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오이는 지금 트렌드다. 최근 개봉한 영화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와 곧 개봉할 단편영화 <소년, 소년을 만나다>, 내년 초 개봉예정인 <쌍화점> 그리고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작품은 ‘백합물’로 분류되는 것이 정확한데, 용어 정리는 다시 하도록 하자)까지 최근 대중에게 주목받고, 기대를 모으는 일련의 작품들은 모두 동성애 코드 혹은 야오이 코드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거나 그것을 주제 자체로 삼은 것들이다. 이런 제작 경향은 분명히 일반 대중이 야오이/동성애 코드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인다는 믿음에 어느 정도 바탕할 것이다. 관계자들도 이 부분에 대해 부정하진 않는다. 야오이는 어쩌다 트렌드가 되었는가. 아니, 이보다도 먼저, 당신은 이 특정한 문화 코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이하 <앤티크>)의 원작 만화를 그린 요시나가 후미는 유명한 <슬램덩크> 동인계 출신이다. <슬램덩크> 동인계 출신이란 말은,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농구 만화 <슬램덩크>의 남자 주인공들을 데리고 ‘호모질’을 했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성들이 그들끼리 남성동성애(male homo-sexuality)물 또는 남성동성성애(male homo-eroticism)물을 향유하는 것을 야오이 문화라고 부른다는 건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호모질’이란 바로 그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취향적 활동에 대해 스스로 극단적 비하의 의미를 담아 쓰는 또 다른 속어다.
요시나가 후미는 ‘호모질’의 세계에서도 ‘하드한’, 즉 수위 높은 작품들을 그려냈던 것으로 팬들 사이에 유명하다. 그중 <서양골동양과자점>은 특별한 ‘씬’(수위 높은 애정신을 가리키는 말) 한번 나오지 않는 이른바 ‘9금 수위’ 내지 ‘5금 수위’에 속하고, 굳이 분류하면 야오이 만화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앤티크>를 향한 동인계 여성관객층의 기대와 반응은 엄청나다. 특히 영화에서 ‘마성의 게이’로 등장하는 선우(김재욱)가 민혁(주지훈)에게 키스하려는 장면이라든지, 선우와 그의 프랑스 유학 시절 파티셰 스승인 장 바티스트(앤디 질레)가 만들어낸 뜨거운 키스신, 민혁네에 얹혀 살았던 파출부 아들 수영(최지호)이 선우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는 장면 등이 예고편으로 공개되면서 동인녀들이 많이 오가는 인터넷 게시판 곳곳에서는 “한국이 드디어 선진국 대열에 들었다”며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감격해하는 코멘트들이 무수히 달리기도 했다.
윤복-정향 커플에 열광한 동인녀들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7, 8회 때까지 모았던 격한 인기의 일부도 동인녀들에게 기인한다. 이 드라마의 멜로 라인은 크게 두축이다. 하나는 남장여자인 신윤복(문근영)과 스승인 김홍도(박신양)간의 관계이고 또 하나는 신윤복과 기생 정향(문채원)의 관계다. 동인녀들은 후자에 압도적으로 열광했다. 첫 번째 이유는 후자가 시각적으로 훨씬 아름답기 때문이며, 두 번째 이유는 후자가 훨씬 “부조리한”(배익현 SBS 책임프로듀서) 애정관계와 긴장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는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의 은찬(윤은혜)-한결(공유) 관계가 그랬듯 남장여자가 남자의 복장을 벗는 순간 그 관계가 전통적인 이성애 구조 속에 편입될 것이 예측되기 때문에 동인녀들에게는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여기서 윤복-정향의 관계는 야오이 코드가 아니라 여성동성애물 또는 여성동성성애물을 향유하는 백합물 코드를 담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야오이녀는 동인녀와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동인녀는 백합물과 야오이물을 즐기는 계층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고, 좀더 근본적으로는 아마추어 만화지(동인지)를 공동 창작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데서 시작된 말이다).
물론 이 두 작품은 동인물이 아니다. <앤티크>는 전적으로 야오이 영화가 아니고, <바람의 화원>은 백합물이 아니다. 이 두편이 동인녀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 까닭은 그 속의 특정한 인물 관계가 야오이물/백합물에 투영되는 동인녀들의 욕망의 구조를 상당 부분 정확히 반영했기 때문이다. 사실 동인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어떤 텍스트를 동인물로서 ‘필터링’할 때는 작품의 의도는 크게 중요치 않다. 대표적인 예가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2008)과 드라마 <하얀 거탑>(2007) 그리고 영화 <장화, 홍련>(2003)이다. 이들 영화와 드라마는 동성애 또는 야오이 코드를 소재로 삼지 않았음에도 동인문화를 즐기는 여성 계층의 엄청난 성원을 얻었다. <놈놈놈>의 경우 ‘놈놈놈 동맹’이란 이름의 팬픽·팬아트 위주 팬페이지가 생겼고 등장 (남성)인물들 사이에서 온갖 커플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비주얼이 가장 우월한’ 도원(정우성)-창이(이병헌) 커플이 이른바 ‘메이저 커플’로서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하얀 거탑>에서는 애증 섞인 우정과 의리 관계로 묘사되었던 준혁(김명민)-도영(이선균) 두 주인공이 커플로 재탄생했다. <장화, 홍련>은 백합물 팬들에게 무지막지한 사랑을 받았다. 한 백합물 팬은 “이 영화가 한국영화로서는 ‘실사로 보는 백합물’의 거의 첫 작품이란 의의까지 지녔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수연(문근영), 수미(임수정)라는 영화 속 캐릭터보다 배우들 자체가 2차 창작물의 주인공들로 사랑받기도 했다.
이성애 문화에 대한 대안적 욕망으로 작용
하나의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필터링’해 동인물로서 읽어내는 동인녀들의 욕망은 어쨌든 영화와 TV가 진부한 이성애 구조를 탈피해 새로운 소재의 이야기를 시도하고자 하는 열망과 교차점을 만들어낸다. <앤티크>와 <바람의 화원> 제작진이 공통적으로 밝히는 제작 의도는 바로 “새로운 시도”이고, 그 새로운 시도로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것이 동성애다. “다른 사람들에겐 위협적인 요소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도전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성애나 야오이 문화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한 사람이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가정하에 그를 통해 일상을 새롭게 들여다보고 공유할 수 있는 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영화로 산뜻하게 풀면 재미있겠다 생각했다.”(<앤티크> 제작자 이유진 영화사 집 대표)
이성애의 관계망 사이에서도 동성애적 연결고리를 찾아내 환상 세계를 건설하는 이들이, 영화가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동성애 관계에 대해서 (동인문화를 즐기지 않는 이들에 비해) 거부감을 덜 가지리란 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들이 동인물에서 얻는 쾌락과 환상의 기제는 이성애물에서는 얻을 수 없으며, 이를 충족시키기에 훨씬 적합한 것도 퀴어물이다. 물론 동인녀들이 엄밀하게 성정치적인 관점에서 야오이와 퀴어를 구분하고 즐기는 것은 아니고, 특히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좇는 데 있어서는 과할 만큼 완고하기 때문에 이들의 취향은 어떤 면에서는 심하게 보수적이고 왜곡된 측면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중요한 건 이들은 가부장적 틀에 갇힌 이성애 문화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대안적 욕구를 표현하는 계층이란 사실이다. 개봉 당시 각종 독립영화의 흥행 기록을 깨고 최종적으로 전국 관객 4만4천여명을 동원한 이송희일 감독의 퀴어물 <후회하지 않아>도 주관객층이 동인녀였다는 점이 잘 알려져 있다.
제작자인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는 이를 부정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없는 것보다는 낫다. 퀴어물 팬들의 한편이 동인녀라는 것, 실제 동성애자들이 팬으로서 확보되지 못한 측면은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도 개방되어 있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동성애자들끼리 극장 가서 영화보기 꺼려지는 게 이 사회의 분위기라면 이런 사람들(동인녀들)을 밑바탕으로 해서 팬을 늘려나가는 게 맞지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김 대표가 직접 연출한 퀴어 단편 <소년, 소년을 만나다>는 <후회하지 않아>로 일궈진 팬들의 ‘성금’ 700여만원으로 제작됐다. <소년…>은 두 고등학생 소년들의 막 시작되는 사랑을 서정적인 음악과 감각적인 화면으로 담아낸 15분짜리 단편. 김혜성과 이현진, 곱상한 두 남자배우를 캐스팅한 김조광수 감독의 연출 의도는 “심각하지 않은, 밝고 예쁜 퀴어물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동인녀들은 이 영화를 말랑말랑한 야오이물로서 읽어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소재에 대해 폭넓은 수용성을 가진 20대 여성들이 영화제작에 직접적인 동인 역할까지 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들이 실제로 시장에서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하겠는가 하는 점도 어쩌면 소극적인 추측일 수 있다. 영화와 드라마의 주타깃층이 되는 계층, 즉 20대를 중심으로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여성 계층의 일부는 다른 영역에서는 아이돌 가수들을 향해 적극적 팬덤을 형성하면서 자신들만의 팬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최근 2~3년 사이 우리 사회가 주목한 새로운 문화 계층 중 하나가 바로 20대 이모팬 또는 20대 누나팬이다. 아이돌 스타의 소비층이 아닐 거라고 여겨졌던 부류가 사실은 10대 못지않은 적극적 소비 계층으로 크게 자리잡는다는 사실인데, 이 아이돌 팬문화는 팬픽을 통해 남성동성애물 또는 남성동성성애물을 생산·소비한다는 점에서 동인계와 문화적 거리가 매우 가깝다. 또 이 두 계층은 꽃미남 연예인들에게 열광하는 여성관객층과도 통한다. 그러니까 10대 후반~30대 초반 여성을 중심으로 야오이팬층과 아이돌 팬층, 꽃미남에 열광하는 관객층 사이에는 일정 부분 교집합이 존재하면서 느슨하게 서로 연결돼 있으리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더 많은 관객 노린다면 감추는 편이 낫다?
국내 영화시장의 메인 타깃이 야오이 문화와 ‘통’했다고 해도 부정적 인식과 한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영화든 드라마든 제작진 입장에서 야오이 코드 또는 (야오이계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는) 동성애 코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상당 부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코드가 포함됐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제작진들은 “그게 주제는 아니다”라는 측면을 훨씬 강조함으로써 영화의 독특한 성향을 지우고자 한다. <바람의 화원> 제작진인 배익현 SBS 책임프로듀서는 “윤복-정향, 윤복-홍도의 관계는 기존의 이성애적 관념 체계로 본다면 부조리한 관계”라고 설명하면서 “인간이 부조리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목표를 갖고 움직이느냐는 모든 문학 작품을 비롯해 텍스트를 가진 작품이 추구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도 그 점에 초점을 맞춰 보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 홍보마케팅 관계자는 “일부 관객에게는 그 점이 영화 선택의 요인이 될 수 있겠지만 아직은 비호감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대중의 보수성은 어쩔 수 없다고 보고, 넓은 타깃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 점은 감추는 편이 마케팅에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주류영화와 TV는 동성애/야오이 코드를 갈수록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대중은 받아들인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트렌드가 대중에게 좀더 부드럽게 받아들여지도록 완충 작용을 하는 것은 사회에서 가장 오타쿠적인 영역으로 치부되기도 하는 동인계다. 그 문화로 들어가기 위해서 일반인들이 넘어야 할 장벽이 많은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 점은 도리어 동인계가 얼마나 기발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고정 관념과 답습되어온 규칙들을 해체하려는 집단인가를 증명한다. 동인녀들은, 이른바 책상과 걸상이 붙어 있는 광경만 보아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족속이다. 그들의 관점은 상상 이상으로 창의적이다. 마성의 게이와 남장여자 화가쯤은 축에도 끼지 못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