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내내 무서운 영화로
솔직히 어울리지 않는다. <실미도>와 <공공의 적>의 강우석 감독이 만화가 윤태호의 웹툰 <이끼>를 연출한다는 소식은 언뜻 농담처럼 들렸다. <이끼>의 팬들도 <이끼>를 연출할 최적의 감독 리스트에 강우석을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야기와 감정을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그의 영화적 스타일과 눈빛만으로 더러운 기분을 느끼게 만들고 끊어진 필라멘트의 섬광으로 피부의 잔털들을 서게 만드는 <이끼>의 정서는 서로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강우석 본인도 세간의 시선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당연히 알지. 네티즌은 당장 감독 바꾸라고 한다며?” (웃음) 그럼에도 강우석 감독은 지금 <이끼>를 준비한다. 그의 영화적 이력에서 볼 때, <이끼>는 자칫 무모한 도전으로 기록될지 모를 프로젝트다. 물론 강우석은 바꿔서 말한다. “그런 만큼 정말 잘 만들면 두배의 찬사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시나리오는 정지우 감독이 집필 중
강우석 감독은 원래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만화를 원작으로 영화를 만드는 작업을 경계한다. “만화는 사람을 잘 속인다. 그림이기 때문에 일단 멋있거든, 그런데 막상 영화로 옮기려고 하면 말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 시네마서비스로 <이끼>의 투자 의뢰가 왔을 때, 강우석 감독이 굳이 <이끼>의 만화책을 읽었던 이유도 사실 “거절하기 위해서”였다. 투자 의뢰를 한 렛츠필름의 김순호 대표가 과거 자신의 제작부원이었던 터라 거절을 하더라도 읽고서 거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끼>는 그가 기존에 본 만화와 달랐다. 매우 영화적이었다. 만화에 담긴 스릴과 긴장이 한국적이었다. 결국 강우석 감독은 감독 선정에 관여하는 것을 조건으로 투자를 결정했다. 이미 <이끼>에 관심을 갖던 감독들은 상당했지만 그의 기준으로 볼 때 진짜 임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감독은 지금 만들고 있는 영화를 끝낸 뒤에야 참여할 수 있었고, 또 어떤 감독은 다른 영화사에서 만들고 싶어했다. 무엇보다 강우석 감독은 <이끼>가 “예술영화적이거나 영상적으로 풀기보다는 상업적인 감각을 지닌 연출자”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다른 감독들을 퇴짜 놓는 이유가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닌가 싶더라.” 만화를 좋아하지 않던 영화감독이 만화를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이미 알려진 대로 <이끼>의 시나리오는 현재 정지우 감독이 집필 중이다. 초고가 나오기 전까지는 강우석 감독도 아무런 주문을 하지 않고 있다. 단 하나 주문한 것은 “지우 네가 연출하고 싶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써라”였다. 물론 원작의 중요 인물들은 영화에도 고스란히 등장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갈 인물은 죽은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어느 시골 마을로 찾아간 류해국이다. 도시에서 생활하다가 사소한 누명에 휘말린 그는 명예를 회복하려다 직장에서 잘리고 아내에게 이혼당했으며 앞길이 창창했던 검사 박만욱을 좌천시켰다. 그가 이 시골 마을로 들어온 이유는 “의심하고 확인하려 하고 아니다 싶으면 늑대처럼 물어대는 더러운 근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이장 천용덕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그의 정착을 반기지 않는다. 말 못할 비밀을 감춘 듯한 마을 사람들의 눈빛과 아버지의 죽음을 놓고 음모의 가능성을 직감한 류해국은 이때부터 집요한 분석과 추리를 시작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 또한 천용덕의 지시 아래 류해국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
강우석 감독이 생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원작대로 가는 것이다. 만화 <이끼>는 아직 연재가 완료되지 않았지만, 원작의 결론이 좋아도 대안을 만드는 게 현재 방침이다. “만화의 팬들이 원작의 결론을 좋아한다면 그것보다 조금만 앞서가도 성공적인 시나리오가 될 거다.” 물론 원작에 묘사된 천용덕 이장의 전사와 류해국-박만욱의 관계는 영화 <이끼>에서도 중요한 테마다. “이장의 과거사가 정말 좋더라. 약간 우화적인 느낌은 있지만, 그가 사람들을 데리고 산으로 끌고 간다는 설정은 실제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일이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강우석의 야심은 서로에게 가해를 하는 인물들의 행동과 표정 연출에 승부를 거는 것이다. “인물들이 가진 이상한 내면을 끌어내는 게 목표다. 광기라고 할까. 별것 아닌 상황에서도 관객을 긴장시키는 광기를 드러낼 수 있으면 억지로 무섭게 하려 하지 않아도 보는 내내 무서운 영화가 나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것”
그의 야심을 그의 전작들에서 찾아내는 건 여전히 쉽지 않다. 아마도 가장 근접한 영화는 인물들이 서로 물고 뜯어대는 긴장을 뽑아낸 <공공의 적>일 것이다. 본인은 <미스틱 리버>나 <요람을 흔드는 손> <바늘구멍> 같은 스릴러물에 대한 애정이 깊다고 하지만,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란 정치스릴러를 연출하기도 했지만, 그렇다 해도 강우석에게 <이끼>는 새로운 도전이다.
“물론 나한테 그런 장기가 있다는 걸 검증해보는 작품인 건 맞다. 하지만 이전에도 나는 장르를 가리기보다는 이야기에 맞게 연출하려 했다. <공공의 적> 1편 때 사람들은 강우석이 변했다고 했지만, 사실 난 변한 게 없었다. 단지 영화에 맞는 방법을 찾은 것뿐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이끼>에 맞는 연출톤을 찾고 있다. “강우석에게는 없는 감성을 지닌” 정지우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맡긴 건 가장 중요한 전략이다. 또한 미술과 촬영에 공을 들이기보다는 드라마적인 연출에 힘을 기울인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입체감을 살리는 방향으로 시간과 물량을 투입할 예정이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게 될 것 같다. 내 눈에 괜찮아 보여도 다른 스탭들이 지적하면 최대한 욕심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끼>가 강우석 감독의 성공적인 도전이 될지, 무모한 도전이 될지는 오는 겨울에 판가름날 것이다.
비장의 무기! 화들짝 놀랄 캐스팅 계획 중
<이끼>의 캐스팅은 아직 보류 중이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네티즌은 <이끼>를 놓고 가상캐스팅을 하고 있다. 원작이 만화이다 보니 캐릭터의 생김새와 비슷한 배우들을 꼽아보는 건 소설보다 수월할 것이다. 현재 네티즌 사이에서 류해국 역에 꼽히는 배우는 박해일과 이준기, 김상경 등이다. 원작에서 가장 특이한 생김새로 그려진 천용덕은 변희봉과 최주봉이 대세로 기울고 있다. 강우석 감독도 네티즌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도 “절대 그렇게 캐스팅하지 않겠다”고 못박는다.
그는 일단 파격적인 캐스팅을 생각한다. 톱스타를 기용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전형적이지 않은 캐스팅을 하겠다는 뜻이다. “만약 그 배우들과 함께한다면 아예 다른 이미지의 캐릭터를 맡겨야 하지 않을까? 특히 이 영화는 관객이 기대할 만한 캐스팅으로 가면 끝장이다. 원작을 아는 관객이 포스터를 봤을 때, 일단 화들짝 놀랄 수 있어야 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대머리와 번뜩이는 눈동자, 좁은 턱 대신 반듯한 외모를 가진 미중년의 천용덕 이장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