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6]
2001-11-30
글 : 김혜리

알리

무하마드 알리는 링의 모든 코너에서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20세기의 전사다. 열정적으로 산 사람의 일대기가 그렇듯 알리의 생애에는 시대의 갈등이 그대로 들어 있다. 눈부신 권투 재능과 날카로운 위트, 굽힐 줄 모르는 분노와 강인한 인간만이 갖는 내적인 품위로 현대 미국사에 진한 자취를 남긴 이 거인의 장도(長途)를 어떻게 하면 한 편의 극영화 안에 요약할 수 있을까. 이 육중한 과제를 받아 안은 것은 <히트> <인사이더> 등 전작을 통해 유려하고도 역동적인 스토리텔링 능력을 공인받은 마이클 만 감독과 슈퍼 헤비급 챔피언이 되기 위해 육체를 ‘리모델링’하다시피한 윌 스미스. “한 인간의 삶에는 나머지 전체를 함축하는 모멘트가 있다. 일단 그것을 발견하면 이야기는 강력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마이클 만 감독은, 알리 개인사의 뇌관을 이슬람 개종, 징병 거부, 결혼, 챔피언 벨트를 따고 잃고 다시 되찾는 사건이 있었던 1964년부터 1974년까지의 10년으로 잡고 <알리>를 만들었다. 한편 코미디, 액션, 드라마를 섭렵한 윌 스미스가 야심만만하게 도전한 알리 연기에 대해서도, 알리의 에너지가 가진 섹시한 면모를 잘 살린 호의적인 입소문이 파다해 마이클 만과 윌 스미스는 2002년 오스카의 유력한 후보자로 일찌감치 부상하고 있다. 마리오 반 피블스, 제이다 핀켓 스미스가 출연하며 존 보이트가 스포츠 캐스터 하워드 코셀로 분했다. <인사이더>로 평단의 열광과 대중의 무관심을 맛보았던 마이클 만이 또 한편의 실화영화 <알리>로 박스오피스에도 카운터 펀치를 먹일 수 있을지, 12월25일 미국 개봉을 앞두고 제작사 소니의 간부들은 자못 긴장하고 있다는 풍문이다.

디 아더스

샹들리에의 원인 모를 흔들림, 뚜껑 닫힌 그랜드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쇼팽, 밤이면 나타나 아이의 잠을 훼방놓는 낯모를 소년. <오픈 유어 아이즈>의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첫 번째 영어영화 <디 아더스>는 정령과 혼백들이 자아내는 공포,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한기를 전하는 심리 공포물이다. 1945년 저지 섬의 외딴 빅토리아풍 저택. 2차대전에 자원해 간 남편은 전선에서 돌아올 줄 모르고 그레이스는 차갑고 엄한 가톨릭의 규율로 아이들을 키운다. 촛불보다 센 빛에 노출되면 위험한 특수한 병을 앓는 남매를 둔 탓에 늘상 굳게 내려진 커튼 뒤 희미한 어둠에 휩싸여 있는 그레이스의 집에 새 하인 셋이 들어오고 그날 이후 집은 기괴한 ‘신음’을 내기 시작한다. 아메나바르가 감독, 각본, 음악의 1인3역을 도맡았고 얼음조각 같은 연기를 선보인 니콜 키드먼은 “어느 때보다 섹시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소니아 그란드의 의상도 주의를 기울일 만한 볼거리다.

휴먼 네이처

‘인간의 본성’을 묻는 고매한(?) 영화치고 <휴먼 네이처>의 주인공의 고뇌는 너무 ‘사소한’ 고민에서 출발한다. 바로 호르몬 이상으로 털이 너무 많이 난다는 것. 자살까지 시도하던 라일라는 어느날 숙명에 수긍하고 전원생활을 시작하여 자연을 예찬하는 소설까지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짝을 찾아 문명세계로 돌아온 그녀가 발견한 남자는 ‘크기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인간의 리비도를 통제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자 네이단. 짝을 이룬 두 남녀는 야생인간 퍼프의 처리방법을 놓고 갈등을 빚는다. <휴먼 네이처>의 크레디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팀 로빈스도 패트리샤 아퀘트도 아닌 작가 찰리 카우프만. <존 말코비치 되기>로 빛나는 데뷔전을 치른 카우프만은 <휴먼 네이처>에서 비요크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는 경력이 솔깃한 미셸 곤드리 감독, 가이 리치의 카메라맨 팀 모리스 존스와 한 팀을 이뤘다. <노팅 힐>의 잊을 수 없는 룸메이트 라이스 아이판스가 출연한다. 그의 배역은 원숭이 인간 퍼프.

죄와 벌

그 소설가의 세계를 이 감독이 그려보면 어떨까?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법한 이러한 ‘커플링’ 가운데, 냉정한 웃음을 흘리며 설원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태도를 공유한 도스토예프스키와 아키 카우리스마키만큼 그럴듯한 짝도 없을 것이다. <죄와 벌>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동명소설을 현대 배경으로 옮겨놓은 카우리스마키의 1983년 영화. 도축장 인부 라이 카이넨은 혼카넨이라는 사람을 총으로 살해한다. 한편 경찰은 그가 3년 전 약혼녀 살해의 혐의를 썼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사실을 들춰내고 라이 카이넨을 소환하지만 카이넨은 거짓 진술로 위기를 모면하고 엉뚱한 사람이 누명을 쓴다. 그러나 위조된 여권으로 출국하기 직전 카이넨은 갑자기 핸들을 꺾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카우리스마키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감정표현에 극히 인색한 캐릭터들이 눈빛만으로 표현하는 죄의식과 고립감이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영화. 영화가 만들어진 지 20년이 넘었지만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힘은 묵었다고 변질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13 고스트

<헌티드 힐>류의 영화를 부담없이 즐기는 관객이라면 환영할 법한 경쾌한 공포영화. <악령의 씨>의 제작자 윌리엄 캐슬이 50, 60년대 만들어낸 속임수 중심의 저예산 쇼크영화 가운데 한편을 <어비스>의 특수효과에 참여하고 광고계에서 활동해온 스티브 벡이 메가폰을 잡아 리메이크했다. 화재로 전 재산과 아내를 잃어버린 두 아이의 아버지 아서는 유령 사냥꾼으로 활약하던 괴짜 친척으로부터 상속받은 집으로 이사한다. 유리와 철로 지어진 저택은 보기에는 근사하지만 아서와 식구들은 오래지 않아 죽은 친척이 이 집을 어디에다 썼는지 깨닫게 된다. 벽에 갇혀 있던 열두 유령의 몸부림으로 저택은 곧 덫으로 변신하고 두명의 새로운 ‘고스트 버스터’들이 북새통에 가세하면서 쉴새없는 비명과 야단스런 추격전이 뒤따른다. 로버트 저메키스와 조엘 실버가 제작했다.

써클

이란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혹은 삶을 박탈당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2000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써클>은 탈옥한 세명의 여자와 아기를 유기하려는 한 여자를 통해 그녀들의 처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첫 장면은 한 분만실. 어느 가족이 딸아이의 탄생을 한탄한다. 카메라가 옮겨가는 대상은 탈옥수 어레주와 나르게스. 일단 감옥은 빠져나왔지만 그녀들을 기다리는 것은 더 큰 감옥이다. 고향 갈 돈도 통행증도 없이 발이 묶였기 때문이다. 또다른 탈옥수 파리는 수감중 사형수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오빠와 아버지에게 구타당하고 거리로 뛰쳐나온다. 어린이가 처한 곤경을 리얼타임으로 관찰하면서 미소와 쓸쓸한 깨달음을 동시에 안겨주었던 <하얀 풍선>의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써클>에서 사회와 인간의 잔인성으로 말미암은 고통의 순환을 묵묵히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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