 생각해서 애드리브도 거의 하지 않았다. 수타와의 첫 대면에서 악수나 하자며 껄렁하게 손을 내미는 정도가 전부다. 편집본을 보니 그 순간 느낌이 좋더라며 소지섭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웬만해서 스스로에게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그도 만족스러운 눈치다. “하루 26시간 촬영했다.” 현장은 치열했다. 드라마 현장보다 빠듯했던 47일 동안 배우가 스탭이 되고 스탭이 배우가 되는 일은 예사였고, 바쁠 땐 조명도 들고 마이크도 들었다. 장면 순서대로 찍는 건 상상도 못했던 일. 감정의 흐름과 상관없이 장소가 겹치면 하루에 다 소화해야 했다. “그래도 고생한 장면이 좋은 것 같다.”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갯벌장면인데, 합을 다 맞춰놨는데도 갯벌에 들어가니 발이 묶여 영화에서처럼 ‘진짜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사동 장면은 정신적 부담이 컸다. 영화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장면이라는 생각에 감독에게 촬영을 최후로 미루자고 부탁도 했었다. “이 영화처럼 모호한 결말을 좋아한다. 상업적으로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주는 쪽이 좋겠지만.” 대중적 취향과 거리가 있다는 뉘앙스를 비치면서도 소지섭은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와주길 바랐다. 크레딧에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으니 당연하다. “물질적이지만 내 것이 포함되면 더 열심히 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투자했고 알게 모르게 ‘내 영화’라는 애착도 커졌다.”
얼마 전 소지섭은 일본영화 <게게게노 기타로: 천년저주가>에 요괴 ‘야샤’ 역으로 출연했다. “허무맹랑하고 CG 많은 영화”를 싫어한다는 대답과 모순되는 선택이다. “일에 있어서 많이 달라졌다. 전엔 싫은 건 절대로 못했는데 융통성이 생겼달까. 이제는 대화를 통해서 타협도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다들 놀란다.” 소집해제 뒤 크게 변한 건 없다면서도 그는 공백 뒤 달라진 모습을 조금씩 꺼내놨다. “호텔 경영”이라는 꿈을 여전히 품고 있지만, 그보다는 “가족이 모두 모여 복작거리며 사는 것”이 진짜 꿈이라고 말하고, 연애가 너무 하고 싶은데 만날 기회가 없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혼자 있을 땐 뭐하냐는 질문에, “사람 다 똑같다. 책 보고 음악 듣고 인터넷 한다. 요즘엔 올림픽 본다”며 털털하게 웃었다. 좋아하는 배우도 미키 루크에서 에드워드 노튼으로 바뀌었다. 연기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좋단다. 노튼처럼 연출에도 관심이 있냐고 물으니 연기만 하기도 힘들다고 손을 젓는다. 영화 홍보차 서너번은 연예프로그램에도 출연할 것 같다는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연기할 때 돌아가는 카메라 말고는 어색하다. 웃겨야 할 것 같은 부담도 있고. 요즘엔 배우들이 많은 걸 하더라. 배우 입장에서는 연기라도 제대로 하고 싶은데 쉽지 않다.”
어느덧 데뷔 14년차지만 그동안 소지섭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굳건했다. 무뚝뚝, 무관심, 무표정, 폼생폼사. “데뷔하자마자 뜬 건 아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로 인기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곧바로 입대하는 바람에 실감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고, 그래서 늘 비슷한 대답만 내놓나 보다.” 그는 좌우명도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라며 좌우명이 쓰여진 휴대폰 화면을 보여줬다. 마음은 한결같아도 서른둘이 된 이 남자가 변하기는 변한 모양이다. 융통성이 생겼다는 자평 말고도 인터뷰 내내 자연스러운 편안함과 적절한 순간에 필요한 말을 꺼내는 어른스러움이 느껴졌다. 말을 아끼는 탓일까? 여전히 어떤 고집은 꺾지 않을 것 같은 그가 입을 열었다. “저 많이 쉬었어요. 이제 일하고 싶어요.” 공익근무요원이었던 3년 동안 직장인만 안다는 월요병을 제대로 앓은 소지섭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