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될성부른 떡잎으로 자랄 거야
2011-03-31
글 : 김도훈
많은 아역 출신들이 성인배우로 순탄하게 성장하는 까닭
<미남이시네요>의 장근석

아역배우 기사라면 무릇 그렇듯이 비극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여기 이르게 생을 마감한 아역배우의 리스트가 있다. 지난해 3월 코리 하임이 사망했다. <루카스>(1986)와 <로스트 보이>(1987)로 코리 펠트먼과 한데 묶여 80년대 할리우드의 가장 돈값하는 아역배우 출신의 코리 하임은 마약 중독으로 재활원을 오가다가 결국 사망했다. 코리 펠트먼은 어떻게 됐냐고? 다행히도 그는 죽지 않았다. 대신 싸구려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전전하며 별볼일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리스트는 끝도 없다. 한국에서도 아역배우는 성인배우로 성장하지 못한 채 경력의 죽음을 맞이하는 특정 배우군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물론 한국은 할리우드가 아니고, 약물 중독과 지나친 스타덤의 고통도 비교적 덜한 편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때 국민적인 꼬맹이었던 ‘순돌이’ 이건주와‘미달이’ 김성은의 성장통을 잘 알고 있다. 여전히 우리에게 성공적인 아역 출신 배우의 대표적인 사례는 5살 나이에 김기영의 <황혼열차>로 데뷔한 안성기와 1971년에 아역 탤런트로 활동을 시작한 강수연이다. 얼마나 성공 사례가 부족하면 아직도 이 국민적 배우들의 이름만이 유일한 성공 사례냐고 인상을 찌푸릴 법도 하다.

아역배우가 성인배우로 성장하는 건 100% 안전한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만약 당신이 80년대의 할리우드 아역배우였거나, 90년대 한국 아역배우였다면 독극물을 마시는 심정으로 극약처방을 내려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성인배우로 인정받기 위한 가장 독한 방법은 성적으로 과감한 영화에 출연함으로써 관객의 뒤통수를 내려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브룩 실즈의 <블루 라군>(1980)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블루 라군> 이전에도 루이 말의 <프리티 베이비>(1978)에서 열두살 창녀를 연기해 할리우드를 통째로 들었다 논 적이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경우는 이재은이다. 이재은은 성인배우로 진입할 단계가 되어서도 여전히 <토지>의 서희로만 기억되는 이미지를 벗어던지기 위해 <노랑머리>(1999)에 출연했다. 한국 최초로 ‘등급 보류 판정’을 받은 이 영화를 통해 이재은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독약처방의 문제는 그것이 한번의 일탈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그건 아역 출신에게 활로를 열어주는 동시에, 활로를 닫아버리기도 한다. 브룩 실즈와 이재은의 이후 경력이 그걸 증명한다.

인식의 변화 _ 장기적으로 바라보다

할리우드에서도 아역 출신으로 성공적인 성인배우가 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열살의 나이에 <랫시의 귀향>(1943)으로 데뷔한 엘리자베스 테일러, 겨우 다섯살의 나이로 데뷔한 내털리 우드, 조디 포스터 정도가 예외다. 2000년대가 되면서 세상은 달라졌다. 최근에는 비교적 순탄하게 성인 연기자로 성장하는 아역배우들을 할리우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칼렛 요한슨, 크리스틴 스튜어트, 크리스티나 리치, 커스틴 던스트 같은 배우들은 아역의 이미지를 훌륭하게 떨쳐내고 성인 연기자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올해 오스카를 수상한 크리스천 베일과 내털리 포트먼이 공히 아역배우 출신이라는 것도 꽤 근사한 일이다. <트와일라잇>시리즈의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패닉룸>에서 (그 자신도 전설적인 아역 출신인)조디 포스터의 딸을 연기한 아역배우였다. 모두가 아역 시절만큼의 인기를 누리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커다란 트라우마 없이 직업 연기자의 생활을 계속 해나가는 건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내털리 포트먼 세대 이전의 문제는 할리우드가 요구하는 아역이 전형적이고 고정적인 틀에 머물렀다는 거다. 그 때문에 아역배우들은 성장하고 나면 새로운 역할을 스튜디오로부터 얻어낼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내털리 우드 같은 선구자들이 예외적으로 성인배우 진입에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어린 시절의 귀여움을 대신할 만한 성적 매력을 새롭게 발견한 덕이 클 것이다. 그렇지 못한 배우들은 귀여운 외모가 사라지는 순간 스타덤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90년대 이후에 등장한 아역배우들에게는 고전 아역배우들에게 없었던 중요한 디딤돌이 하나 있다. 바로 ‘틴에이저 무비’ 시장이다. 80년대 존 휴스 이후 급격하게 성장한 틴에이저 장르를 통해 커스틴 던스트나 스칼렛 요한슨, 내털리 포트먼 같은 배우들은 아역과 성인 중간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만약 <브링 잇 온>이 없었더라면 커스틴 던스트가 여전히 할리우드에 발붙이고 서 있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도 아역배우의 성인배우로의 진입 장벽이 조금씩 낮아지고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2000년대 이후 아역배우들은 벨벳을 타듯 부드럽게 성인배우의 위치로 이동한다. 문근영과 유승호는 국민 남녀동생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끌고 갈 수 있을만큼 무게있는 배우로 성장했다. TV드라마 <반올림> 출신의 유아인은 새로운 한국영화의 아도니스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백성현 역시 6살에 데뷔한 15년차 연기자다. <다모> <천국의 계단> <영웅시대> 등 수많은 드라마에서 주연 배우들의 아역을 연기했던 그는 말한다. “선배들의 아역을 연기하는 것은 그저 계주를 하는데 1번 주자가 되어 먼저 뛰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연기하면서 주눅이 든 적은 없었다.” <전원일기> 출신의 류덕환은 아역의 그림자를 지우고 <천하장사 마돈나>로 성인배우의 궤도에 진입했다. 매니저는 “물론 류덕환은 유승호 같은 친구들처럼 아역 때 주목을 크게 받았던 배우 출신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성인배우로 처음 주목받기 시작한) <천하장사 마돈나>는 원래 다른 영화에 캐스팅됐다가 욕심을 내고 오디션을 봐서 합격한 영화다. 당시 류덕환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할 무렵이었고 일종의 모험을 하고 싶었던 부분이 있다.” 모험은 통했다. 류덕환은 드라마를 통해서가 아니라 충무로 영화를 통해서 진지한 배우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금 아역배우들에게 열어준 선구자 중 한명이다.

시스템의 변화 _ 전문 교육기관 창설

지금 한국의 아역 출신 배우들이 선배 세대보다 수월하게 성인배우로 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1번가의 기적> <해운대>로 몇몇 스타급 아역배우들과 작업한 경험이 있는 윤제균 감독은 “예전에 비해서 부모들도, 아역배우들도 좀더 장기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또 요즘은 아역배우들도 매니지먼트사의 도움을 받고, 또 부모와도 상의를 한 뒤 전략적으로, 장기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이 든다. 예전에는 그런 게 거의 없었다.” 아역배우를 좀더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아역배우 전문 기관들이 생겨난 것도 아역들의 성인배우 진입을 돕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원래 아역배우만을 전문적으로 교육하고 관리하는 기관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없었다. ‘연예인 사관학교’라는 별명을 가진 ‘MTM 아카데미’가 아역배우 부서를 따로 두고 관리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2005년 ‘키즈 플래닛’과 ‘별사탕 엔터테인먼트’가 생기면서 업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한 아역배우 에이전시 관계자는 말한다. “키즈 플래닛이나 별사탕 엔터테인먼트 같은 아역 전문 기관들이 생겨나 아역의 시장성을 넓히고, 출연료를 올리고, 일정 정도 매니지먼트 역할을 하면서 아역에 대한 처우를 바꾸는 역할도 했다. 그게 아역배우들이 주니어배우, 이후에는 성인배우로 성장하는 데도 득이 됐을 것이다.”

선구적인 아역배우 전문기관 중 하나인 (주)별사탕 엔터테인먼트의 송우석 실장은 아역배우들의 성인배우 진입이 예전보다 비교적 수월해진 데는 전문 기관의 창설, 아역배우와 부모의 인식 변화뿐만 아니라 미디어가 선호하는 아역상의 변화에도 이유가 있다고 설명한다. “예전에는 아역의 외모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외모가 우선순위가 아니다. 연기력과 개성이 가장 중요하다. 최근 방송과 영화 업계가 아역을 하나의 배우나 하나의 캐릭터로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하면서 우선순위가 달라진 것이다. 아역들이 성인배우로 잘 자랄 수 있는 어떤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할까. 이를테면 <거북이 달린다>에서 김윤석의 딸을 연기했던 김지나는 아역으로 오래 활동을 했는데도 왠지 시골 아이 같은 마스크 때문에 미래가 좀 불안했다. 하지만 <거북이 달린다>의 제작진은 진짜 충청도 아이처럼 보이고 또 탄탄한 연기력이 있는 아역을 원했고 덕분에 김지나가 주목받을 수 있었다.”

<집으로...>의 유승호

아역상의 변화 _ 외모보단 연기력과 개성

송우석 실장은 “예전에는 어떤 아역이 잘될 거라는 느낌이 있었지만, 최근 몇년간은 럭비공 같았다”고 말한다. “2005년 창립 무렵에는 우리가 된다고 본 애들은 다 됐다. 정형화된 아역의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가장 크게 무너뜨린 게 <해운대>와 <헬로우 고스트>의 천보근이다. 보근이는 외모가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활동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KTF 광고 ‘일곱살의 쇼’ 오디션에 당시 인기있던 다른 아역배우들과 보냈는데 결국 보근이가 낙점됐고, 이후 영화 제의도 이어졌다. 예쁘고 귀여운 아이들이 아역의 주류였는데 천보근이라는 배우가 완전히 그걸 깨버린 거다.” 그에 따르면 김새론 역시 좀더 잘 알려지고 전형적으로 예쁜 얼굴을 가진 유명 아역을 제치고 <아저씨>의 공개 오디션에서 역할을 따냈다. 아역배우의 이미지를 대하는 업계의 오랜 고정관념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보근과 김새론 같은 후발 아역스타들의 부모와 에이전시가 성인배우 진입의 모델로 삼고 있는 기준은 누구일까. 에이전시들은 하나같이 유승호를 꼽는다. 송우석 실장 역시 “장근석, 문근영, 유승호… 누구보다도 유승호”라고 단언한다. “유승호라는 배우는 한국의 아역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집으로…> 시절부터 국민적인 아역스타였는데 아역이라는 딱지를 정말 자연스럽게 벗어던지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요즘은 유승호의 나이가 성인과 아역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정도다. 요즘 업계에서 말하는 ‘17살 이전은 아역, 이후는 성인배우’라는 기준은 유승호가 만든 거나 마찬가지다.” 지금 방영 중인 드라마 <욕망의 불꽃>으로 첫 성인 연기에 도전한 유승호는 제작발표회에서 말한 바 있다. “언제까지나 아역배우 꼬리표를 가지고 갈 수는 없지 않나. 다른 아역배우들에게 좋은 본이 됐으면 한다. 아역들은 배역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위험하지만 기존에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을 해봄으로써 다른 아역들에게도 용기를 갖게 하고 싶다.”

<신데렐라>의 신세경

아역전문 기관의 창설, 아역배우와 부모의 인식 변화, 미디어가 선호하는 아역상의 변화. 이 세 가지가 지금 아역배우들의 능수능란한 성인배우 진입에 큰 영향을 끼친 요소라면,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할 수도 있다. ‘휴식’이다. 대표적인 경우는 박신혜와 신세경이다. 박신혜는 초등학교 6학년 시절부터 아역배우로 활동했으나 대학 시절 잠깐 동안 연기를 그만뒀다. 그녀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대학생활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런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내 경험이나 생활바탕도 없어지겠다고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 신세경 역시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서태지의 <Take Five> 포스터로 데뷔한 신세경은 아예 연예계 바깥에 숨어 있었다. 김지운 감독이 “<장화, 홍련> 때는 연락이 닿지 않아 같이 작업할 수 없었다”고 말했을 정도다. <집으로…> 이후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몇년간 학업에만 열중했던 유승호도 같은 경우다. 이들의 전략은 아역 시절의 거품과 아우라를 시간을 이용해 지워버린 뒤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윤제균 감독은 이런 전략이 성인배우로서의 성장에 큰 이점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지금 인기있는 많은 아역들이 성장기에는 몇년간 연기를 중단하고 휴식을 취한 다음, 새로운 모습과 작품으로 다시 시작을 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아역으로 지나치게 소모되면 성인배우가 되면서 스스로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한국 아역배우들에게 성인배우로 향하는 진입 장벽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그건 지난 아역배우들의 지지부진한 과거를 목도한 부모와 배우들의 학습 효과 덕분이기도 하고, 전형적인 아역배우를 원하던 방송과 영화계의 취향이 극적으로 달라진 덕이기도 하다. 한 아역배우 매니지먼트사는 묻는다. “만약 미달이를 연기한 김성은이 지금 아역을 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순풍산부인과>가 방영되던 90년대 후반과 지금의 상황이 극적으로 변한 만큼, 아마 김성은에게도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까. “당시에는 아역배우들 역시 외모지상주의였다. 지금은 <지붕 뚫고 하이킥!>의 진지희가 당시의 미달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미래도 더 밝다. 아역배우들에게도 이제는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연기력과 개성이 중요한 시대가 됐다. 연기로 승부를 보지 않으면 성인배우로 성장하는 건 힘들다는 이야기다.” 물론 아직 아역배우들이 성인배우로 손쉽게 진출할 수 있는 때가 완벽하게 무르익은 것은 아니다. 다만 문근영, 유승호 같은 배우들이 굳건하게 닫힌 성인배우의 관문을 열어젖혔고, 체계적인 시스템 속에서 교육받은 아역들이 좀더 수월하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문틈에 발을 내딛고 있는 건 분명하다. 아역배우의 시대는 이제 막 멸종으로 가득한 중생대를 지나 신생대로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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