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조연열전] 1999~2004
2011-02-10
글 : 이영진
사진 : 씨네21 사진팀

뜨내긴 줄 알았는데 붙박이었다. 자존심 다칠까봐 영화를 흠칫거리던 선배들과 달리 이시기 조연배우들은 영화로 ‘목표’를 수정했다. 연극이냐, 영화냐의 양자택일. 그들은 결국연극으로 돌아가지 않고 ‘영화’를 선택했다 .‘한국영화’가 대중의 관심 키워드로 급부상하면서 조연또한 흔한 ‘언저리’ 존재가 아니었다. 송강호, 황정민, 정재영 등과 같이 조연에서 시작해 주연으로 자리한 경우도 많아졌다. 조폭코미디 혹은 범죄물이 흥행몰이를 계속하면서 시리즈물이 양산됐고, 개성파 조연들의 몸값은 불과 몇년만에 배 이상 뛰었다. 활황의 파고를 타고 제작편수까지 늘자 조연급 배우들을 주인공 삼은 대담한 영화도 쏟아졌다.

배우행 완행열차를 타다

임원희篇

10s 1970년 서울 출생. 주말 밤 10시가 되면 아버지는 잠에 곯아떨어진 초등학생 아들을 말없이 흔들었다. TV 안에 게리 쿠퍼의 무표정(<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과 장 가뱅의 주름(<고양이>)이 있었다. 신일고 연극반 시절엔 <지옥의 묵시록>의 말론 브랜도의 광신도가 됐다.

20s 의심없이 서울예대 90학번이 됐고, 졸업 뒤엔 극단 목화에서 4년 활동했다. <로미오와 줄리엣>부터 ‘쭉’ 단역이었으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잘생긴 줄 알았다.

30s 서른살 무명배우를 보도 듣도 못한 인터넷이 살렸다. 류승완 감독의 인터넷 중편 <다찌마와 리>는 조회수 100만건을 돌파했다. 이전까지 한번도 못 해본 인터뷰를 100번 넘게 했다. 당나라 명필 구양순이 꾹꾹 눌러쓴 듯한 짙은 눈썹, 포마드로 정성스레 완성한 2:8 가르마, 몸서리칠 정도로 느끼한 저음의 목소리는 다이너마이트급 폭소를 선사했다. <이것이 법이다> <재밌는 영화>에선 곧바로 주연을 꿰찼다. 성공이 약이었고 또 독이었음을 깨닫기까지 오래지 않았다. <실미도> <쓰리, 몬스터> <주먹이 운다>로 풋워크부터 다시 다졌다. <식객>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퀴즈왕>으로 초심을 복기하며 서서히 예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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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날 위해 (총을) 쐈소?” “저는 개인의 행복이나 명예 땜시 방아쇠를 당긴 것이 아니어라우!” 정재영, 정규수, 이문식과 함께 나온 <간첩 리철진>의 4인조 택시강도. 콧김 내뿜으며 씩씩거리다 “니가 김재규여?”라고 핀잔 듣는 임원희의 삭발 클로즈업은 보고 또 봐도 웃음보가 터진다.

좌우명: 거시기하게 놀자

이문식篇

10s 1967년생. 전라북도 순창에서 났다. 하루빨리 출세해서 홀어머니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했다. 시험 전날 머물렀던 여인숙은 뜨거운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날밤 새운 끝에 체력 테스트에서 떨어졌다.

20s 돈 벌려면 탤런트가 돼야 한다는 친구 말에 속았다. 항공대를 그만두고 다시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87학번이 됐다. 하지만 대본보다 화염병을 즐겨 들었다. 임수경 3차 공판장에 뛰어들어 소동을 벌이다 한달 동안 유치장에 갇혔다. 면회 왔던 최형인 교수에게 이끌려 <사천의 선인> 기념공연에 섰다. 졸업 뒤엔 설경구를 따라 한양레퍼토리 창단 멤버가 됐다. 고단한 극단 생활에도 물탱크 청소, 세무사 보조, 국수 배달을 했다. <미지왕> 오디션도 봤다. 3천명 넘는 지원자 중 20등 안에 들었다. 위로가 되진 않았다. <초록물고기>에서 한석규 때리는 양아치 역을 받았다. 우물쭈물하다 “니네 뭐하다 온 새끼들이냐?”는 험한 구박만 들었다.

30s 10편 넘는 영화에서 단역이었다. 치고 오른 도약점은 <달마야 놀자>와 <공공의 적>. 해병대 출신 대봉스님으로 1천만원을 받았다. 의 자고문을 당하는 산수를 연기한 뒤 시나리오가 쏟아졌다. <라이터를 켜라>에선 무섭기만 하던 카메라가 만만하게 보였다. 전라도 사투리를 쏟아내는 <황산벌>의 거시기는 엔딩을 책임지는 막중한 조연이었다. <범죄의 재구성> <마파도>, 연달아 터졌다.

40s <플라이 대디> <공필두> 등에서 주연 맡아 쓴맛 봤지만, <평양성>으로 만회할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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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타유발자들>에서 선보인 섬뜩함은 그의 재능이지만, ‘특이한’ 예외 사례다. ‘우리가 즐기는’ 이문식은 역시 <공공의 적>(사진)의 산수다. 강철중의 발에 채여 의자 타고 주르륵 밀려갔다가 ‘원위치’하려고 바동거리는 취조장면을 꼽을 수밖에.

어쩌다 선 무대가 인생을 바꾸다

정웅인篇

10s 1971년생.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났다. 무서운 연극반 선배들에게 붙잡혀 강제로 무대에 섰다. 대접에 소주 마시고, 여고생들에게 꽃다발 받고, 두발검사에서도 제외됐다. 연극반이라서 가능한 낭만은 달콤했다.

20s 서울예대 연극과에 들어갔지만 탤런트 시험엔 번번이 낙방했다. 장현성과 외상 가능한 술집만 골라다니며 막걸리를 펐다. 주말에는 서울랜드에서 피에로 분장하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리허설>에선 빤스 입고 나오는 단역으로 출연해 용돈벌이도 했다. 궁하면 통한다. SBS 작가로 일하던 장항준의 추천으로 김병욱 PD의 눈에 들어 옴니버스 드라마 <천일야화>에 ‘대타’로 섰다. 연달아 <좋은 친구들> <은실이> <국희> 등에도 캐스팅됐다. 콤플렉스였던 날카로운 눈매는 건들거리는 불량 캐릭터로는 그만이었다. 영화쪽에서도 입질이 왔다. <북경반점> <조용한 가족> <반칙왕>, 조금씩 욕심을 부렸다.

30s 서른이 되자 잔치가 시작됐다. 영화 <두사부일체>와 시트콤 <세친구>로 이름 얻고, 차도 샀고, 집도 장만했다. 조연 벗고 주연 입은 <2424> <서클> <돈텔파파>로 주춤했지만 드라마 <발칙한 여자들> <문희>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로 만회했다. <마법사들>로 국제영화제도 가봤고, 잊고 살았던 연극(<민들레 홀씨되어>)에도 출연했다. <두사부일체> 시리즈의 종결편 격인 <유감스러운 도시>는 다만 ‘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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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알고 ‘메일’ 할 줄 아는 가방 끈 조폭 김상두. <두사부일체>에서 연정 품은 선생에게 무안당하면서도 기어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부르는 장면은 ‘네가 정말 안 웃나 보자’고 내기를 건다. ‘저게 뭐야’라고 시큰둥했다. 상두가 노래방에서 배꼽 노출하며 <호랑나비>를 부를 때 웃는다면 당신은 거짓말 한거다.

이 시대의 광대로 살겠소

유해진篇

10s 1970년 충북 청주 출생. 추송웅의 모노드라마 <우리들의 광대>에 흠뻑 취해 고등학교 2학년 때 청주의 기성극단인 청년극장에 입단, <울타리꽃>의 포졸 역으로 무대를 경험했는데, 대사없이 창 들고 서있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20s 연극영화과 입시에 낙방한 뒤 충청대 의상학과에 진학했다. 무대의상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염색 하나만은 철저하게 마스터했다. 친구 누나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현대무용도 익혔다. 배우가 되기 위해선 가리지 않고 배워뒀다. 졸업 뒤에 다시 서울예대 연극과에 편입해 송혜숙 교수 아래서 기본을 다졌다.

30s 극단 목화에서 몸 쓰고 마음 쓰고 순리 따르는 연기를 익혔다. <무사> <공공의 적>으로 얼굴을 알렸고, <타짜>의 고광렬과 <왕의 남자>의 육갑으로 활짝 웃었다. 살아 있는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별별 수를 썼고, 갖은 애를 썼다. <신라의 달밤>에선 시나리오에도 없는 파마를 하고 나타나자 감독이 감탄했고, <공공의 적>의 전라도 칼잡이용만을 위해선 시골장터까지 가서 싸구려 금박 시계를 공수해 주연배우들의 경각심을 돋웠다. 잠깐 숨이라도 고를 줄 알았는데, <전우치> 의 초랭이로 나와 보는 이의 오장육부를 흔들었다.

40s <이끼> <부당거래>뿐이랴. <적과의 동침> <마마>에도 출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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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메! 인자부터 조심하십쇼!’ 강철중 앞에서 현란한 손기술로 다종다기 연장 사용법을 강의하다 끝내 피를 보고야 마는 <공공의 적>의 용만이 눈앞의 연장들을 보고 불알친구라도 만난 것마냥 썩소를 날리는 장면은 1초 만에 캐릭터의 전사(前史)를 실감나게 일러준다.

연기 없이는 못살아

성지루篇

10s 1968년생. 충남 공주 사람이다. 엄한 아버지 눈치 보느라 집에서는 입 닫고 살았다. 반면 바깥에선 어떤 자리든 마이크 쥐고 좌중을 흔들었다. 각종 행사의 MC나 응원단장을 도맡았다.

20s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한 뒤 15년 동안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무대만 생각했다. 극단 목화에 영혼 담으면서 대사를 멋지게 뱉기보다 대사가 저절로 입안에서 광이 나도록 우물거렸다. 돈 때문에 연극을 놓을 순 없었다. 보험회사 일을 투잡으로 택한 것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서였다.

30s 치밀하고 집요한 열정으로 <부자유친>에서 영조대왕을 맡았다. 서른을 넘긴 지 얼마 안된, 이른 시기였다. 목화의 지주 오태석 선생의 입에서도 ‘어!’ 소리가 저절로 터져나왔다. 임상수 감독이 <눈물>을 같이 하자고 찾아온 것도 이때다. 배우들 모두 신인이라 눈치 볼 일 없었다. 디지털카메라로 들고 찍어서 움직이는 데 제약도 없었다. 두 번째 작품은 <신라의 달밤>. 호된 신고식을 뒤늦게 치렀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가만 서 있는 것도 못하느냐’고 테이크마다 화를 냈다. 목화의 고참 배우이자 <새들은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는다>로 우수연기상까지 받은 화려한 전력은 잠시 접어둬야 했다. 막내 스탭 붙잡고 물어물어 영화를 배웠다. <공공의 적>의 마약상 대길과 <라이터를 켜라>의 만수 역을 끝내자 <H> <가문의 영광> <휘파람공주> <바람난 가족>이 몰려들었다. 씩 하고 웃다가(<선생 김봉두>의 학교 소사), 급작스럽게 넋을 놓기도 했다(<극락도 살인사건>의 학교 소사).

40s <잘못된 만남> <식객: 김치전쟁> <용서는 없다>에 이어 2011년은 <아이들…>로 운을 뗄 참이다.

돌려보자, 이 장면!

찡그리면 무섭고, 웃으면 코믹한 독특한 외모를 지닌 그가 눈을 헤까닥 뒤집고 딴 맘을 품을 때 종잡을 수 없는 광기가 발산된다. 실감 안 나면, <바람난 가족>을 보자. “너 광국이라고 아니?” 전 주니어 웰터급 5위 광국이를 처남으로 둔 <바람난 가족>의 우편배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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