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9년, 4편의 신작 구상] 4. 류승완 감독의 <내가 집행한다>
2009-04-07
글·사진 : 이영진

절대 주먹의 하드보일드

류승완 감독은 흘러, 넘친다. 쥐어짜는 스타일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까진 그랬다. 그는 <아라한 장풍대작전>(2004) 후반작업을 진행하면서 <주먹이 운다>(2005)의 프리 프로덕션을 동시에 진행했다. ‘컷’ 소리에 모두가 탈진했던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새벽 현장. 인천 부둣가를 바라보면서 그는 충혈된 눈으로 도시의 마천루를 날아다니는 마루치, 아라치(<아라한 장풍대작전>)를 상상했다. <내가 집행한다>의 얼개가 불쑥 떠올랐던 때도 다르지 않다. <다찌마와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8)의 촬영이 잠시 지연되는 틈을 타 그는 ‘쓱싹’ 시나리오를 써내렸다. “다들 알고 있지 않나. 알프스 로케이션을 앞두고 스위스 비자가 안 나와서 얼마간 쉬었다는 거. (웃음)”

농담으로 버무린 탄생 비화, 하지만 <내가 집행한다>에 ‘키득거림’ 따윈 없다. 감옥에서 갓 출소한 남자는 웃지 않는다. 그의 심장은 ‘분노’라는 두 글자에만 박동한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여동생의 죽음을 뒤쫓는 그는 무자비한 ‘1인 자경단(自警團)’이다.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여동생, 그리고 그녀가 사고 당시 입고 있던 블라우스 단추가 떨어져 있음을 경찰 증거사진에서 우연히 발견한 남자. 그는 법에 호소하지만, 법은 그를 외면한다. 남자는 여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누군가’를 추적하고, 대신 옥살이를 하는 동안 누이를 보호해주겠다고 했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은 동료들을 응징한다. 죄책감은 침묵으로, 침묵은 분노로, 분노는 폭력으로, 폭력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진다. 남자는 ‘절대’ 집행자다.

주인공 캐스팅에 고심

남자가 극단을 주저없이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류승완 감독이 괴물 아닌 괴물을 세상에 내놓은 이유는 뭘까. 시나리오 작업을 끝낸 뒤 홍콩 필름마트를 찾은 그는 “이번에 나오는 악당들은 모두 영어 쓰는 백인들”이라고 귀띔한다. “영화에 실제로 투영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집행한다>의 출발은 적잖은 사회적 배경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류 감독은 “지난해에도 한국 여성들을 포섭해서 마약을 밀반출했던 프랭크라는 이름의 나이지리아 국제마약조직이 있었다”면서 “그 이전에 효순, 미선 장갑차 사고라든지, 더 거슬러 90년대 초 윤금이 사건이라든지, 모두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유의 사건들은 가해자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안다. 그런데 모두들 속수무책이다. 그런 갑갑함이 무의식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고 그는 덧붙인다.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하드보일드 히어로는 그렇게 태어났다. “(범죄소설 작가인) 미키 스필레인을 좋아한다. 제목도 그의 소설 <내가 심판한다>(I, the Jury)에서 뉘앙스를 따왔다” <내가 집행한다>의 남자는 어쩌면 미키 스필레인이 창조한 사설탐정 마이크 해머와 닮았을 것이다. “1960, 70년대 할리우드 범죄물에도 그런 남자들이 나온다. <겟 카터>(1971)의 마이클 케인이나 <포인트 블랭크>(1967)의 리 마빈이 있고. <미스터 마제스틱>(1971)의 찰스 브론슨도 좋고. 그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답변을 얻기 위해서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집행한다>의 남자도 그만큼 과묵하다. 지금까지 내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중 가장 말수가 적다. 하지만 동시에 극 장악력은 가장 크다.”

<내가 집행한다>의 캐스팅 향방은 그래서 더욱 궁금하다. “말수는 적지만 오히려 침묵하는 순간에 관객의 감정을 들끓게 만들 수 있는” 배우여야 하며, “풀숏으로 찍어도 화면을 꽉 채운 클로즈업의 느낌을 전할 수 있는” 배우여야 한다. “영화 속 남자는 사실 막장으로 치달을 수 있는 유혹이 굉장히 많은 인물이다. 그런데 여동생 때문에 최악으로 안 갔다. 그 남자에게 여동생은 아킬레스건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 약점이 사라지자 동시에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유년 시절 가족에 대한 내 공포 혹은 억압과도 무관하지 않은 캐릭터다.” ‘아이러니한’ 생의 굴곡까지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소화할 배우는 그렇다면 누구일까. “임원희가 없었다면 <다찌마와리…>가 가능했겠나. 이번 영화에서 주연배우는 그 이상이다. F4 중 한명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웃음)”

“이번엔 ‘원본’을 만들고 싶다”

인터뷰 내내 류승완 감독은 말을 아꼈다. 영화에 관한 ‘썰’이라면, 그는 언제나 거품 무는 변사였다. 그런데 <내가 집행한다>를 두고선 홀로 남은 남자의 뒷모습을 되풀이해서 이야기했고, 그저 ‘단순하고, 무식하고, 과격한’ 영화라고 여러 번 눙쳤다. ‘엉뚱한, 예상치 않은’ 결말을 숨기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뭐 달라질 게 있겠나. 영화 제목이 ‘내가 사랑한다’였다면 변신이라고 할지 몰라도. 다만 컨셉만 있는 영화는 아니다. 전에는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떡밥을 던져놓고 정작 책임을 안 졌다. 무심코 잽을 뻗었는데 굉장한 힘을 발휘하는 영화를 하고 싶다. 또 하나는 과거에는 ‘유사 복제품’을 만들면서 쾌락을 느꼈지만 이번엔 ‘원본’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취향이야 그대로 남아 있겠지만.”

비장의 무기! 날것으로 가득한 액션

류승완 감독의 머릿속 액션 설계도가 궁금한가. 분명한 정보 하나. <짝패>에서 선보인 ‘540도 회축’ 발차기는 절대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40도 정도 발차기는 할 줄 안다. (웃음) 스타일리시하곤 거리가 멀지. 상대의 아픈 곳만 계속 때리니까. 한대 맞으면 죽을 것 같은 급소만 골라서 때린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후 그는 언제나 이야기와 동시에 액션 컨셉을 떠올렸다. <내가 집행한다>는 다르다. 액션 구상은 모두 뒤로 미뤘다. 시나리오를 고쳐 쓰면서도 액션장면에 대한 배려는 떨구고, 인물의 감정에 집중했다. “남자가 왜 싸우는지 설득하는 것만으론 곤란하다. 남자가 싸울 때 응원할 수 있어야 한다. 관객이 인물에 몰입해야 가능하다. 화려하고 우아한 액션을 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내가 집행한다>의 목표는 그러니까, 나쁜 놈을 폼나게 두드리는 게 아니라 ‘통쾌하게’ 끝장내는 것이다. “또 인용하면 나중에 또 욕 먹는데. (웃음) 언제서부턴가 단순한 이야기에 끌린다. <더티 하리>는 성질 더러운 경찰관이 나쁜 놈 잡는다, <불리트>는 형사가 폭력에 중독된다, <겟 카터>는 ‘누가 우리 형 죽였어?’, <포인트 블랭크>는 ‘내 돈 어딨어’ 아닌가. 그리고 로버트 알드리치의 <국경의 제왕>. 기차 무임승차 잘하는 놈과 무임승차 제일 잘 잡는 승무원의 대결이 전부다. 그런데 그걸 전부라고 말할 수 있나?” 이전엔 ‘펑크(punc)만 냈다’면서 이번엔 펑크(punk)처럼 ‘지르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그는 정제되지 않은, “날것으로 가득한”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첫 마음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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