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9년, 4편의 신작 구상] 3. 변영주 감독의 <화차>(가제)
2009-04-07
글 : 문석
사진 : 오계옥

욕망의 윤리학을 새로 쓴다

2004년 말 <발레교습소>를 개봉한 뒤 변영주 감독은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직접적으로는 <발레교습소>의 흥행 실패 탓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2005년 <낮은 목소리> 1편을 개봉하고 10년 동안 5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낮은 목소리> 3부작 이후 그는 <밀애>와 <발레교습소>를 통해 당대의 공기와 사람들을 포착해 보여주는 상업영화를 만들려 했지만 그의 판단으론 실패의 연속이었다. “상업영화를 만들었는데 기껏 받은 칭찬이 ‘진정성은 있다’는 것이라면 뭔가 큰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전환점이 필요했다. 10년 만의 ‘휴가’는 그렇게 시작됐다.

반성과 새 출발을 위한 1년여의 시간 동안 변영주 감독이 가장 힘을 많이 쏟은 건 미셸 우엘벡, 척 팔라닉, 히가시노 게이고, 오쿠다 히데오 등의 소설을 읽는 일이었다. “일본과 미국의 다양한 장르소설을 보면서 이들 작품이 당대의 사회를 읽어내는 첨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동시대성을 치밀하게 담아낸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그에게 이들 소설은 탈출구로 보였다. 특히 긴장과 공포의 성 위에 사회의 음습한 그림자를 드리워냈을 뿐 아니라 여성의 내면까지 세심하게 묘사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술피리 오기민 대표가 미야베의 <화차> 영화화 판권을 확보했다는 소식이 반가웠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는 십수년 동안 친하게 지내온 오 대표를 찾아가 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적극적인 의사를 표현했다. 오 대표 또한 변 감독을 염두에 두던 터였기에 의기투합은 쉽게 이뤄졌다.

원작의 시공간을 2009년 한국으로 변주

변영주 감독이 만들게 되는 영화판 <화차>(가제)는 원작의 핵심을 살리되 동시대성을 살리기 위해 약간 변주될 전망이다. 한 여성이 갑자기 사라진 뒤 수수께끼에 싸인 그녀의 정체를 밝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1992년 일본이라는 원작의 시공간을 2009년 한국이라는 좌표 안으로 가져오겠다는 이야기다. 한국영화 버전 <화차>의 주인공은 부잣집 아들 문호다. 그는 선영이라는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 사랑을 싹틔우지만, 그의 부모는 고아인데다 가난한 선영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문호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영과 결혼까지 약속하지만 어느 날 선영이 연기처럼 사라지면서 불길함에 휩싸인다. 그는 전직 경찰 종근과 함께 선영의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음험한 진실의 동굴 속으로 빠져든다. 알고 보니 문호가 찾고 있던 그녀는 선영의 신분만 빌렸을 뿐, 사실은 경선이라는 이름의 다른 여자였기 때문이다. 경선은 아버지의 빚 때문에 빚쟁이들에게 협박당하는 피곤한 삶을 살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곤 선영 행세를 해왔다. 하지만 선영 또한 신용카드 빚 때문에 개인파산 상태란 사실을 알게 된 경선은 또 다른 범죄를 꾀하고 있었던 것.

큰 줄거리만 놓고 보면 영화와 소설의 차이는 크지 않아 보인다. 형사 혼마의 1인칭 시점으로 풀어간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약혼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정도뿐 선영에 대한 경선의 범죄(소설 속에서는 신조 교코가 세키네 쇼코로 위장한다)라든가 두 여성 모두 신용과 관련된 문제를 겪고 있다는 점 등은 거의 같다. <화차>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2000년대 중반, 많은 독자들이 ‘1990년대 초 일본과 지금의 한국이 어찌 이리 똑같냐’고 말했을 정도니 그 유사성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변영주 감독은 “문제는 현상이 아니라 화법”이라면서 차별성을 강조한다. “소설의 화법은 1990년대 일본을 반영한다. 한국으로 치면 IMF 사태 이후 2000대 초와 비슷하다. 하지만 지금은 2009년이다. 당시의 욕망과 지금의 욕망이 다르니 화법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소설 <화차>가 많은 사람들이 신용카드와 사금융의 덫에 빠졌던 당시 상황을 반영해 그 책임이 개인의 무능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면, 영화 <화차>는 지금 한국사회를 반영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변 감독은 “당시의 욕망이 말 그대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욕망은 좀 다른 차원”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를 위해 20대 ‘구찌족’ 여성도 많이 만났다는 그는 “지금 시대에서 누군가가 명품 가방을 갖기 위해서, 또는 최신형 휴대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건 과연 정신나간 짓일까? 혹시 그건 그들의 생존과 직결된 것은 아닐까?”라면서 이 영화를 통해 던지고자 하는 화두를 제시한다. “욕망의 윤리학을 새로 쓰고 싶다”는 변영주 감독의 이야기는 그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장르 통한 상업영화 재발견 꿈꾼다

그 스스로도 “그동안 만들었던 영화 중 가장 무거울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화차>가 사회성만을 두드러지게 내세우지는 않을 듯하다. 처음으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에 속하는 영화를 만들게 되는 변영주 감독은 이 영화가 “볼 때는 빨려들어가지만, 되씹었을 때 무서웠으면 좋겠고, 곱씹었을 때 이 사회의 끔찍함이 느껴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한 여인의 정체를 파헤치는 두 남자의 이야기라는 플롯과 비정한 세상에서 생존하고자 발버둥치는 경선이라는 캐릭터에서 유발되는 흥미로 승부수를 던지겠다는 말이다. 그러한 상업영화로서의 틀이 완성적일 때 당대성 혹은 동시대성 또한 제대로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달음으로 간직하는 듯했다. 만약 그 도전이 성공한다면, <화차>는 변영주 감독으로 하여금 장르를 통해 상업영화를 재발견하게 해준 작품이 될 것이다.

비장의 무기! 촬영감독을 찾아라

<화차>는 현재 시나리오 마무리 단계이기 때문에 변영주 감독이 “인생의 동지들”이라고 말하는 신혜은 프로듀서, 조영욱 음악감독, 박곡지 편집기사 말고는 배우와 스탭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변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비장의 무기로 내세울 요소는 숏의 리듬이다. 평이한 내러티브에 의존해왔던 기존 영화들과 달리 이번 영화에서는 컷과 컷의 배치와 그 음악적 호흡을 결정적 승부수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영화의 기본구조에서 비롯된다. 두 남자가 경선의 행방을 찾는 현재 시점은 그리 길지 않은 것으로 설정된데다 경선의 또 다른 범죄가 준비되기에 매우 긴박하다. 문제는 그 안에 경선과 선영의 과거 장면들이 배치돼야 한다는 점. 자칫하면 긴장을 떨어뜨릴 수 있는 탓에 변영주 감독은 이를 숏의 리듬을 통해 극복할 생각이다. “숏의 리듬과 내러티브의 리듬을 일치시켜보고 싶다. 현재와 과거가 겹치기도 하고, 현재의 보이스에 과거 장면이 보이기도, 과거의 보이스에 현재 장면이 보이기도 할 것이다. 다소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리듬으로 바꿔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또 하나의 요소가 해결돼야 한다. 촬영 또한 리듬감을 부여하는 방향에 부합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동안 신인급 촬영감독과 함께했던 변영주 감독은 “<낮은 목소리> 시리즈에선 내가 카메라를 들었던 탓에 다른 이의 시선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면서 아쉬워하고 있다. 스테디캠과 달리 촬영을 통해 일정한 리듬감을 부여하고자 하는 그는 이번 영화도 중요하지만 “이번 기회에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상승효과를 낼 수 있는 촬영감독을 만나고 싶다”고 말한다. 만약 그가 변 감독의 ‘네 번째 동지’가 된다면 이 또한 <화차>의 ‘비장의 무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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