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파탈이다. 다른 누군가라면 모르지만, 배종옥은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연기. 파격적인 베드신, 카리스마 넘치는 여배우로 배종옥이 변신한다. 배종옥은 말한다. 변신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도전이었다고.
카메라가 움직이는 순간, 멈칫할지 모른다. <오감도>의 세 번째 이야기 <러브레슨>의 첫 장면은 다섯편의 영화 중 가장 격렬한 베드신이 등장하는 에로틱의 정수다. 남자의 나신 위에 있는 여자의 가슴을 카메라가 좇는 동안 궁금증은 증폭된다. 과연 이 배우는 누굴까? 궁금증만큼이나 대답도 파격적이다. 어떤 순간에도 꽁꽁 여민 옷깃으로 자신을 다독일 것 같은 배우, 물샐 틈 없는 삼엄함이 감지되는 냉철한 배우 배종옥. 그 배우가 가장 뜨거운 온도로 ‘화란’ 역에 도전한 것이다.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역할이라서 훨씬 재밌다고 생각했다. 정극이라면 불편했을 텐데 후반부는 코믹이다 보니 상쇄되더라.” 파격적 도전에 대한 배종옥의 대답은 명쾌하다.
유영식 감독이 연출한 <러브레슨>에서 배종옥은 카리스마 넘치는 관록의 배우 ‘화란’을 연기한다. 연방 NG가 거듭되는 공포물의 촬영현장. 신인 여배우 ‘미진’(김민선)의 미숙한 연기에 사사건건 딴죽을 거는 감독 ‘봉찬운’(김수로) 때문에 넌더리를 치던 화란은 비장의 카드를 내놓는다. 바로 화란이 걸어온 길, 특유의 농염함을 미진에게 전수, 감독의 혼을 뺏으려는 유쾌한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신인 배우의 미숙함을 가소롭다는 듯 비웃는 모습, 감독의 미진에 대한 감정을 훤히 꿰뚫는 모습, 영화 속에 등장하는 화란의 손짓과 몸짓 하나하나가 일정 경지에 오른 듯 파워풀하다. 순간, 까탈스러움과 카리스마를 동시에 갖춘 노희경의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여배우 ‘윤영’이 떠오르지만 화란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두터워진 마스카라, 한 발짝 더 나아간 듯한 오버 제스처는 진지함과 코믹함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화란의 캐릭터를 완성한다. 바로 지금껏 한국영화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캐릭터, 어느 누구와도 연결점을 찾을 수 없는 캐릭터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1985년 KBS 특채 탤런트로 데뷔, 40대 후반의 나이. 강산이 두번이나 변하고도 남을 경력의 여배우 배종옥 역시 화란의 카리스마와 멀지 않다. ‘배우는 사람들에게 환상을 줄 필요도 있다’는 생각으로 유독 ‘자연인으로서의’ 배종옥을 드러내는 데 인색한 배우. 연기자로서의 역할에 오롯이 충실한 이 배우를 후배들 역시 편하게 생각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이차가 있으니까 쉽진 않겠죠”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게 쉽게 해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라는 자신을 향한 엄격함이 배우로서 배종옥을 이끌어온 강장제였는지 모른다. 십년 차에 조금 알 것 같던 연기를 그 뒤 십년간 ‘어떻게 하면 좀더 원숙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공부로 보냈다는 그녀. 그리고 그 인고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여배우로서 나아갈 자신만의 해답을 찾았다.
“이미 30대를 지나 40대로 들어오면서 많은 생각과 준비를 했다. 단순히 젊음에 의지하려고 하거나, 젊은 역할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다.” 배종옥은 젊은 남녀배우를 선호하는 기획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이름이다. ‘쉬면 오히려 몸이 아프다’는 배우 체질의 그녀는 내년 ‘연극열전’을 비롯해 두편의 연극을 준비 중이다. 이제 ‘노희경 작가 전속 배우’라는 틀을 깬 것 같다는 질문에 그녀가 일갈한다. “난 항상 변화를 시도해왔다. 지금은 좀더 대중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서 그게 쉽게 드러날 뿐이다”라고. 그리고 “그래서 편하다. 옛날에는 이건 안돼, 저건 안돼 하고 스스로 선을 그었는데 지금은 안되는 게 뭐 있어? 하면 되지, 라는 생각으로 선뜻 도전한다.” 노련한 자신감이 지금까지 품었던 배우 배종옥 그대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