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의 재구성>(2004)과 <타짜>(2006)는 조연들이 벌이는 환상의 ‘빅 매치’였다. 장진 감독이 <기막힌 사내들>(1998)에서 A급 배우를 쓰지 않는 ‘무모한 실험’을 벌였을 때와는 ‘시추에이션’이 달라진 것이다. 백윤식과 김윤석을 보라. 또 송새벽을 보라. 주연이냐, 조연이냐의 문제를 꺼 내려는 게 아니다. 구미 당기는 캐릭터를 먼저 구하지 않는다면 제 발로 걸어들어온 재능도 소진될 수밖에 없다. 2011년의 뉴 페이스 찾기는 배우 구하기가 아니라 캐릭터 구하기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이빨’ 로 죽여주는 사나이
박철민篇
10s 1967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깡패학교’라 소문난 고등학교에 ‘뺑뺑이’로 배정됐다. 한대라도 덜맞으려고 격투기를 배웠다.
20s 중앙대학교 경영학과 시절. 연극 동아리 방에서 죽치고 살았다. 배고프면 교정의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낚았다. 밤에는 ‘후레슈’로 어슬렁거리는 비둘기를 혼절시켜 잡아먹었다. ‘날라리 운동권’이라지만, 8개월 동안 중앙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도 했다. 졸업 뒤엔 노동극단 현장에 머물렀다. 시위나 집회 등에서 마이크도 잡았다. “개런티는 못 줘도, 사우나비는 주겠다”는 말에 <부활의 노래><꽃잎>에 출연했다.
30s 가락시장에서 손가락 열심히 놀리며 중개인도 해봤으나 결국 ‘연기’라는 답밖에 안 나왔다. 대학로로 둥지를 옮겨 <대한민국 김철식> <밥> <늘근도둑 이야기>로 관객을 울고 웃겼다. 지치지 않는 ‘입심’과 ‘순발력’은 영화에서 더 유감없이 발휘됐다. <목포는 항구다>는 터닝포인트였다. 주어진 대사를 반복해서 되씹으며 맛깔나게 늘리는 폭포수 구타(口打)가 아니었다면 개사료 먹으며 재기를 노리는 ‘아싸 가오리’는 <넘버.3> 조필의 ‘아류’에 불과했을 것이다.
40s <스카우트> <화려한 휴가> <시라노; 연애조작단>과 드라마 <뉴하트>에서 트레이드 마크인 ‘말빨’을 업그레이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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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로 무진장 겁나게 허벌나게’ 떠오르는 건 <스카우트>의 서곤태. 제 몸을 도화지 삼았던 과거를 회개하는 <문신>과 미운 오리 새끼인 자신에 대한 연민을 절절하게 담은 <비광>, 두편의 연애시를 읊을 때 박철민은 폭포수 애드리브가 아니어도 웃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빤스 벗고 방가? 쓰나미 타고 방가!
김인권篇
10s 1978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연극은 교회에서 배웠다. 방과 전, 방과 뒤 교회에 들러 연극 연습을 했다. 목사님으로부터 대학로 배우가 될 때까지 밀어주겠다는 약조도 받았다.
20s 동국대학교 연극영상학부에 수석 입학했다. 막상 대학에 가니 연극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졌다. 일찌감치 영화로 눈을 돌렸다. “모여라. 촌스럽게 생긴 애들 다 모여라!” <송어> 오디션을 봤고, 산골소년 태주 역을 따냈다. 감독이 되겠다는 맘도 있었다. <송어> 현장에서 카메라 렌즈는 뭘 쓰는지 꼭꼭 메모했다. <아나키스트>의 상구 역을 맡아 선배들과 함께 나비넥타이 매고 포스터도 찍었지만 그 뒤로는 오랫동안 조연 혹은 단역만 들어왔다. <박하사탕>의 위병소 병장, <조폭 마누라>의 새끼건달 ‘빤스’, 지고는 못 배기는 <말죽거리 잔혹사>의 찍새로 사람들은 그를 기억했다. 그 사이 대학 졸업작품으로 <쉬브스키>도 찍었다. 감독 한마디에 벌벌 떨던 조급함은 군대를 다녀온 뒤 말끔히 치유됐다. 배우가 지녀야 할 상상력과 예민함,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세 번째 요소인 용기까지 얻은 뒤 찍은 <두 얼굴의 여친> <마이 파더>에선 푸근한 얼굴도 선보인다.
30s 쓰나미로 몸값이 10배 뛰었다. <해운대> 덕분이다. 이주노동자를 소재로 한 저예산영화 <방가? 방가!>에선 주연을 맡아 100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았다. 현재는 블록버스터 <마이웨이> <퀵> 촬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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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의 동춘은 광안대교 위에서 집채만한 컨테이너 박스를 피하느라 혼비백산이다. 지진나자 잔뜩 겁먹은 날다람쥐라고 해야 할까. 말하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상대 배우(?) 컨테이너의 액션에 맞춰 김인권이 내보이는 본능적 리액션은 누군가에게 전수받거나 하루아침에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악인 위에 악인 있다
박희순篇
10s 1970년 서울 출생. 눈이 나빠 군 면제 판정을 받았다.
20s 남들보다 일찍 극단 목화에 들어갔지만 막내는 안 들어오고 줄줄이 선배들만 들어와 걸레를 누구보다 오래 잡았다. ‘두고 보자’를 주문처럼 외면서 12년이 흘렀고, <심청이는 왜 두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백마당 달밤에> 등에 출연하며 “선배들도 그의 말이라면 귀기울여 듣는” 배우가 됐다.
30s 영화쪽에 눈길을 돌린 건 20대부터. 선배들이 하나둘 나가고 자신이 나갈 차례가 왔다. 그런데 늦게 들어왔던 후배 임원희, 유해진 등이 먼저 목화를 떠나는 바람에 “3년만 바람 쐬고 오겠다”는 그의 바람은 “후배 관리 못했다”는 질책과 함께 몇년 뒤로 미뤄졌다. <보스상륙작전> <귀여워> <가족> 등의 초기작에서 그가 주로 맡은 배역은 깡패였다. “더이상 나올 게 없을 정도로 독하게 하면 더 이상 깡패하라고 안 하겠지”라는 계산으로 <가족>에 덤벼들었다. <남극일기> <러브 토크> <세븐 데이즈> <헨젤과 그레텔> <작전> 등 캐릭터에 맞춰 완벽하게 ‘페이스 오프’ 하는 바람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대중에게 알릴 기회는 외려 적었다.
40s 주연작 <맨발의 꿈> <혈투>를 찍었고, 지금은 하정우와 함께 <의뢰인> 촬영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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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누군가를 해하는 악인이 <가족>의 창원을 봤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XX년이 쌍소리 못한다고 그랬지!” 정은(수애)의 머리를 재떨이로 내려찍고 나서 피묻은 손으로 담배를 피우던 창원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검은 실루엣을 드리운다.
주는 대로 받되 내 식대로 돌려준다
고창석篇
10s 1970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20s 일본어를 전공했다. 신입생 환영회 때 술 마시고 뻗어서 탈춤반 동아리방에서 하루 신세진 것이 인연이 돼 장구 치고 살았다. 졸업 뒤엔 희망새라는 극단에 들어갔다. 낮엔 연극하고 밤엔 양산의 철공소에서 일했다. 장인, 장모에게 떳떳한 사위가 되고 싶어 극단 접고 서울예대 연극과 98학번이 됐다.
30s 모터쇼 연출, 정력증강제 홍보 등을 하면서 영화 일에 뛰어들었다. <예의없는 것들>의 피아노맨으로 나왔는데 하루 촬영한 분량이 몽땅 잘렸다. <수>에서는 호텔에서 재워주기까지 하는 ‘특별출연’이라 좋아라 했는데 알고 보니 단역이었다. <야수>의 구룡파 깡패는 10분 만에 두 마디 대사 치고 촬영이 끝났다. 조무사 역을 맡은 <괴물>에선 두줄 대사를 못해 봉준호 감독에게 ‘다시, 다시, 다시’를 들었다. <바르게 살자> 때는 ‘지미집’이 ‘누구네 집이냐?’고 스탭에게 물었다. 영화연기에 문외한이었던 그가 눈을 뜨고 관객과 마주한 건 <영화는 영화다>부터. <인사동 스캔들>에선 ‘짝퉁에도 레베루가 있다’는 호진사 사장을, <의형제>에선 이주노동자를 갈취하는 베트남 보스 역을 맡았다.
30s <헬로우 고스트>의 골초 귀신. 영화 본 이들은 알겠지만 후반부에 울음 참았던 관객을 기어코 울리고 만다. <고지전> 촬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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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 보랴, 배우 눈치 보랴. <영화는 영화다>의 주책바가지 봉 감독은 인상적인 대사 한마디 내뱉지 못한다. 그의 대사들은 짧은 감탄사가 대부분인데, 그럼에도 고창석은 ‘액션!’이라는 짧은 외마디 안에 캐릭터를 기어코 구겨넣는다.
연기 달인의 깜짝 프러포즈
백윤식篇
10s 1947년 서울 출생.
20s 뭔가 진취적인 학과인 것 같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23살 때 KBS 공채 탤런트가 됐다.
30s 영화는 <멋진 사나이들>에서 공군사관생도 역할로 데뷔. 외도라기보다 외출에 가까웠다.
40s <TV 문학관>이나 특집극에서 이중섭, 나운규 등 역사적인 인물들을 연기했다. 5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던 <서울의 달>(이후 <파랑새는 있다>에서 다시 한번!)로 대중에게 바짝 다가간다.
50s <지구를 지켜라!> 시나리오를 받았다. 극영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인 줄 착각했다. 흥행 결과는 참담했지만 외계인에게 납치당해 머리를 홀라당 깎인 강 사장의 수모는 충분히 가치있는 것으로 판명됐다. <범죄의 재구성>에선 ‘김 선생’이라는 브랜드로, “카리스마와 코미디를 뒤섞는” 독특한 그만의 연기 블렌딩을 개시했다. “청진기 대보니 진단이 딱 나온다.” 무표정하게 뱉은 말은 모조리 유행어가 됐다. 돈과 배, 그리고 자존심밖에 없는 <범죄의 재구성>의 김 선생이 없었더라면 <그때 그사람들> <싸움의 기술> <타짜> <천하장사 마돈나> <전우치> 등도 다른 모양새의 영화가 됐을 것이 분명하다.
돌려보자, 이 장면!
<범죄의 재구성>에서 꼭 한 장면을 골라낼 수 있을까. 상대 배역이던 박신양이 촬영 내내 “저 양반은 저렇게 스타트를 해서 이 신을 어떻게 마치려고 하나” 그랬다는데, 정말이지 파격으로 무장한 김 선생은 장갑 하나 끼는 장면에서도 긴장을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