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술 담을 그릇이 필요했다. 구태영화 벗으려면 새 얼굴이 절실했다. 연극인들의 본격적인 충무로 입성은 1993년부터 시작된다. 연우무대 출신이었던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가 물꼬를 텄다.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이 뒤를 이었다. 무대에 대한 진지한 경외를 유전자로 갖고 있는 그들은 굴곡으로 점철된 금단의 현대사를 스크린에 새기기 위한 더 는전 제였다. 컨셉이 명확한‘ 기획영화’도 도드라진 캐릭터를 운용할, 경험 많은 테크니션의 수혈을 요구했다. 짧고 굵게, 원 펀치로 승부하는 조연 시대는 그렇게 스르륵 열렸다.
때와 장소를 가리면 웃음이 아니다
권용운篇
10s 1966년 출생. 경기도 포천에서 뛰고 자랐다. ‘어려운 거 배워서 뭐 하나’ 수학(數學)이 싫어 수학(受學)을 멀리했다. 농가를 찾은 한 대학교 연극영화과 순회공연을 보고 ‘무대’를 동경한다.
20s 1985년 서울예대 연극과에 들어갔다. 갈증은 쉽사리 채워지지 않았다. 소설을 쓰겠다고 섬으로 들어갔다. 도로 아미타불. 대신 <이장호의 외인구단> 신인배우 오디션에 응했다. 6명을 뽑는데 1700명이 몰린 대접전에서 혼혈 야구선수 하국상 역에 발탁된다. 하지만 하국상은 까치가 아니었다. 아이의 분윳값을 벌기 위해 의정부에 차린 극단을 접었다. 대신 운전대를 잡았다. 봉고차, 트럭, 버스, 가리지 않고 몰았다. 호프집도 열었다. <투캅스>의 ‘자해 공갈’ 쇼로 잠깐 이목을 끌었으나, 배우는 여전히 ‘배고파서 우는’ 직업이었다.
30s 행운은 예고없이 찾아들지만 때론 뜸을 들이기도 한다. 성질 부리다 꼬리 내리는 꼴통 역할로 또다시 <투캅스2>의 첫머리에 등장한 그는 흥행작 시리즈의 마스코트로 뒤늦게 각인되면서, 한 통 신사 광고에 픽업된다. <채널 69> <박봉곤 가출사건> <그들만의 세상>에 출연했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리는 휴대폰 때문에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캐릭터의 인기를 따라잡을 순 없었다.
40s 최근 <주유소 습격사건2>에 출연했다. 영화보다 드라마 출연이 더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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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 죽이기>의 탈영병과 <투캅스> 시리즈 꼴통(사진)의 공통점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것이다. 잽 던졌다가 훅을 얻어맞는 순간, 권용운은 눈, 코, 입을 제멋대로 뒤틀어 험상궂은 얼굴을 순식간에 일그러뜨리는 그만의 장기로 캐릭터를 부각시킨다. 다시 보면 <마누라 죽이기>의 탈영병은 무대포(<주유소 습격사건>), <투캅스>의 꼴통은 산수(<공공의 적>)의 형님 격 캐릭터다.
탄광촌의 물고기 한양의 용이 되다
최종원篇
10s 1949년 강원도 삼척 탄광촌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춥고 배고파서 중학생 때 주신(酒神)을 영접했다. 상갓집을 돌며 공짜술을 얻어먹었고, 마음 울적하면 공동묘지에서 화투 쳤다.
20s 허리 굽혀 석탄 캐다, ‘개성시대’의 도래를 예언한 누이의 조언으로 서울예대에 입학했다. 졸업 뒤엔 영화 <비목>(1977)에 출연했으나 제작부장의 출연료 갈취에 배신감을 느끼고 충무로를 등졌다. 그 뒤 도봉산, 향림산 등을 떠돌며 연기 수련에 매진했다.
30s 무대에서 악쓰니 그래도 살 것 같았다. 약 올리기만 하던 세상도 받아줬다. 동아연극상, 연희연극상 등을 수상했다. 악덕 극단주에 맞서 서울연기자그룹을 결성, 연극판의 전태일로도 불렸다.
40s 의리에 죽고 사는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과의 인연. <아제아제 바라아제> <장군의 아들> <서편제>에 연달아 출연하며 생계를 벌충했다. 오래 기다린 만큼 기회는 금세 왔다. 칼침 놓으려다 번번이 개거품 무는, <마누라 죽이기>(1994)의 어수룩한 킬러로 인생역전. 두 얼굴 상사(<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 음험한 중신(<영원한 제국>), 간드러진 의상실 주인(<헤어드레서>), 연민 흘리는 좀도둑(<기막힌 사내들>)등 변신을 거듭했다. 1997년에는 ‘랄랄라’ 송을 히트시키며 선남선녀들을 제치고 ‘광고모델 베스트’ 넘버원에 등극한다.
60s ‘한대 맞고 시작하자’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독설을 날렸다. ‘딴따라’가 아니라 ‘예술인’들을 위해 국회의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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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한 가닥 땋아내린 올백 머리, 빨간 레슬러 복장으로 먹잇감 앞에서 어슬렁거리다 수장될 뻔한 킬러의 외마디 비명을 마주하고 웃음을 참기란 쉽지 않다. <마누라 죽이기>에서 대사 죽이고 표정만으로 캐릭터를 소화하는 최종원의 묵언 연기는 압권.
선인(善人), 웃음을 남기고 세상을 뜨다
박광정篇
10s 1962년생. 광주 사람이다. 남들처럼 지지직거리는 라디오를 붙잡고 팝송을 끼적이며 까까머리 시절을 끝냈다.
20s 성균관대 금속공학과에 진학했다. 라디오 DJ가 되고 싶어 교내 방송국원 시험에 응시했지만 떨어졌다. 다음은 극예술연구회였다. 그곳에서 뒤늦게 알았다. 살아남아 다행이라고 여겼던 1년 전의 ‘봄날’이 감당 못할 슬픔으로 찾아들었다. 총탄이 무서워 창문에 이불 대고 잤던 80년의 악몽은 그를 술판으로 내몰았다. 누군가는 죽었고, 그는 살았다. 죄책감에 학교생활은 엉망이 됐다. 신학대 진학을 다시 준비했으나 흐지부지됐다. 제대 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87학번 늦깎이 신입생이 됐다. 무대는 치열한 도피처였다.
30s 연출이 연기보다 먼저였다. ‘톡톡 튀는’ 30대 연극연출가 기수에 항상 뽑혔다. <마술가게> <저별이 위험하다> <모스키토> <매직타임> 등 내놓는 작품마다 호평이 줄을 이었다. <비언소>는 대학로 최고 흥행작이기도 했다. ‘머릿수 채우려고’ 얼떨결에 시작한 연기도 점점 폭을 넓혔다. <명자, 아끼꼬, 쏘냐>를 시작으로 <진짜 사나이> <아이언 팜> <넘버.3> 등 97년에만 7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드라마 <미스터Q> <학교> 시리즈에서도 ‘가늘고 긴’ 그를 찾았다.
40s <진술>과 <가마타 행진곡>의 영화화를 준비했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에선 캐릭터에 ‘자신을 온전히 담을’ 기회도, 결과도 얻었다. ‘누구나 오름직한 동산이 되고 싶었’던 그는 언제나 부지런했다. 극단 파크를 만들어 새 작품 구상에 몰두하던 2008년 말, 그의 숨을 앗아간 건 폐암이 아니라 선한 마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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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를 람보라 여기는 백조 사모님들의 우악스런 수작에 놀아나다 코피 터지고 비명지르는 <넘버.3>의 랭보 자리에 박광정 아닌 누군가를 앉히기란 불가능한 듯 보인다. 덧셈보다 뺄셈 연기에 능했던 흔치 않은 재능.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아라
명계남篇
10s 유년 시절 기록은 찾아봐도 없다. 1952년, 서울 출생이라는 것만 추정된다.
20s 1972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수석 입학하면서 신문에 이름(名)이 났다. 대학에선 연극을 종교 삼았다. 연희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하며 일찌감치 ‘명배우’로 소문났다. ‘서강극회’ 문성근과도 만났다.
30s 극단 신촌무대, 극단76 등에서 활약하다 극단 완자무니를 창단했다. “재미없으면 돈 내지 마세요.” “시간 버린 분들에겐 버스 토큰 드립니다.” 파격적인 관람료 후불제를 도입해 눈길을 끌었다. 지칠 줄 모르는 무대 욕심으로 이름도 얻었지만 화도 입었다. 흑백TV에 나붙은 빨간 차압딱지 떼려고 85년부터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이벤트 회사 기획자로 활동한다. 대기업 기획홍보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40s 묘비에 광고인이라고 새겨질까봐 두려워 마흔셋에 다시 연극 <콘트라베이스>로 컴백. 문화공장 CMS를 차려 만든 양희경 주연의 <늙은 창녀의 노래>는 연일 만원사례를 기록했고, 그는 ‘대학로 신의 손’으로 꼽혔다. 문성근의 제안으로 시작한 영화 출연.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시작으로 5년 동안 30편 넘게 출연했다. “부르는 대로 달려가고, 주는 대로 받는다”는 출연 원칙은 ‘값싼 배우’여서가 아니라 ‘중한 배우’였기에 가능했다. ‘한국영화는 명계남이 나오는 영화와 명계남이 나오지 않는 영화로 나뉜다’는 말도 이때 나왔다. 다시 칙칙폭폭한 열정을 멈출 순 없었다. 제작사 이스트필름을 차려 이창동 감독을 데뷔시켰고, 문화전문투자회사 유니코리아와 배우 양성을 위해 액터스21을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로 ‘스크린쿼터 사수’ 연단에 올라 ‘명사회자’가 됐다.
50s ‘조국’이 싫어 쓴소리했고, ‘정치’가 구려 ‘노사모’를 꾸렸다.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세상의 화살에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 현재 연극 <아큐-어느 독재자의 고백>에 출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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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남은 연극배우 출신으로는 드물게 ‘오버액션’을 하지 않는 배우였다. <초록물고기>에서 세퍼드가 된 배태곤(문성근)을 세치 혀로 잡는 김양길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충무로에 도입한 명조연 명계남의 분신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
안석환篇
10s 1959년생. 경기도 파주의 손 귀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가족들의 관심은 종손인 큰형에게만 쏟아졌다. 병약하고 공부 못하는 ‘둘째 아들’은 ‘14인치’ 나팔바지를 챙겨 입고 만화방을 출입했다. ‘소문난 불량학생’이었으나 ‘대학은 어떻게든 가고 싶어’ 새벽엔 학원을 다녔다.
20s 단국대학교 경영학과 79학번이 됐으나 전공은 애당초 ‘바이, 바이’. 극예술연구회 선배들의 ‘구라’에 이끌려 명동 시내의 창고 극장을 전전했다. 연우무대를 찾아가기 전, 가세가 기울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하는’ 특송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30s <달라진 저승>으로 데뷔. ‘끼는 없는데 열심히 한다’는 말만 들었다. 한달 동안 방 안에 처박혔다. 장롱에 새겨진 십장생과 대화하고, 천장의 벽지 무늬를 셌다. 미래 없는 객기와 근거 없는 자만의 20대가 떠올랐다. 그때부터 남들이 2시간 연습할 때 8시간 연습했다. 30대의 끝자락, 일감이 늘었고, 상복이 터졌다. 어쩌면 <넘버.3> <너에게 나를 보낸다> <세기말>은 감질난 휴식에 가까웠다. 반면, <고도를 기다리며> <이 세상의 끝> <남자충동> 등 그가 선 연극 무대는 언제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50s 연극 <대머리 여가수>로 고대하던 연출의 꿈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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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좀 걸린 발을 만지작거리며 재떨이에게 인터폴과 인터폰과 인터넷의 차이를 강의하는 <넘버.3>의 강도식? 하지만 대사 하나 안에 극단의 감정을 담는 연기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사진)에서 더 돋보인다. 장선우 감독을 설득해 기간원 행세하는 색안경을 ‘호모’로 만든 건 다름 아닌 안석환. 사우나 가운 걸치고 콧소리내는 색안경의 정체가 궁금한 순간 쌍욕과 함께 주먹이 터져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