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끼>의 첫날 촬영은 유준상의 몫이었다. “유해국! 당장 그곳에서 나와!” 극중 박민욱(유준상)이 유해국(박해일)의 위험을 전화상으로 직감하고 나서 어서 자리를 빠져나오라며 긴급하게 외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의 연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첫 촬영의 부담감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떨쳐버리면 그만이다. 그보다는 시나리오 없이 시작한 영화이다 보니 상대의 뭐가 위험한지 제대로 알 길이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무슨 상황인지 알아야 나오라고 하지? (웃음).” 지금은 즐거운 첫날의 추억이 됐다.
<이끼>에서 유준상이 연기하는 박민욱의 자리는 중심보다는 외곽에 있다. 그는 검사다. 영화의 주요 인물 중 유일하게 주무대가 되는 마을에 함께 살지 않는 인물인데, 그럼에도 유해국과 과거에 얽힌 어떤 인연(?)으로 이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게 된다. 곤경에 빠진 유해국이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사람으로 영화 내내 간간이 등장하다가 후반부에 가서 강력하게 힘이 실린다. 강우석 감독은 처음에 출연 분량의 문제 때문에 캐스팅을 결정한 뒤에도 “그다지 큰 역할이 아닌 것 같아 너에게 맡겨도 될는지 모르겠다”고 고민했지만 “타협하지 않고 강직한, 진짜 살아 있는 검사 같은 인물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쪽으로 의기투합한 뒤로는 박민욱의 장면은 더 중요해졌고 촬영 중 눈에 띄게 늘어났다.
그러므로 인물로서 박민욱이 외곽에 있다고 했지만 그게 배우로서 유준상이 변두리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이끼>에서 박민욱으로 다양한 변주를 시도했다. 먼저 영화의 코믹한 터치는 많은 부분 유준상의 몫이다. 배우로서 그런 순간이 심리적으로 부담되는 때가 왜 없을까. 강 감독이 한 장면에서 말했다. “이 장면 코미디인데 못 웃기면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어진다. 그래도 뭐, 일단 한번 해보자.” 자장면을 먹다가 유해국의 전화를 받은 박민욱이 엉뚱한 소리를 듣자마자 음식을 입에 물고 코믹하게 울컥하는 장면이다. 연기가 끝났을 때의 분위기는? 스탭들은 별로 웃지 않았는데 감독은 시원하게 오케이를 불렀고 대답은 더 시원했다. “좋아! 됐어! 내가 웃었으니까 된 거야!” 그런 감독의 태도가 유준상에게 감독을 믿도록 큰 힘을 줬다.
유준상은 애초에 설정했던 대로 강직한 검사를 연기하는 쪽에도 무게를 두었다. 박민욱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마을에 들어오게 되는 그 과정에서, 유준상은 자신의 몸에 각인됐던 흥미로웠던 연기의 세포들을 기억해내어 말해준다. 박민욱이 유해국과 함께 마을에 들어서다가 입구에서 이장(정재영)과 대치하는 장면. 그때는 전면전이 시작될 찰나다. “준상아, 공기 좋은데, 라고 한번 해봐, 감독님이 그러시더라. 그런데 그렇게 한마디 딱, 하는 순간 정말 이 마을로 들어온 느낌이 확 들면서 모든 공기가 다 내게 긴장감있게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혹은 그는 열기가 달아오른 후반부도 분명히 기억한다. “서로 자기 카메라만 보고 선 채로 상대방의 소리만 들으면서 연기를 하는데, 하는 나조차도 섬뜩함이 느껴질 만큼 분위기가 팽팽했다.” 시종일관 바깥에 머물던 박민욱이라는 저 인물이 마을 안으로 본격적으로 밀고 들어올 때 마침내 <이끼>도 함께 클라이맥스로 치닫게 된다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끼>에서는 유준상의 배우로서 지닌 뛰어난 횡단력이 한 캐릭터 안에 발휘된 것 같다. 유쾌하고 헐거운 한 인간에서 악착같은 태도로 사건을 해결하려는 지독한 검사의 모습까지, 확실히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서는 안된다. 어쩌면 올해 상반기 유준상의 활약상 자체가 그와 유사해 보인다. <하하하>와 <이끼>에 출연하는 건 전혀 다른 경험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우리에게 그는 놀랍게도 “홍상수, 강우석, 너무 다른 두 감독이지만 내게는 어느 순간에 같은 느낌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며 그의 횡단이 자신의 본능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깨우쳐준다. 끝에서 끝으로 뛰되 멀리 뛰고, 멀리 뛰되 편히 느끼며 뛴다면 그건 그의 아름다운 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