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이제훈] 틀에 갇히지 않은 다양성
2011-04-25
글 : 이화정
사진 : 최성열
<파수꾼> <고지전>의 이제훈

<파수꾼>이 기폭제였다. 27살의 배우 이제훈은 자신에게 등 돌린 친구 때문에 상처입고 결국 죽음을 택하는 19살 ‘기태’로 자신을 알렸다. 이미 한참 전에 통과한 10대의 기억을 불러오는 과정. 교복 입은 이제훈은, 소년의 천진함에서부터 상처로 생긴 내면의 미세한 균열, 이후 서서히 파괴해가는 ‘기태’의 변화 모두를 발산했다. 한 지점에 머물지 않는 캐릭터 기태는 이제훈이라는 낯선 배우를 각인시킬 절묘한 기회였다. 조인성이 가질 법한 고운 남성성에서부터 엄태웅의 거친 순박함까지 남자배우로서 이제훈이 가진 마스크의 스펙트럼은 넓었다. 또래의 일상적인 면모에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박해일의 연기를, 학교 짱으로 군림하는 기태의 모습은 투박하지만 계산되지 않는 류승범의 연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물론, 기존 충무로 배우들의 조각맞춤만으로 이제훈을 설명하는 건 무리다. 익숙한 연상을 뛰어넘어 그는 온전히 ‘이제훈만의 기태’로 수렴됐다. <파수꾼>은 1만8천명의 선택을 받은 화제의 독립영화가 되었고, 첫 주연을 맡은 ‘배우 이제훈’에 대한 인식도 급속도로 성장했다. 그를 ‘신선한 발견’이라 칭한 봉준호 감독의 찬사를 굳이 빌리지 않아도 충무로 관계자들 모두에게, 이제 이제훈은 새로운 등장과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다.

신인배우로 분류하기에 좀 많은 나이지만 그에 반해 이제훈은 앳된 외모를 지녔다. 공학을 전공하다 뒤늦게 연기를 선택했고, 힙합춤에 열중하고, 연극 무대로 뮤지컬로 또 단편영화로 닥치는 대로 연기를 했다. 1~2년 한번 해보자고 덤볐던 연기의 맛을 보고, 제대로 배우가 되고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08학번 학생이 됐다. 단연 그는 동기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조급해하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선택한 일이다보니 연기를 배우면서 스스로 단단해지는 느낌이다. 작은 일에 반응하거나 실망하는 일이 다른 친구들보단 적다. 배우라는 갈 길이 구만리라면 이제 난 겨우 5~6년차, 시작이니 말이다.” 이제훈이 가진 아우라에 대한 해답은, 아마 그가 가진 이 내외적인 차이에서 상당 부분 찾아질 것이다. 다양한 범주의 연기를 소화하는 전도연의 선택을 선망한다는 그는, 자신 역시 틀에 갇히지 않은 선택을 하려 노력한다. <약탈자들>에서 주인공 ‘상태’의 아역이 시작이었다. 김조광수 감독의 <친구사이?>를 통해 성적소수자의 연기자로 크나큰 모험을 감행하는 듯 싶더니 <김종욱 찾기> 같은 로맨틱 멜로에선 장르에 딱 맞는 구김살 없는 연기를 선보인다.

이 배우의 잠재력을 폭발하게 만들 작품은 여름 개봉을 앞둔 장훈 감독의 신작 <고지전>이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작품에서, 이제훈은 전쟁의 참상을 겪으면서 내적, 외적으로 파괴되는 어린 중대장 ‘신일영’ 역을 연기한다. 여린 소년의 모습 뒤로, 카리스마와 에너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캐릭터인 만큼 충무로 남자배우들이 가장 탐내는 역할이기도 했다. 장훈 감독은 신선한 얼굴이되 능숙한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를 찾았고, 검증되지 않은 신인배우에게 세번의 오디션을 요구했다. 캐스팅까지 3개월의 기다림 끝에 <고지전>에 합류했다. “<파수꾼>으로 받은 칭찬이 큰 만큼 이번엔 부담도 크다. 경험이 없다는 변명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젠 돌아갈 수 없게 된 거다.” 다행히 이제훈은 그 부담을 연기에 올인하는 자양분으로 삼았다. “연기를 하면 할수록 나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시나리오 읽고 분석하는 것과 달리 막상 연기를 하면 그걸 넘어선 다른 게 나온다. 감독님, 스탭들에게 자극받아서 내가 변하는 것 같다.” 진지한 연기론 뒤로, 그는 요즘 홍콩에 빠졌다. 주성치를 좋아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영화 촬영지도 찾아가 본다. “여행? 난 그냥 무작정 걷는다. 개봉하기 전에 조만간 한번 홍콩에 가서 또 걸어보고 싶다.” 긴 배우 여정의 시작, 그의 출발이 산뜻하다.

<고지전> 장훈 감독이 본 이제훈

“나이나 경험에 비해 캐릭터에 대한 집중도가 굉장히 높다. 여느 다른 배우와 비교해봐도 이 정도로 강한 집중력을 보여주는 배우는 많지 않다. 외적인 장점도 크다. 꽃미남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려한 외모인데, 그 안에 남성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한없이 착한 이미지와 그 반대의 악함이 공존하고 있는 마스크다. 어떤 캐릭터로 분하냐에 따라 완벽히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외적인 면이 그의 연기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는 또 하나의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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