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은 네 번째 장편 <마더>를 2004년부터 구상했다. 배우 김혜자에 대한 구애도 동시에 시작됐다. <괴물>과 <흔들리는 도쿄>를 완성하는 동안 박은교 작가와 번갈아 띄엄띄엄 진척시킨 <마더>의 시나리오를, 감독이 2007년 10월부터 2008년 3월까지 붙들고 마무리했다. 2008년 4월6일 착수한 프리 프로덕션을 거쳐 같은 해 9월27일 개시된 촬영은 2009년 2월14일에 끝났다. 그로부터 정확히 한달이 편집에 소요됐고, 3월18일부터 28일까지 후시녹음(ADR)이 진행됐다. 디지털 색보정은 4월19일에,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믹싱 작업은 4월25일 최종 완료됐다. <마더>는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오는 5월16일 월드 프리미어를 가진 뒤 5월28일 국내 개봉한다. <씨네21>은 3월19일과 3월26일 두 차례 서울 대치동 라이브톤 스튜디오 후시녹음실을 찾았다. 다음은 <마더>의 실체와 마주치기 전, 가까스로 엿보고 봉준호 감독에게 캐물은 퍼즐의 조각들이다.
puzzle 01. 숭고한 모성의 이면을 들추다
녹음실행 버스를 타고 검푸른 한강을 건너며 생각했다. 엄마, 그 아름답고 진부한 이름. 세상에 엄마에 관한 이야기가 부족해서, 가족을 논하는 사설이 모자라서, 봉준호 감독이 <마더>를 만들었을까? 그는 언제나처럼 지하에, 물밑에 숨어 있는 것을 보았으리라. 문화가 은폐하거나 너무 깊이 묻혀 쉽게 노출되지 않는 모성의 어떤 부위에 닿고 싶었을 것이다. <살인의 추억>의 형사가 살해된 소녀들의 죽음에 미친 듯이 분노할 때, <괴물>의 박강두가 떠돌이 소년을 거두어 먹일 때 봉준호는 오히려 피로 맺어지지 않은 ‘가족’에 매혹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마더>는 그럼에도 그가 떨칠 수 없었던 육중한 반명제, 그 징한 혈연이라는 심연과 대결하는 스스로 강제한 고행이 아닐까.
봉준호 감독의 HINT
“모정은 사랑의 최고 형태로 항상 절대화된다. 물론 모성은 숭고하다. 그러나 숭고에는 이면이 있다. 아름다운 바위도 뒤집어 들추면 시커멓고 축축한 흙에 처박힌 면이 드러나고 벌레들이 우글거릴 수 있는 것처럼 숭고를 살짝 뒤집으면 순식간에 어둠과 광기에 도달할 수도 있다. 모자 관계는 가족 내에 형성되는 네벌의 관계- 모자, 부녀, 모녀, 부자- 중 특별하다. 네 관계 중 두 세트가 이성의 조합인데, 부녀 관계는 아버지에게서 나온 정자로 매개되니까 어딘가 간접적인 반면에 엄마는 아들과 몸 안에서 본디 합쳐져 있었던, 신체적으로 독보적인 관계다. 섹스가 페니스가 자궁으로 들어오는 행위라면 모자 관계에서는 아들의 몸 전체가 엄마의 몸 안에 있었던 것이다.”
puzzle 02. 로컬리티가 스륵 녹아 없어진 장소
3월19일 오후 4시. 후시녹음 이틀째다. 촬영현장에서 헤어졌다가 한달 만에 재회한 스탭들은 몰라보게 말끔해진 서로의 모습에 농담을 주고받는다. 오늘은 아들 도준 역의 원빈이 녹음을 하는 날. 갈색 티셔츠에 헐렁한 청바지를 걸친 그가 마이크와 단둘이 어둠 속에 서 있다. 굳게 잠긴 스튜디오의 원형 창으로 까치발을 세워 들여다보니, 형사 제문(윤제문)이 살인 혐의를 쓴 도준을 검거하는 장면이다. 도준은 넋을 놓았고 엄마 혜자(김혜자)는 믿기 힘든 속도로 경찰차를 뒤쫓아 달리고 있다. 소도시의 냄새가 슬쩍 섞인 농촌의 흔한 읍내 풍경. 잠시 한숨을 돌리러 휴게실로 나온 원빈에게 방금 녹음한 장면의 촬영지에 관해 물었다. “시골스러움의 정도가 고향 정선과 비슷한 장소였어요. 저는 로케이션 촬영이 세트보다 편했어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그의 가족은 여전히 정선에서 산다. 시선을 끄는 운명을 타고난 이 배우는 아직도 붐비고 번잡한 장소에서 시무룩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파티나 레드카펫이 깔린 장소에서 찍힌 원빈의 사진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봉 감독도 지방으로 야외 촬영을 가서 논밭에 풀어놓으면 훨씬 자유로워 보이는 배우라는 데에 동의한다.
봉준호 감독의 HINT
“<마더>의 마을은 지방 중소도시와 완전 농촌이 자연스럽게 뒤엉킨 곳이길 원했다. 엄마와 아들에게 강하게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에 사투리나 풍광의 지역색은 무화시키고 싶었다. <살인의 추억>의 경우 화성이라는 지명은 언급하지 않았어도 80년대 공기를 환기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마더>는 혜자와 도준을 제외한 모든 요소가 되도록 한발 뒤에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취향상 인위적인 세트나 우화적 공간을 지을 수는 없고, 사실적이되 저곳이 전라도인지 강원도인지 심증 자체가 가지 않도록 로컬리티가 스륵 녹아 없어진 장소를 원했다. 말은 쉽지만 실제 헌팅 작업에서 이 목표를 성취하기는 지난했다. 조합을 무화시키면서도 전체 톤은 형성하는 조합을 만들어야 하니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고 스탭들은 내 선택을 보며 차차 감을 잡을 도리밖에 없었다.”
puzzle 03. 아들 ’도준’은 순결무구한 캐릭터
커피 한잔의 휴식이 끝나고 착수한 장면은 경찰서에 연행된 도준이 취조를 받는 상황이다. 형사들은 어르고 메치며 도준을 윽박지른다. 대사들은 우스운데 웃다보면 입꼬리가 일그러진다. 그나저나 유행어 하나 나올 것 같다. <살인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준(準)고문의 시추에이션. 가련한 도준은 아직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살인을 기정사실화하는 형사의 유도심문에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말을 웅얼거린다. “아니… 그… 저.” 단어가 정확히 들리지 않는 입속말의 느낌을 원하는 봉준호 감독이 예의 낮고 재빠른 말투로 농담을 한다. “오늘은 계속 똥 싸는 신음이네.”
과연, 이어진 장면에서도 사건 당일을 기억해내려 애쓰는 도준이 구치소에 누워 숨이 가빠지는 사운드를 딴다. 모니터 속의 도준은 눈에 익은 원빈과 미묘하게 다르다. 미지근한 물에 잠긴 물고기의 눈빛을 한 채 아랫입술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다. 저한테 닥친 비극적인 위기를 깜박깜박 까먹고 형사들이 비웃을 때 흐흐 따라 웃기도 한다. 무방비하다. 무지한 척 모든 걸 알고 있는게 아닐까 의심이 가는가 하면, 정말 바보 같기도 하다. 문득 원빈의 캐스팅이 발표되고 난 직후부터 품었던 궁금증이 떠올랐다. <마더>의 아들은, 원빈이 아니었더라도, 감독의 머릿속에서부터 예쁜 청년이었을까. 외모는 결코 사랑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확실히 사랑에 어떤 격렬하고 애틋한 정서를 덧입히지 않는가.
봉준호 감독의 HINT
“도준에게 중요한 건 예쁘다기보다는 무구한 느낌이었다. 순결한 인상이었다. 원빈씨는 그것을 가졌다. 인물의 일상을 오래 설명할 여유는 없는 내러티브라 모자가 딱 스크린에 나왔을 때 그들의 정서를 어느 정도 관객이 포착하는 것이 중요했다. 스타 배우를 갖고 그런 느낌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은데 김혜자 선생님과 원빈씨는 다행히 그랬다. 순수함, 그것은 알고보면 무책임함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가진 소주제 중 하나는 못난 자식이건 잘난 자식이건 부모가 자식을 통제할 수 없고, 사람이 사람을 알 수 없다는 거다. 비관적이다.”
필요한 자, 스스로 구하라
<마더>와 <괴물>을 관통하는 자력구제의 모티브
<플란다스의 개> <괴물> <마더>를 관통하는 등장인물의 행위는 자력구제다. 사고와 재난이 닥쳤을 때 국가와 경찰은 개인을 돕지 못한다. 남은 것은 스스로 동분서주하는 길뿐이다. 봉준호 감독은 <마더>를 준비하면서 <살인의 추억>을 찍기 전에 신문 사회면에서 접했던 한 사건을 다시 떠올렸다. 1992년 서울 신림동 여관에서 한 여성이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애인인 피살자와 투숙했다가 새벽에 먼저 여관을 나섰던 김모 순경이 용의자로 몰렸고, 1심과 2심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에서 김 순경은 수사 과정의 자백을 번복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몇몇 모순된 증거는 묵살되었다. 13개월의 복역 끝에 그의 누명을 벗긴 사람은 다름 아닌 부모와 형제였다.
봉준호 감독은 말한다. “그의 가족이 달라붙어 수집한 자료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증거를 제시하는 김 순경 아버지의 눈빛을 보도사진으로 보았는데 이미 검사의 그것이었다. 필요한 자가 구한다는 말도 있지만 나는 그런 현상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큰돈이나 파워가 있다면 비싼 변호사의 효과적인 도움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런 처지가 못 된다. 그렇다보니 자력구제라는 모티브를 억지로 밀어붙인다기보다 스스로 해결에 나서는 전개가 오히려 평범하고 리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