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끼>는 기묘한 만남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현실에서 웃음과 통쾌함을 발견해온 강우석 감독과 뒤틀린 사회에 갇혀 어두운 욕망을 갖게 된 인간의 내면을 그린 만화가 윤태호의 <이끼>. 제작 전부터 우려와 기대를 동시에 품고 있었던 이들의 조합은 <이끼>를 2010년 개봉작 중 가장 궁금한 프로젝트로 만들었다. 제작발표 이후 약 1년 만인 지난 6월29일, 마침내 <이끼>가 언론에 공개됐다. 평가는 분분하다. 원작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는 실패한 각색, 혹은 강우석 감독의 장기가 발휘된 최고작. 흥미로운 건 두 평가 모두 강우석은 왜 <이끼> 선택했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질문에 대해 나름의 답을 구해보았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는 강우석 감독에게 직접 묻는 동시에 <이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리고 강우석 감독의 스탭들을 통해 그의 변화에 대해 들었다.
실패한 스릴러인가, 강우석 감독의 새로운 성취인가. 지난 6월29일 공개된 <이끼>에 대한 평가는 갈리고 있다. 아니, 아예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본다는 게 맞다. 강우석이란 영화감독과 윤태호 작가의 원작이 놓인 관계가 그러했을 것이다. 원작의 연재와 동시에 영화화를 기대한 이들에게 강우석은 아예 거론되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눈빛만으로 더러운 기분을 만들고, 그림자만으로 피부의 잔털들을 서게 만드는 데다, 평화로운 농촌의 풍경을 숨 막히는 미로로 그려낸 윤태호 작가의 원작과 영화감독 강우석은 아예 닿을 수 없는 평행우주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두 세계는 기어이 만났고, 베일을 벗은 <이끼>는 원작의 분위기를 담은 영화를 기대한 입장에서 볼 때, 당황스러운 결과물로 나타났다. 원작의 암울한 정서와 저릿한 공포는 없다. 독자들의 가슴을 죄어오던 시골의 음습한 풍경도 없다. 원작에서 백열등의 필라멘트가 끊어지던 찰나에 드러났던 모습. 4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가 뒤엉켜 있던 그 경악스러운 이미지도 재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끼>는 기묘하다 못해 기괴했던 인물들에게 일상적인 모습을 덧칠했고, 숨 쉴 틈 없는 원작의 긴장에 유머를 삽입했다. 스릴러란 장르의 일반적인 기질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끼>는 긴장의 끈을 수시로 놓아버리는 스릴러다. 하지만 질문은 남는다. 이제까지 흥행타율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던 강우석은 왜 이렇게 어려운 게임을 벌였는가. 언제나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고 공언했던 그는 <이끼>에서 어떻게 관객을 사로잡으려 했던 걸까. 정리하자면 이런 질문이다. 강우석 감독이 <이끼>에서 구현하고자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스릴러 강박 없는 스릴러
<이끼>의 시작은 어느 목사의 설교가 들리는 1978년 즈음의 기도원이다. 신도들의 지지를 받는 유목형(허준호) 때문에 경영에 위기를 겪고 있던 기도원장은 형사인 천용덕(정재영)에게 도움을 청한다. 천용덕은 신도들을 협박해 유목형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보낸다. 감옥 안에서도 유목형의 고난은 끊이지 않는다. 밤마다 찾아오는 손님들은 그의 배와 발바닥에 자상을 입힌다. 그럼에도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는 그에게 천용덕은 경외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고, 둘이 함께 낙원을 건설해보자고 제안한다. 여기까지는 원작이 후반부까지 감춰놓았던 비밀의 사연이다. 약 10분의 오프닝이 막을 내리면 17년 뒤다. 이때부터는 원작의 순서와 동일하다. 유목형이 죽고, 그의 아들인 유해국(박해일)이 찾아온다. 도시에서 생활하다가 사소한 누명에 휘말린 그는 명예를 회복하려다 직장에서 잘리고 아내에게 이혼당했으며 앞길이 창창했던 검사 박민욱(유준상)을 좌천시켰다. 아버지의 장례를 지낸 뒤, 해국은 마을에 정착하려 하지만, 이장 천용덕을 비롯한 전석만(김상호), 하성규(김준배), 김덕천(유해진) 등의 마을 사람들은 그를 반기지 않는다.
이야기의 순서를 바꾼 것에 대해 강우석 감독은 러닝타임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원작과 같은 구성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설명적인 영화가 될 것 같았다. 다시 그런 느낌을 지우기 위해서는 2부작이 되든 4시간 정도가 되어야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순서는 사실 강우석 감독의 관심사에 따른 선택이다. 유목형과 천용덕의 관계는 원작에서 가장 핵심적인 미스터리였다.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의심하던 해국은 결국 아버지의 정체에 의문을 갖게 되고, 원작은 후반부의 상당 부분을 유목형과 천용덕의 첫 만남과 그들이 마을을 만들게 된 경위와 관계의 파국을 전하는 데 할애했다. 원작의 순서를 바꾸면서 선행적인 이야기를 만든 이유는 강우석 감독이 미스터리에 아예 관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사실상 강우석은 어떤 장르에도 매혹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현재 한국의 상업영화 감독 가운데 자신의 영화를 설명하면서 특정 장르를 언급하지 않는 몇 안되는 감독 중 하나다. 대신 그는 공권력, 역사, 국제관계, 학원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서 발견한 소재와 인물의 성격, 영화를 통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야기하고 그것에서 파생될 웃음과 감동, 긴장감을 피력한다. <공공의 적>과 <이끼>는 ‘스릴러’란 장르로 포장되어 있지만, 강우석의 스릴러는 사실상 ‘긴장이 끊이지 않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예기치 않았던 유머 배치, 원작과 다르네
지난 4월, 인터뷰에서 강우석 감독은 “원작보다 낫지 않다면 최소한 원작과 다르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원작의 음습한 분위기와 소름이 돋는 공포와 미스터리의 긴장을 원작보다 더 월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리 없다는 건 본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원작보다 낫거나, 원작과 다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자신의 스타일을 심화시키는 형태에서 <이끼>를 담는 것이었다. 에둘러 가지 않는 명징한 이야기. 기교를 부리지 않는 정확한 묘사, 배우의 힘을 끌어내는 연출, 과감한 클로즈업의 충돌 등등. 원작에서 그 자체로 공포의 요소였던 농촌 풍경이 영화에 와서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위한 무대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대신 공포와 긴장을 조성하는 건 배우들의 표정과 행동이다. 예기치 않은 유머의 배치는 원작과 가장 다른 묘사다. 시나리오상에서 잔혹한 하드보일드였던 <공공의 적>과 역사적 비극을 소재로 한 <실미도>에서도 웃음을 끌어냈던 강우석은 원작과 달리 인물들의 일상적인 행동과 감정을 묘사하면서 유머를 만들어냈다. 이장은 해국에게는 차를 따라주지만, 혼자 있을 때는 콜라와 새우깡을 먹는 취향을 갖고 있다. 약의 힘으로 환영을 지우려 했던 원작의 덕천은 대사 그대로 ‘백지’ 인물로 묘사돼 유머와 긴장을 동시에 품는다. 그런가 하면 하성규와 전석만은 단지 악한 근성을 지닌 것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를 함께 갖고 있으며, 원작에서 인생 자체를 포기한 듯 보였던 검사 박민욱은 현실에 대한 불만과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는 인물로 설정됐다. 이 때문에 인물들의 저돌적인 에너지와 긴장을 이완시키는 유머가 교차하는 <이끼>는 원작과 다른 의미에서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강우석 감독이 지금껏 관객에게 봉사했던 방식 그대로의 영화인 셈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구현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모든 질문의 답이 될 수는 없다. 여전히 궁금한 것은 그가 왜 자신의 스타일과 더 효과적으로 조응할 수 있는 소재를 두고 멀리 있는 <이끼>를 선택했는가다. 어차피 자신이 해온 방식대로 소화할 텐데. 또 어차피 관객에게 서비스할 텐데. 이에 대해 강우석은 원작에 담긴 한국적인 스릴에 매력을 느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끼>에 대한 강우석의 진짜 관심은 다른 데 있는 듯 보인다. 원작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가져와 2시간38분이란 방대한 시간에 담아내면서까지 그가 구현하려 한 것은 무엇일까. 전작과 같은 태도의 영화인 이상, 그것이 새로운 시도에 대한 욕망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영화적 스타일을 더 깊게 밀어붙이려는 의지인지도 모른다.
강철중 vs 강철중 vs 강철중
영화의 성격상 <이끼>는 <공공의 적>과 닮았다. 하지만 영화의 구도상 가장 닮은 영화는 <실미도>다. 한정된 공간, 그 속에 놓인 출처가 불분명한 인물들. <실미도>의 그들은 살고자 하는 의지가 몸으로 체화되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의 의지가 서로 부대끼는 모습에서 강렬한 드라마를 드러냈고, 급기야 그들의 분노가 몸에서 일으키는 대결을 묘사했다. 강우석의 남자들 중에서 이들을 통칭할 수 있는 인물은 강철중일 것이다. 그 역시 육감으로 판단하고 몸으로 돌진하는 남자였다. 이성적인 판단에 의존하는 인물들과 대결한 강철중처럼 <실미도>의 대원들 또한 같은 판단을 하고 있는 국가와 맞서려 했다. 엘리트들을 조롱해온 강우석은 당연히 강철중의 승리와 이성의 파멸, 혹은 그의 패배에서 드라마를 만들어냈고, 몸이 발화하는 그들의 에너지가 곧 영화의 시작과 끝이었으며, 이는 강우석의 영화가 드러낸 새로운 성취였다.
DNA상 <이끼>의 인물들 또한 모두 강철중에 가깝다. 이들에게는 눈앞에 보이는 증거로 추론하는 성질이 없다. 해국은 천용덕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이상한 태도에서 아버지의 죽음에 비밀이 있을 거라 ‘직감’한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은 무엇이 더 합리적인지 판단하지 않고, 자신의 근성 그대로 행동한다. 유일한 이성적 판단은 이장이 하고 있는데, 정작 그의 판단을 실행해야 할 수족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곳 역시 강철중들이 모여 있는 실미도나 다름없다.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는 명확한 적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해국을 죽이려던 전석만은 말한다. “니 아버지가 가해자란 생각은 안 해봤냐?” 말하자면 수많은 강철중, 혹은 피해자들의 아귀다툼. 전작보다 더 복잡한 인물 구도를 만든 강우석은 이곳에서 <공공의 적>을 통해 보여준 영화적 성취를 구현하려 한다. 유목형과 그가 구원하려 했던 인물들의 관계를 보여주면서 원작에 없는 부분을 채워넣은 대목은 이러한 강우석의 의지를 더욱 명확히 드러낸다. 원작의 유목형과 그가 구원하려는 이들이 그저 다른 성질의 관계였다면 영화에서 유목형은 그들의 숨통을 틀어막는 존재다. 또한 이때 천용덕은 오로지 유목형을 이용하려 했던 원작과 달리 자신의 방식으로 또 다른 유목형이 되려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유목형과 천용덕이 구원의 방식을 놓고 대립하는 장면은 이장의 성격에 또 다른 색깔을 덧입히고 있다. “니는 신이 될라 캤나? 내는 인간이 될라 캤다!”란 원작의 명대사가 다른 감정을 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원작에서는 승리의 외침이자 조롱이지만, 영화에서는 자포자기의 토로이자, 질투심에 의한 분노로 들린다. 덕분에 원작이 암시한 지금 한국의 정치적 대립구도는 영화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인물들이 서로를 물고 뜯는 풍경 또한 큰 진폭으로 담겨 있다.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가져와 자신의 영화적 성취를 드러내고자 한 강우석의 욕망은 성공적으로 구현된 듯 보인다.
사회적 정의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보다
<이끼>에서 구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강우석의 욕망 외에 이면에 엿보이는 것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다. 이것 역시 그가 직접 <이끼>를 선택해 방대한 러닝타임에 담아냈다는 차원에서 추론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끼>는 이상적 정의와 현실적 정의가 충돌 끝에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강우석은 언제나 사회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정의를 말해왔다. <공공의 적>의 형사 강철중은 말했다. “기계공고 다닐 때 꼴찌에서 2번째 하던 나도 안다! 사람이 사람을 절대로 이유없이 재미로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공공의 적2>의 검사 강철중도 말했다. “한상우 나쁜 놈이잖아요. 나쁜 놈 잡아야죠.” 그랬던 그는 <이끼>에 담긴 정의의 파국에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지금의 현실에서 비춰볼 때, 자신이 주장하던 최소한의 정의가 갖는 의미를 재고해보지는 않았을까. <이끼>는 강우석의 산업적인 욕망과 영화적인 욕망, 그리고 사회적 정의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모두 감지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영화다. 흥행감독 강우석에게나, 자연인 강우석에게나 윤태호의 <이끼>는 본능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