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정재영] 인간적인 틈, 정재영식 리얼리티
2010-07-19
글 : 강병진
사진 : 오계옥

정재영은 지금 불안하다. 개봉을 앞둔 배우라면 누가 불안하지 않겠냐만 그가 처음으로 한 노역이었고 분장의 이물감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쩌면 막연한 노파심.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걱정. “다행히 본 사람들은 신경 쓸 만큼 티가 나지 않는다더라. 그래도 촬영 내내 강박관념 때문인지 영화를 볼 때도 내 모습만 살폈다. 이장의 캐릭터를 이해하기보다 완벽한 노역을 연기해야 한다는 게 더 큰 짐이었다.” 걱정이 촬영 때만 있었던 건 아닐 거다. <이끼>의 원작을 사랑한 팬들은 그의 캐스팅을 우려했다. 본인도 생각지 못한 배역이었다. 노역은 어떻게 한다고 해도, 원작자인 윤태호 작가가 싫어하는 부류의 얼굴들을 총집합시켰다는 이장 천용덕의 얼굴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당황했다. 해낼 자신이 없었다.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다. 극중에서 ‘두려움이 나를 구한다’라는 대사가 있는데, 그렇지 않더라. 두려움은 두려움이다. (웃음)” 어쨌든 그는 피부의 숨통을 막는 분장을 반복했다. 그리고 정재영의 천용덕은 원작에 없던 의미심장한 결을 추가했다. 원작의 천용덕과 영화 <이끼>의 천용덕은 다른 남자다. 원작에는 없으나 영화에 있는 한 장면. 천용덕과 유목형은 구원의 방식을 놓고 서로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구원을 받아야 할 이들이 유목형에게 반항의 기미를 보일 때, 천용덕이 그들을 제압하는 장면도 있다.

몇몇 장면 덕분에 영화 속의 천용덕은 쉽게 파악하기 힘든 욕망을 갖게 됐다. 사람을 사로잡는 능력이 뛰어난 어떤 이를 이용해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그처럼 되길 원하는 마음이 커졌다고 할까. 이 차원에서 영지를 대하는 천용덕의 입장에도 의외의 정서가 생겼다. 원작의 이장이 끝없는 소유욕으로 그녀를 대한다면 영화 속 천용덕은 어떻게 해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자괴감으로 영지를 대한다. “어떻게 보면 웃기는 남자다. 상당히 순진하지 않나. 뺏고자 한다면 뭐든 뺏을 수 있는데, 온전한 마음까지 얻어야 자신도 유목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얼마나 부러웠을까. 유목형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 때, 그를 모욕할 때는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더이상 쓸모없게 된 사람인데,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그냥 죽이지 않았을까? 어떻게 보면 상당히 인간적인 남자 같다.”

물질과 권력을 향한 집착으로 빚어진 캐릭터에 인간적인 틈을 만들 때, 배우 정재영의 기질은 빛을 발한다. 예를 들면 그가 제안하고 강우석 감독이 선택한 천용덕의 의외의 모습들. 혼자 있을 때는 과자와 콜라를 마시며 온라인 고스톱을 치고, 때로는 요구르트를 즐기며 자기보다 젊은 사람이 앞질러 가면 괜히 부아가 치미는 일상적인 면모는 우리가 아는 정재영의 얼굴을 통해 유머로 기능하는 한편, 입체적인 색깔로 드러난다. “나는 현장에서 그런 틈을 만들어가는 상황이 즐거웠다. 그런 게 인간이고 리얼리티가 아닐까. 한쪽 면만 보여주었다면 관객도 만족하지 못했을 것 같다.” 정재영의 또 다른 남자들이 영화 속 천용덕과 일정 부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의 기질 때문일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독불이나 <귀여워>의 뭐시기 혹은 <실미도>의 한상필. 외면의 극악함으로 내면의 나약함을 감춘 그들에게서 질투와 자괴감을 애써 떨치려는 천용덕의 단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 덕분에 극중에서 천용덕의 최후 또한 원작에 없는 느낌을 갖는다. “에이씨, 진짜 드러버서!” 원작에 없는 단말마의 대사다. 원작의 최후가 인과응보라면 영화의 최후는 짜증과 스트레스로 인한 폭발이다.

분장을 하던 도중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정재영은 생각했다. ‘설마 저렇게 늙지는 않겠지’, 또 ‘지금 나이에 이런 모습을 남겨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물론 ‘40년 뒤에 다시 보면 정말 어색해 보일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연기인생에서 새로운 기대가 생겼다는 게 큰 수확일 것이다. “조금은 독특한 재미를 느낀 것 같다. 앞으로도 비슷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까? 그건 정말 운에 달린 문제인데 말이다.” 일단 다음 작품인 <글러브>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리라는 건 확실하다. <글러브>에서 연기할 김상남은 잘나가는 야구선수에서 사고뭉치로 전락한 남자다. 세련된 헤어스타일과 ‘엣지’있는 패션을 가진 그는 정재영으로서는 처음 맡은 현대적 남성상이다. “성질도 있고, 건들거리는 캐릭터다. 이게 딱 내 적성에 맞는 것 같다. (웃음)” 문제는 실제의 정재영이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아는 여자>의 동치성도 야구선수였지만, 그 이후로 글러브를 만져본 적이 없다. “좋아하는 건 안 걸리고, 안 좋아하는 것만 걸리는 팔자 같다. <피도 눈물도 없이>나 <신기전> 때 액션을 했지만, 사실 액션도 별로 안 좋아한다. 귀찮아서…. (웃음)” 어쨌든 팔자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될 건 없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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