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하늘한 장미 꽃잎으로 뒤덮인 탁자, 붉은빛의 펀치와 고풍스런 유리잔. 드레스를 빼입은 소녀들이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로 핏빛 음료를 홀짝이는 가운데, 어머니들은 립스틱을 들고 딸들의 목덜미에 뱀파이어의 이빨 자국을 그려넣느라 바쁘다. 할로윈은 이미 지나갔건만, 11월20일 목요일 밤 미대륙 곳곳에서는 이처럼 이색적이다 못해 괴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이름하여 ‘트와일라잇 프롬(무도회)’. 영화 <트와일라잇>의 개봉을 축하하는 소녀들의 잔치다. 이미 온라인상에서는 며칠 전부터 ‘트와일라잇 카운트다운’이 이어지던 터. 비밀스런 종교집단처럼 그들만의 의식을 치른 소녀들은 시곗바늘이 자정을 향하는 순간 드레스 자락을 치켜든 채 극장으로 몰려갔다. 일찍 잠자리에 들기 거부한 소녀들의 수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11월20일에서 21일, <트와일라잇>은 개봉 전야인 목요일에서 금요일로 넘어가는 미드나잇 상영으로만 7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비교의 잣대를 제시하자면, <섹스 앤 더 시티>가 미드나잇 상영으로 수확한 액수는 250만달러다). 이때까지도 이 심상찮은 열기는 일시적으로 끓어오른 팬덤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24시간 뒤, <트와일라잇>은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수입 3500만달러라는 기록적인 성적을 올렸다. 소녀들의 환호성을 시큰둥하게 곁눈질하던 할리우드가 휘둥그레 눈을 떴다. 주말 동안 극장가는 소녀들, 아니 여성들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았다. 소녀와 소녀가, 엄마와 딸이, 혹은 엄마와 엄마가 소란스레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극장 앞에 진을 쳤고,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무리는 발을 동동 구르며 돌아섰다. 주말 동안 2천회 이상이 상영관의 문을 열기도 전에 매진됐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신문들은 일제히 <트와일라잇>이 박스오피스 정상을 꿰차며 7천만달러를 긁어들였음을 타전했다. 영화의 총제작비는 할리우드 기준으로 ‘중저예산’급인 3700만달러. 마케팅 비용은 3천만달러. <트와일라잇>은 개봉 첫 3일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섰고, 7천만달러라는 수치는 제작사인 서밋엔터테인먼트가 <트와일라잇> 이전에 제작한 5편의 영화의 수입을 모두 합친 액수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CNN>은 2년 전 <트와일라잇> 제작을 결정했다가 번복한 파라마운트의 임원들이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고 빈정거렸다. 서밋엔터테인먼트는 후속편인 <뉴 문>의 제작을 즉각 선언했다.
‘트와일라이터’들의 종교적인 열성
<트와일라잇>의 폭발적 흥행은 업계의 예측을 뒤집는 것이었다. 영화의 성적을 앞다투어 점치는 할리우드의 전문가들은 <트와일라잇>의 관객층이 10대 소녀들, 그중에서도 일부 열성팬에 한정되어 있으며, 주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기엔 역부족이라고 입을 모았었다. <뉴욕타임스>는 “박스오피스 분석가들은 이 영화가 운이 아주 좋아야 6천만달러 정도 수입을 올릴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 빗나간 점괘를 되짚으며, <트와일라잇>의 성공이 예상 밖의 것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트와일라잇>을 둘러싼 열기는 어쩌면, 할리우드 분석가 집단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폭발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현재까지 시리즈 4권이 출간된 스테파니 메이어의 원작 소설은 전세계적으로 1700만부가 판매됐고,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신드롬을 조성하던 차였다.
이른바 자신을 “트와일라이터”(twilighter)로 명명한 팬들은 온라인 사이트를 중심으로 가히 종교적인 열성을 불태웠다. 소설의 이야기를 개작한 ‘팬픽’이 거미줄처럼 뻗어나갔고, 스테파니 메이어는 “제2의 J. K. 롤링”이라는 꼬리표를 얻었으며, 그녀가 참석하는 행사에는 수천명의 팬들이 운집해 서점을 콘서트장의 풍경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트와일라잇>을 테마로 한 록밴드들이 탄생했다. 과연 무엇이 이들을 그토록 열광하게 만든 것일까. 흡혈을 거부하는 뱀파이어 소년과 한 인간 소녀의 사랑. <트와일라잇>의 이야기는 고등학생인 벨라의 시선을 통해 전개된다.
또래 여자아이들보다 한층 조숙하고 감수성이 예민하게 벼려진 소녀. 무리에 동화되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나 무리를 관찰하는 소녀 벨라는 이혼한 어머니와 결별해 악천후로 악명 높은 작은 마을로 떠나온다. 지역 경찰관인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벨라는 전학 온 학교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한 무리의 학생들을 발견한다. 백짓장처럼 창백한 안색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이들은 “컬런”가의 형제 자매들로 언제나 다른 학생들과 섞이지 않은 채 도도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가 흠모하는 교내의 인기인인 동시에 누구도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는 이방인이다. 벨라는 그중에서도 전학 첫날부터 자신을 향해 이해할 수 없는 적의를 뿜어내는 에드워드에게 호기심과 분노, 매혹이 뒤섞인 감정을 느낀다. 대체, 왜, 그는 나를 이토록 혐오하는 것일까. 초조하게 에드워드의 그림자를 좇던 벨라는 곧 자신의 의문에 상상치 못했던 해답을 발견한다.
“송곳니와 관은 절대 등장시키지 말라”
<13살의 반란>(2003)으로 선댄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여성감독 캐서린 하드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는 원작 소설을 순도 100%에 가까운 충성스러움으로 스크린에 재현했다. 장르 팬들에게는 다소 불경하게도 뱀파이어물에 대해 딱히 각별한 애정을 가져본 적 없으며, 그저 어느 날 잊을 수 없는 꿈을 꾼 뒤 컴퓨터 앞에 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스테파니 메이어는 장르 소설이라기보다는 <로미오와 줄리엣>풍의 고전적이며 지고지순한 로맨스를 완성했다. 에드워드의 차가운 태도는 사실 벨라에 대한 통제할 수 없는 강렬한 매혹에서 비롯된 것. 그녀의 존재가 그에게는 마약처럼 중독적인 것이기에, 에드워드는 뱀파이어로서의 본능과 자신을 제어하려는 이성, 벨라에 대한 욕망과 애정 사이에서 고투한다.
피비린내를 최소한으로 억제한 영화는 소년, 소녀의 아슬아슬한 로맨스에 러닝타임의 대다수를 헌납했다(스테파니 메이어가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영화에 결코 “송곳니와 관”이 등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로맨스란 쉽사리 입술을 부딪치고 몸을 뒤섞는 성인의 것이 아닌, 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졸아들고 심장이 녹아내리는 사춘기적 떨림이다.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우아하게 시선을 낚아채는 그 아이의 몸짓, 교내 식당 맞은편에 앉아 들킬 듯 말 듯 서로를 탐색하는 눈빛, 한 책상에 나란히 앉았을 때 어깨 너머로 느껴지는 서로의 존재감, 손끝이 살짝 스칠 때의 짜릿한 두근거림. 카메라는 초인적 능력을 갖춘 뱀파이어들의 현란한 몸놀림을 예찬하기보다는 놀라울 정도로 고요하게, 아름다운 두 소년 소녀의 얼굴을 탐식하며 미묘한 매혹의 순간들을 포착한다.
소년이 뱀파이어라는 설정은 이 풋풋한 로맨스의 긴장감을 더욱 극적으로 조각하는 장치다. 통제의 끈을 놓는 순간 관계는 파멸을 맞이하기에, 소년 소녀의 욕망은 언제나 폭발하기 직전의, 벼랑 끝의 상태에서 위험하게 휘청거린다. 단 한번의 키스가 곧 죽음으로 이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얼굴을 마주한 채 가쁜 숨을 교환하는 어린 연인들. 그 입술 끝에 팽팽하게 당겨진 떨림의 농도는 아찔할 정도다. 영화 상영 내내 극장이 기절하기 직전의 애절한 한숨과 탄성으로 가득했음은 놀랍지 않다. 블로그를 연쇄적인 댓글로 장식한 소녀 팬들의 관람평은 대부분 “숨조차 쉴 수 없었어요”,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OMG OMG”(“Oh my god”의 웹용 축약어)류의 뜨거운 고백으로 채색됐다. <뉴요커>의 표현을 빌리자면 “섹스보다 더욱 섹시한”, 이 어린 연인들의 로맨스는 순수의 농도를 극단으로 응축해 짙은 관능을 이끌어냈다.
<트와일라잇>은 또한, 소녀들의 가슴속에 꿈처럼 존재할 100%의 남자아이에 대한 연가이기도 하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에드워드 컬런을 “로미오, 히드클리프, 제임스 딘과 브래드 피트가 하나로 결합된” 캐릭터라고 표현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호흡 곤란을 유발하는 치명적 미모의, 영원히 늙지 않은 채 열일곱의 젊음을 간직한, 누구에게도 쉽사리 가슴을 열지 않되 오직 나에게만 심장을 허락한, 그리고 나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인 그 남자아이. 에드워드 컬런을 연기한 로버트 패티슨이 소녀들의 아이돌로 등극한 것은 물론이다. 패티슨이 등장하는 행사장에는 그의 그림자라도 밟고자 구름떼처럼 몰려든 소녀들이 그에게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달라고 애걸했으며,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해 격렬한 몸싸움을 벌인 탓에 한 행사장에서는 코가 부러진 부상자가 나왔으며, 샌프란시스코의 한 쇼핑몰은 새벽 5시부터 문 밖에 늘어서기 시작한 인파에 지레 질려 아예 행사를 취소하는 촌극을 벌였다.
어머니와 딸 관객을 동시에 사로잡다
<타임>은 <트와일라잇> 신드롬을 “소녀들의 영화 에스트로겐의 첫 번째 폭발”(girls’ first blast of movie estrogen)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트와일라잇>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10대 소녀들 이상의 관객층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트와일라잇>의 지지층을 탄탄하게 다지는 것은 성인 여성, 그중에서도 흥미롭게도 “어머니” 관객이다. 미국의 온라인 예매 사이트 ‘판당고’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트와일라잇>의 관객 중 절반이 25살 이상이며, 25%는 어머니와 딸 관객으로 드러났다. <트와일라잇>의 팬덤을 견인하는 대표적 웹사이트는 이른바 “트와일라잇 엄마들”(twilightmoms.com). <트와일라잇>에 혼을 빼앗긴 중년 여성들의 한숨어린 애정 고백(“다시 10대가 되어버린 것 같아요!”)으로 가득한 이 사이트는 다음과 같은 모종의 성명을 대문에 내걸고 있다. “<트와일라잇> 때문에 삶이 거꾸로 뒤집힌 사람이 당신 혼자라고 생각하세요? 밀린 빨래 더미와 더러운 접시가 기록적으로 쌓여서 당신의 집이 재앙 수준에 이르렀나요? 당신의 남편이 뱀파이어라고 상상하고, 갑자기 신혼 시절의 욕망을 되찾은 적 있나요? … 좋은 소식이 있어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트와일라잇 현상”(Twilight Phenomenon)이라는 용어가 탄생했을 정도로 미국 전역을 뜨겁게 달구는 신드롬. 애타는 한숨과 고음의 비명으로 부글대는 이 신드롬은 올해 <섹스 앤 더 시티> <맘마미아!> <하이스쿨 뮤지컬: 졸업반>으로 이어지며 재차 흥행을 견인했던 여성 관객의 존재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개봉 첫주 <트와일라잇> 관객의 여성 비율은 무려 75%. <AP통신>은 <트와일라잇>을 “새로운 종류의 칙 플릭”(the new breed of chick flick)이라고 명명했고, <타임>은 새로운 “여성 프랜차이즈”(femme franchise)의 가능성을 내다봤다. 뱀파이어 옷을 두른 “왕자님”으로부터 보호받는 벨라가 여성 캐릭터의 퇴화라는 비판 또한 고개를 들지만, <트와일라잇>이 여성 관객층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이미 지겹도록 재탕된 신데렐라 판타지 때문이라기보다는 누구나 한번쯤은 앓았을 풋사랑의 열병을, 그 보드라운 매혹의 순간을 현미경으로 확대해 여성의 감수성을 공략하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존재가 세상의 전부인 달콤한 맹목, 미처 개화하기 이전 순수의 상태에서 존재하는 가슴 시린 떨림. 여성 작가의, 여성 감독에 의한, 그리고 여성 관객이 선택한 <트와일라잇>은 코믹스에서 튀어나온 슈퍼히어로들이 휘저었던 할리우드에 이제껏 본 적 없던, 세대를 초월한 뜨거운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사실. 교복과 앞치마를 걷어올린 ‘팬걸’들의, 목청을 보살피지 않는 맹렬한 함성은 가뿐히, 팬보이를 압도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