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에서 두 번이나 반복되면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가 있다. “너 왜 그랬니?”라는 중식의 질문이다. 이 말은 윤리의 차원을 벗어나 가치의 문제와 연결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중식의 고백을 들은 은모는 말한다. “이게 저한테 할 수 있는 모든 얘기예요? 난 꼭 진실을 알아야겠어요.” 이 말은 간절히 원하던 사랑의 고백을 들은 후에 답할 수 있는 상식적인 대답은 아니다. 진실, 그 경계에서 진정한 우리 삶의 가치를 묻고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초기의 단편들에서부터 <질투는 나의 힘>과 <잠복>을 거쳐 <파주>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추구하고 있는 박찬옥 영화의 화두이다. 박찬옥 영화의 주인공들은 항상 집과 아버지가 부재한 가운데 갈 곳을 잃고 그 경계에서 배회한다. 집과 아버지는 박찬옥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경계의 영역은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지만 어느 곳이나 속해 있는 제 3의 영역이자 사유의 영역이다. 진리에 대한 인식은 이러한 제 3의 영역과 만난다. 박찬옥 영화의 인물들이 미성숙하고 그녀가 주로 성장기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 경계에서 진실과 참다운 가치를 추구하는 작가 정신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희망을 주는 것이 오히려 고통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박찬옥은 위선보다 미성숙을 택한다. 사랑은 미숙함과 공존하기 때문이다. <파주>는 전작들에서 보여준 문제의식과 맥을 함께 하지만 그 연계선상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심화된 사유를 보여준다.
1.
파주의 서사가 우리에게 모호하게 다가온다면 그것은 은모의 행동을 중식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우리가 사고하는 인과 관계의 틀로서는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유는 시간관을 따라 움직인다. 박찬옥은 먼저 직선적인 시간을 파괴한다. 8년 전, 3년 전이라는 시간에 대한 자막은 현실에 대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것은 무규정적인 시간이다. <파주>에서의 플래시백은 회상-이미지로 작용하지 않는다. 누구의 기억인가? 어떤 미래의 기능으로서의 기억의 탄생인가? 시간에 대한 박찬옥의 사유는 은모가 소방차를 바라보는 두 번의 크리스탈 이미지에서 정점에 달한다. 두 개의 거울 같은 장면, 즉 현재의 은모가 어린 시절의 은모로 환생해서 깨닫는 듯한 그 장면은 무엇인가? 두 장면은 인과 관계의 논리와 직선적인 시간관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두 장면에서 기억과 지각, 현재와 과거, 현실태와 잠재태,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은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쫓으며 식별 불가능해진다. 스승의 날 중식이 은모에게 왜 그랬냐고 묻자 은모가 “우리 언니 건드리지마” 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중식의 얼굴만 보여주기 때문에 어린 은모의 대사인지 아니면 현재의 은모가 말하는 내레이션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현재의 은모가 과거의 은모와 공존하면서 말하는 듯한 이 장면은 관객을 생각하고 만들고 크리스탈 이미지와 연결된다.
우리가 <파주>에서 쓸쓸함과 연민을 느낀다면 그것은 중식에 대한 동일시 때문이다. 중식은 직선적인 시간관을 따라 사유하는 우리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만큼의 외상을 가지고 있고 살기 위해 망각하지만 놀랍게도 아무것도 잊지 않았음을 깨달으며 자기포기를 통해 사회에 저항하지만 그래도 은모의 미래를 준비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미래라는 허구의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중식의 모습이 은모로 인해 더 쓸쓸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은모는 전작들에서 보여준 미성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지만 그것들을 훨씬 더 뛰어넘는다. 은모는 미성숙이 아니라 날 것 그대로다. <질투는 나의 힘>을 원상의 성장기로 본다면 <파주>는 중식의 성장기다. 미성숙한 것은 은모가 아니라 중식이다. 원상이 성연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중식도 은모를 이해하지 못한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진정한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은 성연이다. 집을 두고 집이 아니라며 다른 곳에서 잠을 자며 배회하는 사람은 성연이다. 관객의 동일시를 이끌어내는 것은 원상과 중식이며 이들은 사회의 가치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여전히 떠남과 배회를 하고 경계에서 삶의 가치를 묻는 것은 성연과 은모이다. 하지만 은모는 성연의 캐릭터를 능가한다. 날 것 그대로의 상태는 어떨 때는 적나라함으로 어떨 때는 난폭함으로 다가온다. 그러한 날 것 그대로의 상태를 극대화시킨 것이 바로 은모이다. 은모는 직선적인 시간관 속에서 사유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중식의 논리와 예상대로 은모가 행동한 적이 있는가? 중식의 왜 그랬니? 라는 질문은 계속 될 것이다. 근대적 가치 체계가 만든 대로 우리의 삶은 직선으로 가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겉돌거나 뒤로 가거나 앞뒤가 맞지 않게 움직인다. 파주가 뛰어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우리 삶의 절차와 형식들을 보여주면서 삶의 가치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가 바로 파주이다. 갓 말문을 열어 모든 것에 대해 왜요? 왜요? 라고 질문하는 어린아이처럼 중식의 “왜 그랬니?” 라는 질문에 은모는 성연처럼 달래지 않고 그 적나라함으로 중식에게 “이런 일 왜 하세요? 이 일이 형부한테 무슨 보람이 되죠?”라는 직격탄을 던진다. 이 말은 감독이 우리에게 직접 던지는 말이다. 우리의 삶이 맞는 삶인지.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진정한 우리 삶의 가치인지. 은모는 “형부 언니 사랑했어요?”라며 사랑의 대한 가치도 묻는다. <파주>는 사랑에 대한 가치를 묻는 영화이지 은모와 중식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중식은 형부라는 이름을 얻자 은모에게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라고 한다. 이름을 얻으면 거리와 경계가 발생한다. 아름다움도 거리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은 거리가 생기면 조작하기 시작한다. 막강한 힘을 가진 대상을 보았을 때 인간이 자기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식은 대상을 나와 유사한 것으로 끊임없이 자기 동일화하는 것이다. 은모가 “전 꼭 진실을 알아야겠어요.”라고 하자 중식은 “다 진실이야”라고 말하면서 은모에게 키스를 하고 육체를 탐한다. 이름을 얻고 은모가 대상화되자 중식은 은모를 자기와 같게 만들어 낯설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그리고 다 진실이라며 위선을 보여준다. 그것이 사랑인가? 그것은 폭력이다. 은모의 바지가 풀어진 것으로 마무리된 장면은 사실 더 보여줬어야 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나온 이 장면은 영화 초반의 첫사랑과의 정사씬과 맞물린다. 은모에게 가한 폭력은 첫사랑의 아이에게 쏟아 부은 폭력과 같은 것이다. 폭력은 폭력으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중식이 알고 있는 사랑은 거기까지다. 중식은 바뀌지 않았다. 영화는 직선에 대한 믿음을 깨며 다시 영화의 첫 장면으로 순환한다. 중식은 파주로 유배되었듯이 다시 유치장으로 유배되며 은모는 다시 길을 떠난다. 중식은 다시 빚을 졌고 할 일이 또 생겼다. 중식이 알고 있는 사랑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파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의 가치를 묻는 영화다.
2.
경계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묻는 박찬옥의 작업은 서사에 대한 고찰과 공간의 해체로 이어진다. <파주>가 탄탄한 서사를 보여주는 것은 은모라는 탐정을 내세운 미스터리의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탐정은 그 자체로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이다. 탐정소설이 늘 지시하고 있는 것은 법의 영역이다. 법의 이면을 넘어서는 것이 더 삶의 진실에 더 가깝게 갈 수 있다는 질문을 탐정은 던진다. 은모는 진실을 알기 위해 경찰서를 찾아간다. 경찰서의 직원은 개인이 열람할 수 있는 자료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언니의 과거와 진실은 자료화되고 이용 가능한 것으로 전락하며 법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으로 은모에게 작용한다. 박찬옥의 전작들이 주로 개인의 차원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물었다면 <파주>는 탐정의 형식과 여러 층위에서 일어나는 폭력들을 통해 법과 정의의 사회의 차원에까지 그 질문을 심화시켜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공간은 문명의 산물이다. 공간은 경계가 없는 자연의 연장을 경계로 나눈 것이다. 모호한 것은 공포로 다가온다. 모호한 것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은 시간성 때문이다. 시간은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할 것을 변화될 수 없는 공간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런데 안개는 그러한 경계를 깨면서 공간을 변화될 수 있는 시간적인 것으로 바꾼다. <파주>에서의 공간의 해체는 이러한 안개로부터 시작되며 안개로 끝을 맺는다. 집, 아버지와 함께 박찬옥 영화의 전편을 흐르는 또 다른 모티브는 물이다. 중요한 것은 <파주>에서는 그 물이 은모가 가진 안개로 변환된다는 것이다. 중식의 물은 무겁다. 그 물은 쏟아져 내리는 불가항력적인 무거움이며 그 물은 경직되고 마비되는 딱딱함으로 다가온다. 그 딱딱함은 콘크리트의 차가움으로 연결되며 그 차가움은 보험회사와 철거민들 내부의 사회의 냉혹함으로 연결된다. 합리화의 과정은 곧 경직화의 과정이다. 사람들의 얼굴은 딱딱해지고 시멘트 하늘과 시멘트 공기 속에서 중식은 축축해져버린 물의 무거움으로 다시 마비된다. 하지만 안개에는 물의 한없이 부드러운 성질이 살아있다. 고착화되고 경직화된 그 딱딱함을 안개는 미분화된 부드러움으로 감싸 안는다. 그렇게 안개는 인간이 구획시키고 나누어 놓은 가치의 경계를 허물며 박찬옥이 던지는 화두를 풍성하게 한다.
3.
박찬옥의 이러한 작업은 클로즈업과 깊은 심도의 영화적 언어로도 이어진다. 경계에서 진실을 찾는 박찬옥은 그 매개체로서의 얼굴성에 주목한다. <파주>는 정확하게 은모의 얼굴 클로즈업에서 시작해서 은모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끝난다. <파주>에서는 여러 가지 감정이 발아 상태에서 섞여져 있는 4번의 중요한 은모의 얼굴 클로즈업이 나온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2번의 소방차 씬이 그것이다. 얼굴은 이중적이다. 얼굴은 가시성과 비가시성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그 경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낸다. 4번의 클로즈업은 절대적 외화면의 영역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길 위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얼굴 클로즈업에서 우리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녀의 얼굴과 그녀가 존재하는 길이라는 공간은 이질적인 공간으로 분리되며 따라서 은모가 응시하는 곳은 은모가 존재하는 3차원의 공간이 아닌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4차원을 향해 열려있는 공간이다. 그러한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알 수 없는 정신적인 실체나 그 무엇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은모의 얼굴은 서사에 틈을 내며 그 묶여 있는 비결정성의 지대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사유하게 되고 그 경계에서 은모가 인도하는 저 너머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촬영적인 측면에서 <파주>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깊은 심도다. <파주>에서는 벽을 중심으로 좌우의 초점이 다 맞는 장면들과 깊은 심도 속에 전, 후경의 층위가 구분되거나 프레임 속의 프레임이 같은 심도로 유지되는 장면들, 그리고 구조물들을 걸고 찍어 투명한 면과 불투명한 면이 공존하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심도는 쇼트를 장면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어느 하나에 종속되지 않고 한 프레임 내에 서로 공존하는 이러한 구조는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침범하고 오염시키면서 경계를 허문다. 하나의 질서는 금이 가고 그 톰에서 무언가가 갈라져 나온다. 이러한 효과는 또한 삶의 연극성을 보여준다. 연극은 어디에서 끝나고 진정한 삶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우리의 삶을 묶어놓고 있는 그 하나의 가치는 영화적 장치로도 그렇게 무너진다.
<파주>의 약점 중의 하나는 중식에 대한 박찬옥의 강박이다. 중식에 대한 동일시를 작게라도 깼어야 했다. 시나리오가 중식과 은모의 사랑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완성된 영화는 세계를 바라보는 감독의 사유가 녹아들기 마련이다. 박찬옥은 흘러가고 그녀의 분신인 은모도 흘러가는데 중식만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단점에도 감독의 재능과 사유, 영화의 장점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파주>에서 공들여 찍은 장면이 있다. 철거민들이 투쟁하는 현장을 걸어가는 고속 촬영된 은모의 장면이다. 현대 영화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되는 슬로우 모션을, 그러한 고전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다시 창조해서 새롭게 보여준다는 것. 그것은 박찬옥이 가진 영화적 재능이다.
<있다>라는 짧은 단편 영화가 있다. 지하철을 배경으로 경계에 서 있는 한 여자를 보여주는 것이 전부인 영화이다. 지하철의 그녀는 성연으로, <잠복>의 여자 주인공으로, 그리고 은모로 성숙해지며 커져 나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경계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있는’ 그것을 찾아 나가는 그녀의 행보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