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후시녹음 현장에서 엿보고 들은 <마더> 이야기 [2]
2009-05-28
글 : 김혜리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puzzle 04. 액션과 컷의 경계를 관통하는 김혜자의 연기

3월26일 오후 1시. 김혜자의 후시녹음 첫날이다.“선생님!” 그녀를 보기 위해 부러 짬을 내 왔다는 <마더>의 마케팅 팀원들이 소녀 팬들처럼 달려들어 가볍게 포옹한다. 김혜자는 이번 영화작업을 위해 난생처음 휴대폰을 마련했는데, 어느새 하트 모양 특수문자를 말미에 붙인 메시지를 날려 오신다고 스탭들이 자랑한다. 채비가 진행되는 동안 김혜자가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낸다. 일회용 비닐장갑에 청포도알을 담아왔다. “보기엔 이래도 맛은 괜찮아요.” 단것을 좋아하는 봉 감독도 마다하지 않는다. “선수 입장!” 봉준호 감독이 나지막이 작업 시작을 선언하지만 선수는 입장 전부터 이미 연기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촬영 중간중간을 스케치한 현장 사진에서도 오직 그녀의 얼굴은 극중 장면으로 착각할 정도로 한껏 연기 중이었다. <괴물>에서는 믹싱팀으로 작업했던 라이브톤의 ADR 레코디스트 박용기 팀장이 마이크를 조정하는 동안, 김혜자는 쉬지 않고 입안에서 대사를 굴리며 이리저리 빚어본다. 도준을 구해줄, 군에서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를 뷔페에서 만나는 장면. 이 뷔페는 해물이 좋다는 변호사의 거드름에 혜자는 역시 모르는 게 없으시다며 아첨한다. 변호사를 애타게 뒤따르며 건성으로 음식을 접시에 올리는데 방울토마토가 멋대로 구른다. “얘들이 왜 이렇게 굴러”, “아유, 얘들이”, “요것들이”. 숏의 길이와 혼잣말이 쉽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피아노를 탄주하는 듯한 레코디스트의 손놀림에 따라 색색의 성문(聲紋)이 일렁거린다.

봉준호 감독의 HINT

“김혜자 선생님은 연기하는 상태로 계속 머문다. 의외로 대사도 현장에서 반복연습을 하신다. 그러면서 입안에서 뭔가가 만들어진다. 세팅을 하다가도 저 상태 좋은데 지금 카메라 돌려야 하는데, 저러다 지치면 나중에 힘 빠지실 텐데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기력과 에너지가 대단하시다. 송강호 형 같은 경우는 “찍을까요?” 한마디에 우르르 연기를 하고 “컷” 하면 다시 캬캬캬 웃고 논다. 반면 김혜자 선생님은 액션과 컷의 앞뒤 경계를 관통한다. 표정도 그 상태에 이미 이른 다음 카메라가 돌아가고, 컷한 뒤에도 잔영이 남은 채로 죽 가신다.”

puzzle 05. 기울어진 취조실 벽의 비밀

이상하다. 벽이 미묘하게 기울어진 것일까? 화면에 비치는 취조실의 평면도가 선뜻 파악되지 않아 불안한 인상을 자아낸다. 프레임의 가로가 길기 때문일까. <마더>의 화면비율은 2.35:1. 봉준호 감독이 이 사이즈를 선택한 건 처음이다. 한강의 스펙터클을 예고한 <괴물>이 와이드 스크린이 아닌 1.85:1 사이즈로 공개됐을 때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당시 봉준호 감독은 괴물의 움직임이 수직적 연출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던 것 같다. 녹음실의 작은 모니터에 휙휙 지나가는 일부 장면을 언뜻 보기에도, 착 달라붙은 클로즈업과 먹먹한 롱숏이 번갈아 눈에 들어와 박힌다.

봉준호 감독의 HINT

“인물과 카메라의 거리는 영화에서 근본적 문제다. 영화는 두 시간에 걸쳐 엄청난 수, 다양한 사이즈의 숏을 보여주지만 보고 나면 하나의 인상만 남는다. 예컨대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는 바스트 숏이나 클로즈업이 떠오르고 같은 스릴러라도 <양들의 침묵>은 <쎄븐>보다 타이트한 영화로 기억된다. 내 영화를 생각할 때도 이 영화는 전작보다 ‘가까운’ 영화일까, ‘먼’ 영화일까 가늠하게 된다. <괴물>은 스펙터클 영화지만 가족의 캐릭터에 집중했다. 수직적 연출이 많았을뿐더러 핵심적 내러티브의 지향점인 현서가 감금된 공간이 수직적으로 길어서 옆으로 프레임이 퍼져나가는 것이 싫었기에 1.85:1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다. <마더>는 스케일은 작고 섬세한 영화인데도 2.35:1이 맞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설명하자. 개인적으로 2.35:1 사이즈가 가장 적절히 쓰였다고 생각하는 영화는 이를테면 리들리 스콧의 전쟁 스펙터클이 아니라 폴 토머스 앤더슨의 <펀치드렁크 러브>다. 썰렁한 장소의 책상에 애덤 샌들러가 앉아 있는데 한쪽 공간이 툭 터져 그의 공허함과 뒤틀림, 불안과 히스테리가 전해져 온다. 엄마의 불안과 히스테리, 긴장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이 사이즈에서는 클로즈업을 들어가도 이마나 턱 끝이 잘리면서 오히려 더 과감해진다.”

puzzle 06. 거울을 포개어 놓은 듯한 면회실의 특수 구조

<마더>의 혜자와 도준은 한몸 같은 관계지만, 영화에서 그들이 함께하는 장면은 대부분 면회실의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이뤄진다. 변호사를 구치소에 데리고 온 혜자가 아들을 소개하는 장면의 후시녹음이 이어졌다. 콩밥도 의외로 먹을 만하다는 어처구니없는 아들을 눈짓으로 제압하며 변호사에게 잘 보이려는 안간힘이 안쓰럽다. 카메라가 등 뒤에서 찍은 장면이라 입술이 아닌 어깨의 오르내림에 맞게 감정과 대사의 호흡을 조절한다. 변호사의 눈치를 힐긋힐긋 보는 혜자의 감정이 전달되자 봉준호 감독이 즐거워한다. “역시 애교 만점이십니다.” 녹음실 안의 김혜자가 어둔 유리창 너머에서 눈을 흘기는 듯하다.“어머, 여기서 애교부릴 이유가 있나 뭐?” 그리고 퉁이 돌아온다. “봉 감독님! 마이크에 대고 숨 좀 크게 쉬지 마요.” 봉준호 감독, 짐짓 콧바람을 세게 불어본다. <마더>의 주요 공간인 면회실의 특수한 구조가 눈길을 끌어당긴다. 마치 거울 두개가 마주 볼 때 생기는 이미지처럼 여러 개의 면회실이 투명한 벽을 통해 일렬로 도열해 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콘크리트 벽이 깊은 어둠을 향해 늘어선 아파트 보일러실과 <괴물>의 겹겹이 버티고 선 한강 다리 교각의 이미지가 겹친다.

봉준호 감독의 HINT

“교도소 장면에는 신에 따라 두곳의 실제 교도소 로케이션과 세트가 동원됐다. 면회실 장면은 보통 구조적으로 답답한데, 류성희 미술감독에게 터널처럼 공간의 층이 겹쳐 나왔으면 좋겠다고 요구했다. 류 감독은 내가 유난히 한 방향으로 좁고 길쭉한 공간을 선호한다고 말하는데, 맞는 말 같다. 생각해보니 <플란다스의 개>의 화장실을 고를 때도 연출부에게 계속 좁고 길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마더>에서 혜자가 일하는 약재상 가게도 그렇다.

puzzle 07. 엄마와 세상을 분리하는 렌즈의 마력

이번에도 봉준호의 영화에는 비가 내린다. 그래도 전작에 비해 갠 날이 많은 편이라고 하지만. 녹음실에서 엿본 한 장면에서는 구치소에 누워 있는 아들과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엄마가 같은 빗소리를 듣는다. 봉준호 감독은 다른 장소에 처한 인물들을 연결하는가 하면 실내와 실외를 극적으로 분리하는 비의 마력과 그 공감각적 효과를 즐겨 이용한다. 아들을 구명할 희망에 잠시 고양됐던 엄마가 풀이 죽은 장면도 비에 젖었다. 더빙할 대사는 혼잣말이다. 세상을 뒤덮은 우울한 잿빛의 빗금을 헤치고 혜자가 터벅터벅 걷는다. 붉은 옷을 입은 김혜자의 자그마한 몸피가 도드라진다. 한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고 콘티를 그린 봉준호 감독은 엄마의 얼굴과 눈동자, 그녀의 육체성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키워왔을까. 예산의 부담을 감수하며 사용했다는 아나모픽 호크 렌즈는 그가 표현하려는 이미지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봉준호 감독의 HINT

“의상의 색깔을 비롯해 주변 공간으로부터 혜자가 돌출, 분리되는 이미지를 계획했다. 세상을 휘어잡아서 혼자가 두드러지는 게 아니라 결국 홀로 남아서 두드러지는 경우다. 엄마가 어디론가 홀로 자꾸만 가는 이미지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홍경표 촬영감독은 내가 2.35:1을 선택하자 고민 끝에 아나모픽 호크 렌즈를 제안했다. 소규모 회사에서 장인들이 수제로 만들어내는 렌즈인데 일반 렌즈보다 받아들이는 광량이 크고 화면의 해상력이 남다르다. 크기도 엄청나 촬영부가 고생이 많았다. 잘 찍힌 영화는 인물에 포커스가 맞을 때 포커스가 나간 뒷공간의 느낌이 아름답게 표현되는데 미묘한 부분이지만 아나모픽 호크 렌즈는 그런 면에서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요즘 많이 보는 디지털한 느낌과 달리 조금 클래시컬하고 품격있는 느낌을 낸다. <타인의 삶>이 이 렌즈로 촬영됐다고 들었다.”

puzzle 08. 후반작업의 핵심은 ‘덜어내기’

<마더> 예고편에 등장하는 희생자는, 생머리를 축 늘어뜨린 소녀다. 고작 십수년을 살았던 이 세상을 더이상 보기 싫다는 듯 검은 머리칼을 드리워 앞을 가리고, 젖은 빨래처럼 난간에 걸려 있던 소녀. 아주 잠깐 살아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이 모니터 화면을 스쳐간다. 여고 교복이 <괴물>의 현서가 입었던 리본 타이를 매는 교복과 비슷해 보여 심장이 더욱 철렁하다. 소녀의 이름은 문아정. 아정이라는 이름도 귀에 익다 싶었더니 <마요네즈>에서 김혜자의 딸로 분했던 고 최진실의 극중 이름이 아정이었다. 봉준호 감독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며 도리어 놀란다. 소녀가 매번 수난의 주인공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짓궂게 묻자 감독은 “소녀를 보살펴주고 싶다는 의지가 간절한데 상황이 허락지 않아서 일어난 현상 아닐까”라며 진심어린 농담, 아니 웃음에 실린 진담을 돌려준다. 후시녹음실을 방문한 이틀 모두, 봉준호 감독은 작업 중 돌연 “여기까지만”을 선언했고 기자는 미리 알았다고 한들 조금도 덜하지 않은 아쉬움으로 몇번씩 뒤를 돌아보며 작업이 한창인 스튜디오를 나섰다.

봉준호 감독의 HINT

“<마더> 후반작업의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화면이건 편집이건 사운드건 덧칠을 하는 게 아니라 핵심으로 더욱 다가가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무엇을 더 얹고 양념을 치는 게 아니라 줄이고 덜어서 어떻게 하면 좀더 심플하고 본질적인 것이 나올 수 있을지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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