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코시즈가 새롭게 주목하는 곳은 하드보일드 추리스릴러의 대가 데니스 루헤인의 베스트셀러 <살인자들의 섬>의 ‘셔터 아일랜드’다. 도심에서 고립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던 그가 지옥의 정신병동이 존재하는 탈출 불가능의 섬에 착륙한 건 궁금증을 자아낼 일이다. 스코시즈는 그의 페르소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끝까지 밀어붙이며, 영화광으로서 그간 그가 섭렵한 지식을 스릴러 형식으로 훌륭하게 담아낸다. 그러나 매끈하고 유려한 심리스릴러라는 도전 외에 스코시즈가 진짜 원하는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이 수상한 섬으로의 여정은 결국 스코시즈의 머릿속 탐험이 될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무의식과 자기 분열로 점철된 ‘셔터 아일랜드’의 실체를 탐구한다.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풀기위해 스코시즈의 인터뷰를 비롯해 그가 참고한 밀실공포영화, 그리고 원작자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 세계를 첨가한다.
닫힌 섬 셔터 아일랜드. 마틴 스코시즈가 도시를 떠났다는 점에서 <셔터 아일랜드>의 출발은 사뭇 궁금증을 자아낸다. 영화의 첫 장면, 배멀미에 시달리는 테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보스턴에서 멀리 떨어진 암석투성이 섬 셔터 아일랜드로 가는 배 안에서 스스로를 타이른다. “테디, 저건 물이야. 엄청난 양의 물. 진정하자.” 이건 어쩌면 테디가 아닌 스코시즈의 새로운 모험일 수도, 아님 그가 선보이는 낯선 영화를 대해야 하는 우리의 현기증일지도 모르겠다.
138분에 달하는 <셔터 아일랜드>의 본격적인 탐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외부와의 단절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폭풍으로 교통, 통신 등 연결통로가 모두 끊긴 당혹스런 상황, 육지와 완전히 결별한 채 궁지에 몰린 테리의 고립과 함께 스코시즈는 스릴러라는 장르에 대한 주도면밀한 고찰을 시작한다. 애초 미국 연방보안관 테디 다니엘스가 셔터 아일랜드를 가게 된 건 섬에 있는 애시클리프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레이첼 솔란도(에밀리 모티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파트너 척 아울(마크 러팔로)과 팀을 이룬 그는 아직 섬에 있을지 모를 레이첼의 흔적을 찾아나선다. 닫힌 공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시체, 풀릴 듯 말 듯 남겨진 단서 그리고 다분히 결점이 엿보이는 주인공까지, 곧장 에드거 앨런 포를 떠올려도 무리가 없는 플롯이다. 적어도 초반부까지 이 공식은 꽤 들어맞는 것 같아보인다.
그러나 표면적 임무와 달리 테디 개인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 그는 몇년 전 아내 돌로레스(미셸 윌리엄스)를 죽인 방화광 앤드루 래디스(앨리어스 코티스)가 이곳에 있다고 확신하고 방화범을 찾는다. 그 길만이 그의 내면을 한시도 가만두지 않는 아내의 환영을 떨칠 수 있는 면죄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2차대전 미 육군으로 참전했던 당시 스스로에게 느꼈던 폭력적인 면모로 인한 죄책감까지 겹쳐 테디는 극도의 불안증세를 보이고 있다. 고민을 떠안고 도착한 섬. 그러니까 <셔터 아일랜드>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테디의 심리적 장애가 뒷받침되어야 시작될 수 있다. 그곳에서 의사와 환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테디는 병원이 환자들을 이용, 뇌의 전두엽을 제거하여 인간의 정신을 통제하는 비인간적인 실험을 자행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정신적인 외상에 시달리는 남자와 비인간적인 형태로 정신적인 외상을 치유하는 병원의 만남. 한치 앞을 내디딜 수 없는 벼랑 끝의 공포가 바로 <셔터 아일랜드>가 건네는 진짜 공포이자, 스코시즈가 이 영화를 두고 표방한 심리스릴러의 전제다.
고딕풍 미스터리 스릴러의 매혹 드러내는 영상미
고딕풍의 미스터리 스릴러는 희뿌옇게 묘사된 섬의 진입로부터 실체를 드러내며, 오리지널 스코어를 만드는 대신 긴장의 순간마다 크레센도로 점강되는 클래식한 음악의 사용은 고전 스릴러의 박력을 상기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영화의 비밀을 간직한 등대의 꼭대기를 향해 기어 올라가는 테디를 통해 스코시즈는 히치콕의 <현기증>(1958)에 대한 오마주를 확연히 드러낸다. 섬에서 겪는 공포에 휩싸인 테디가 샤워하는 작은 장면 조차도, 스코시지는 <싸이코>(1960)의 여성이 살해당하는 오싹한 샤워장면에 바짝 다가간다. 물을 뿜어내는 샤워기를 잡아내는 카메라 움직임 하나까지 거의 흡사할 지경이다. <셔터 아일랜드>의 상당수의 설정은 낯선 여자와의 만남 이후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복잡하게 일이 꼬인 스코시즈 자신의 영화 <특근>(1985)을 그대로 옮겨온 듯하지만, 테디의 경우는 <특근>에서처럼 하룻밤의 해프닝에 그치지 않는다. 처음 시나리오를 접한 스코시지가 곧장 떠올린 영화는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적 작품인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이었다. 이 영화가 주는 초자연적인 공포의 상당수를 차용해 그는 셔터 아일랜드의 기괴한 공포를 심리적 불안과 미스터리로 풀어나갈 계획을 내비쳤다. 그리고 고립된 공간,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며 파멸해가는 테디의 4일간 혹은 그 이상의 과정은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에서 익히 보아온 불안과 공포까지 치닫는다.
물론 스코시즈와 스릴러의 결속력이 단단한 건 아니다. 둘을 굳이 연결시키려면 적어도 <케이프 피어>(1991) 시절로 돌아가야 할 정도니 말이다. 그래도 혹시 아는가. 상업적으로 꽤 괜찮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평단으로부터 흡족한 평가를 얻지 못했던 <케이프 피어>가 그에게 궁극의 스릴러에 대한 갈증을 보태줬을지. 혹은 그가 히치콕이나 이탈리아의 히치콕으로 불리는 거장 마리오 바바에게 자주 표했던 경배를 지금쯤은 자신있게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어쨌든 <셔터 아일랜드>는 스코시즈가 영화 속에서 반전의 카드를 처음 쥐고 흔든 꽤 획기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스코시즈의 관심사는 그러나 스릴러적 장르의 완성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셔터 아일랜드에서 겪는 테디의 혼란을 두고 “누가 통제하는지, 통제를 받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세계가 필요했다”며 곧장 모호함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 실마리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대가로 통하는 원작인 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에서 찾을 수 있다. 원작은 냉전에 대한 편집증과 나치 포로수용소라는 역사적 사실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던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2차대전 뒤 심리적으로 충격에 휩싸인 상당수의 미국인은 광기와 진리에 대한 갈구, 그리고 현실감의 부재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스코시즈가 원작에서 포착한 지점도 바로 이 집단 무의식에 대한 공포다. 그러니 당시 미국인에게 내재해 있던 광기를 떠안고 있는 남자가 바로 디카프리오가 연기하는 테디라고 봐도 무방하다. 테디는 단지 시대가 달라졌을 뿐, 베트남전에서 입은 심리적 충격으로 뉴욕의 밤거리를 헤매는 <택시 드라이버>(1976)의 트래비스와 다르지 않다.
디카프리오의 ‘가장 어려운 도전’
막상 달라진 건 스코시즈의 접근 방식이다. 필름누아르를 연상케 하는 고전적이고 힘있는 장면들을 상당 부분 차용하고 있지만 영화에서 그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실제 장면을 압도할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테디의 환영신이다. 앞서 정신분열에 시달리는 <에비에이터>의 하워즈 휴스를 묘사할 때만 해도 하워드의 내면보다 겉으로 보이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묘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스코시즈였다. 그러나 애시클리프 정신병원에 들어선 뒤 카메라는 테디의 불면증과 편두통이라는 ‘사실’ 묘사에 그치지 않고, 그의 손상된 내면까지 속속들이 토해내게 만든다. 끔찍한 장면이지만, 이 경우 테디의 환각은 놀랄 정도로 아름답게 채색된다. 사실적인 거리를 묘사하는 데 치중했던 스코시지의 전작들에서와 달리, 촬영감독 로버트 리처드슨은 이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테디를 설명할 구실을 만들어준다. 특히 CG의 도움을 빌려 완성된, 수만개의 꽃가루처럼 흩날리는 재를 포착한 장면은 불에 타 죽은 아내를 환영하는 끔찍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된다. 플래시백이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다카우수용소 장면의 묘사와 함께 족히 영화의 2/3에 달하는 테디의 환영장면은 스코시즈가 한번도 손대지 않았던 모호함과 불확실투성이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 낯선 장면에 대한 탐식은 늘 이민자로서 불안감에 시달리며, 자신만의 지옥을 껴안고 살던 그가 그 지옥의 형상화 작업에 착수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스코시즈가 건네는 질문의 강도는 꽤 세다. 배우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끔찍한 여정을 군말하지 않고 견뎌내는 건 역시 그의 파트너 디카프리오다(여전히 ‘스코시즈와 드 니로’의 결합에 우위를 두는 팬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디카프리오는 <갱스 오브 뉴욕>(2002) 이후 <에비에이터>(2004) <디파티드>(2006)에 이르기까지 이제 4번째 작품을 함께하고 있는 공공연한 스코시즈의 분신이다). 근작인 샘 멘더스의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조차 ‘아버지’가 되는 것에 실패한 걸 만회하려고 했던 걸까. 디카프리오는 거듭되는 스코시즈의 재촬영 요구를 모두 통과해낸다. 오죽하면 그가 “테디가 가진 감정적 트라우마로 촬영 내내 안정을 찾기 힘들었다”며, 이번 연기를 ‘연기 인생 통틀어 가장 어려운 도전’이라 시인했을 정도일까.
현실과 환영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서 디카프리오가 펼치는 이번 연기는 흠잡을 데 없다. 디카프리오는 <디파티드>에서 실제 보스턴 출신인 맷 데이먼보다 더 정확하게 보스턴 사투리를 구사하고 <블러드 다이아몬드>(2006)에서 완벽한 남아공 사투리 연기를 선보이는 투혼을 발휘했음에도, 늘 또래 다른 배우들에 비해 미흡한 연기자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는 짧은 등장만으로도 위협을 자아내는 막스 폰 시도의 아우라와 시종 냉소적인 미소를 짓는 벤 킹슬리의 강렬한 포스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관객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은근한 기술을 발휘한다. 포효하는 미치광이 연기 대신에 스코시즈가 원한 건 이렇게 서서히 잠식되는 은근한 스타일이었는지 모른다. 결국 전면에 나선 건 디카프리오지만, 강조되는 건 스코시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란 점에서 그가 추구하는 주제의식들은 디카프리오와의 만남으로 꽤 효과적으로 발휘되고 있는 셈이다.
1940, 50년대 필름 누아르를 향한 오마주
분명한 건 <셔터 아일랜드>를 통한 스코시즈의 시도가 세련되고 유려하며 흠잡을 데 없다는 점이다. 육지에서 고립된 섬, 흠뻑 젖은 시체들의 연이은 등장 그리고 반전의 복선까지. 음산하고 몽환적인 원작의 분위기를 십분 반영한 <셔터 아일랜드>는 그 자체로 스릴러의 모든 걸 갖추고 있는 수작이다. 1940, 50년대 필름누아르를 잔뜩 포식한 노익장이 드러내는 영화광으로서의 노력을 누군들 인정하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 그러나 장르의 컨벤션을 빌려왔음에도, 마지막까지 스코시즈는 관객이 장르의 쾌감을 얻을 수 있는 호의를 베풀지는 않는다. <셔터 아일랜드>가 수작이지만, 기념비적인 장르영화가 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스코시즈는 여전히 자신이 늘 집착해왔던 죄의식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더 몰아붙일까에 골몰하고 있는 듯하다. <디파티드> 이후 그 문제는 더 심화되었으며, 도시를 떠난 섬으로의 완벽한 고립은 그가 자기반영적인 고민을 충분히 펼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이고도 새로운 선택지다. 다소 당황스럽게 마무리되는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한 찬반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도전은 여전히 박수받아 마땅한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