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 <소름>
“이만희 이래 사라진 심리스릴러의 부활가능성.”김소희 “광기와 살인의 허기로 뒤범벅된 우리의 환부를 들켜버리다(시간이 갈수록 그 평가가 높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영화).”(심영섭) “배우들이 대사를 읊조리는 순간보다 그들이 말없이 연기하고 있을 때가 더 좋은 영화. 중언부언하지 않고 비워둘 곳을 정확히 비워둠으로써 묘한 긴장감을 창출하는 재능.”유운성 윤종찬 감독의 데뷔작 <소름>은 빙산의 일각을 노출시킴으로써 거대한 빙산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영화다. 하나둘 알아갈수록 존재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이 쌓이는 <소름>의 독특한 스타일은 기존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낯선 것이었고 평자들의 찬탄도 여기서 비롯됐다. 지난 8월4일 개봉한 <소름>은 폭넓은 대중적 호응을 얻진 못했지만 일단 영화를 본 관객에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이미지를 심어놓았다. 개봉 당시 극장을 나오는 관객이 뒤섞어놓은 이야기를 끼워맞추는 데 혼선을 빚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영화의 배경인 아파트를 한국사회의 축도로 보는 시각, 운명에 관한 신화적 해석을 들이미는 시각, 무의식의 행로를 추적하는 시각, 필름누아르의 틀로 바라보는 시각, 공포영화의 틀에서 해석하는 시각 등 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평이 쏟아지기도 했다.
2위. <고양이를 부탁해>
“스무살의 공기를 만지게 해준다.”
“그동안 우리는 스무살에 대한 이처럼 꼼꼼하고 진실한 시선을 왜 갖지 못했던가를 자문하게 만드는 영화.”홍성남 정재은 감독은 <소름>의 윤종찬 감독과 더불어 올해를 빛낸 신인이다. 스무살 여성들의 불안하고 우울한 삶을 가슴에 품는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보여준 스타일에 대해 영화평론가 김소희씨는 이렇게 말했다. “통상 리얼리즘 영화라는 타이틀을 바치며 우리가 숭배했던 영화들은 한 시대를 휘어잡았던 인식론을 풀어나가려는 감독의 초월적 의지 아래 모든 것을 종속시킨다. 역설적이게도 리얼리즘 영화가 거대한 관념론의 영화였던 것이다. 반면 거대담론을 조롱하며 작고 모호하고 유약한 일상의 세계를 탐색했던 영화들이 편집증적인 사담이나 소시민적 삶의 아이러니를 고백하는 감상문으로 빠지는 안타까움을 자주 보았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이러한 두 가지 경향 사이의 긴장을 잘 버텨냈다.”
3위. <봄날은 간다>
“따뜻한 말줄임표 같은 영화.”
“멜로의 지평 확장.”임범 데뷔작 이후 3년 반 만에 내놓은 <봄날은 간다>는 멜로드라마 안에 들어선 허진호의 세계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영화였다. 그는 이 영화에서 사랑이라는 격한 감정의 파고를 흔적없이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에 자연스레 녹여 보여준다. “그의 영화에서는 계절이, 사랑과 죽음이 야트막한 담을 넘어 기어들어와 툇마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다가 뒤뜰로 면한 창을 열고 멀어져간다. 영화세계의 넓이와 폭은 다를지언정 허진호의 영화에서 어쩔 수 없이 오즈 야스지로,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의 그림자를 보는 것은 그의 러브스토리 속에 체념하되 결코 냉소하지 않는 아시아 거장들의 휴머니즘적 전통이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김혜리)
4위. <파이란>
“타자를 뒤돌아보는 양심.”김소희 “슬픔의 송가. 삼류인생의 어깨에 내려앉다.”
배우 최민식을 올해의 인물로 꼽게 만든 <파이란>은 깡패영화와 멜로드라마의 익숙한 설정을 조금씩 배반하며 진심을 전달하는 영화였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삼류깡패 강재가 부둣가에서 파이란의 사진을 꺼내보며 울먹이는 장면을 잊기 힘들 것이다. “<파이란>은 작가적 고집으로 일관하는 영화가 아니다. 깡패 장르의 관습은 거들떠보지 않지만, 멜로적인 것에 대해선 얼마간 우호적이다. … <길>의 앤서니 퀸이 백치 젤소미나의 죽음 앞에 오열을 터트릴 때만큼 아픈 비애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파이란의 모습은 판타지일 뿐이며 관객의 특권으로 그것을 목격하지만 이 판타지에는 유희나 쾌락이 들어설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허문영)
5위. <와이키키 브라더스>
“사는 데 위로가 되는 흔치 않은 진정성의 힘.”
“노래 한 소절, 장면 하나에 애절함이 배어나온다.”홍성남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불러오는 정서적 환기력은 대단하다. 후줄근한 나이트클럽 밤무대를 지키는 이들 쇠락한 밴드 멤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영화평론가 유운성씨는 이렇게 말한다. “비좁은 공간 속에서 술에 취한 남녀들의 육체가 뒤얽히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며, 벌거벗긴 채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부르는 삼류 음악가의 육체. 이를 통해 임순례는 영화를 빌려 감히 현실의 아픔 운운하려는 자들의 입을 침묵하게 만든다. 우리의 잡담은 그저 헛된 노래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5위. <수취인불명>
“고집스런 작가란 이런 것.”
“오늘날 근대화된 한국사회의 모습을 출구가 없는 순환구조로 파악한다.”유운성 김기덕 감독의 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고른 호평을 받은 <수취인불명>은 그가 놀라운 이야기꾼이라는 걸 보여준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이 서로에게 그림자를 드리워 겹쳐진 캐릭터로 드라마의 깊이를 만드는 이 영화는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의 악순환을 거대한 벽화처럼 그려낸다. 정서적 이질감 때문에 김기덕 영화를 멀리하는 이들도 <수취인불명>의 이같은 이야기 전개방식이나 캐릭터 구성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김기덕 감독은 이 영화로 지난해 <섬>에 이어 2년 연속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윤종찬 감독의 소감
"좋은 평가를 받아서 일단 기분이 좋다. 하지만 영화를 내놓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보니까 보완할 점이 많이 보인다. <소름> 시작할 때 리얼리즘 계열 기존 영화들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위험부담이 많았다. 사람들이 보고 `이게 뭐야`라고 하면 끝장난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어쨌든 안전한 길로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다행히 좋게 봐줘서 감독으로서 도움이 됐다. 영화가 나왔을 때 평단의 반응도 비교할 텍스트가 잘 안 보여서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영화평 나오는 걸 보면서 이렇게 다양하게 볼 수 있구나 싶더라. 내가 좀더 잘 만들었으면 그런 혼선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사실 공개되기 전까지 대단히 불안했다. 이도저도 아닌 데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다. 뚝심, 잠재력 뭐 그런 걸 좋게 본 것 같다. 막상 데뷔하고 보니까 가야 할 길이 만만치 않다. 단편 찍을 때는 내 맘대로 해도 됐지만 장편영화라는 건 또다른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진심을 담을 수 있는지, 그걸 남들과 다르게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할 것이 많다."<씨네21>이 뽑은 2001 외화 베스트쿠바 노장들의 열정에 박수를!
올해의 외화
<씨네21>이 꼽은 올해의 외화에선 최근 제작된 영화와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이 함께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쿠바의 노장 음악인들의 열정이 서려 있는 빔 벤더스의 다큐멘터리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1999)은 골고루 지지를 받으며 1위에 올랐다. “역사의 질곡을 뛰어넘는 미적 쾌락의 힘”(김소희)을 가졌으며 “음악의 가치를 느끼게”(김봉석) 하는 이 영화는 “가장 영화적인 다큐”(손원평)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국에서 날아온 감동적인 영화 <빌리 엘리어트>도 “혁신적이거나 그리 용감하지는 않게 보일지라도 어쨌든 정말이지 인간적인 영화”(홍성남)라는 평을 들으며 2위를 차지했다. <아들의 방>으로 올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난니 모레티 감독의 94년작 <나의 즐거운 일기>도 “영화와 정치,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버거워하지 않으며 성찰하는 난니 모레티의 최고작”(홍성남)이라는 찬사와 함께 3위에 올랐다.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지적인 영화보기를 가능케 한다”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는 4위를 기록했다. 공동 5위는 “모더니즘 영화란 이런 것”(김소희)이라는 평가를 받은 알랭 레네 감독의 59년작 <히로시마 내 사랑>과 “보기 싫어도 또 보면 어느새 빨려들어간다”(김봉석)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88년작 <이웃집 토토로>였다.
1.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33점
2. 빌리 엘리어트 31점
3. 나의 즐거운 일기 17점
4. 메멘토 16점
5. 히로시마 내 사랑 14점
6. 이웃집 토토로 14점
7. 어둠 속의 댄서 13점
8. 멀홀랜드 드라이브 13점
9. A.I. 12점
10. 물랑 루즈 11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