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가드를 올릴 시간이다. 2011년 9월19일 오후 7시45분 김병욱 사단이 세 번째 하이킥을 날린다. 주간 일일시트콤 <하이킥3: 짧은 다리의 역습>(연출 김병욱·김영기·조찬주, 각본 이영철·홍보희·장진아·백선우, 이하 <하이킥3>)은 120회로 6개월에 걸쳐 방영될 예정이다. 8월5일 뉴질랜드에서 일부 촬영이 시작되고 8월 말 세트 촬영에 돌입한다. 편의상 여전히 시트콤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김병욱 작가/감독의 시트콤은 이제 고유한 화법과 관습을 가진 25분 길이 드라마로서 독자적 양식을 확립했다. <하이킥> 시리즈가 세상에 나온 5년 전부터 달 기지에서 지내다 방금 귀환한 시청자가 아니라면 이제 김병욱 시트콤에서 오로지 웃음만 기대하는 이는 없을 터다. 해피엔딩은 언감생심, 나아가 좀더 단련된 시청자라면 내심 각오조차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이킥3>의 종장에서도 어쨌거나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떤 허무와 만나게 되리라고. 다만 그 영도(零度)에 이르는 길은 각성을 동반한 웃음과 눈물로 무수히 굽이칠 것이다. 와글와글한 등장인물들의 인생에서 썩둑 베어난 반년을 함께 살아가며 우리는 어느 때보다 살아 있음을 실감할 게 분명하다. 김병욱 시트콤에는 언제나 그처럼, 우리 육신은 어김없는 속도로 닳아가고 추억은 쌓여가고 있다는 사실을 절절히 감각하게 하는 마력이 있으니까. <하이킥3>의 첫회분 시나리오를 훔쳐보았다. 좋은 작가들이 그렇듯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작가의 육성이 들려왔다. 한바탕 웃어젖힌 다음 김병욱 PD의 진짜 육성을 들으러 달려갔다. 전설이 된 지난해 3월19일 <지붕뚫고 하이킥!>의 충격적 엔딩 이후, 베르테르도 아닌데 전국적으로 우울한 영혼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그에게 지난 1년의 근황부터 질문을 시작했다.
-방영기간에는 휴식을 애타게 기다리지만 막상 닥치면 그것 또한 자질구레한 근심이 즐비한 시간일 따름이라고 예전에 말했다. 지난 1년은 어떻게 지냈나.
=생활 습관에 속았다. 가령 내일까지 뭘 해야지 정해놓고 ‘내일’은 원칙적으로 자정부터 시작인데도 올빼미족이니까 새벽 서너시에야 잠든다. 결과적으로 자고 일어나면 거의 ‘오늘 저녁’이 된다. (웃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7, 8개월이 흘러 있었다.
-직접 체감한 <지붕뚫고 하이킥!> 결말의 여파는.
=사회적으로 학습된 감정인데 타고난 성정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어머니는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지만 그건 사회적으로 어머니는 사소한 욕심은 배제하고 희생해야 한다고 배워서였을 수도 있다. 돌이켜보니 <지붕뚫고 하이킥!> 하면서 침체됐던 내 감정도 냉정히 생각하면 과장된 면이 있다고 본다. 엔딩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작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장 크다. 그러나 다시 돌아간다고 결말을 바꿀 것 같지는 않다.
-<연애시대>처럼 마음이 끌린 다른 드라마의 영향이 작품에 반영되는 예도 있었다. 쉬는 도중 재밌게 보거나 영감을 받은 작품은.
=코언 형제의 <시리어스 맨>이 좋았고 <킹스 스피치>는 뻔했지만 뭉클했고 <부당거래>는 류승범 캐릭터가 정말 웃겼고 기대 없이 봤던 소년소녀의 아기자기한 성장영화 <Flipped>는 달콤했다. <언 애듀케이션>은 <하이킥3>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영화다. <파수꾼>도 좋았다.
-<거침없이 하이킥!>과 <지붕뚫고 하이킥!>은 제목의 각운을 맞췄는데 <하이킥3>는 번호를 붙이고 “짧은 다리의 역습”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크게는 저항을 못하고 작게 반항하는 습성이 있다. 두 번째 <하이킥> 작명을 고민할 때 <느닷없이 하이킥> <뜬금없이 하이킥> 같은 아이디어들이 많았는데 부사만 바꾼 반복은 싫어서 <지붕뚫고 하이킥!>으로 갔다. 이번에는 지붕보다 더 위로 <구름뚫고 하이킥!> 등이 나왔는데 독립적 느낌을 원해서 이렇게 정했다. 이것도 작은 반항인데 <시크릿 가든>을 <시가>라고 부르는 것처럼 줄임말 많이 쓰지 않나. 그걸 좀 못하게…. 이 제목은 줄이기 만만치 않을 거다. (좌중 폭소)
“우울했기 때문에 관찰할 수 있는 모습들이 있다”
경제적 무력함으로 인간적 품위를 잃는 상황의 코미디는 한번도 김병욱 작품의 중심을 벗어난 적이 없다. <지붕뚫고 하이킥!>이 부잣집에서 식모살이하는 세경 자매의 절대적 빈곤과 벌이가 소비를 못 당해낸 정음의 상대적 빈곤을 이야기했다면 부도난 중산층 가정의 도피생활로 출발하는 <하이킥3>는 몰락의 서사다. 이는 김병욱 감독과 작가들이 <거침없이 하이킥!>을 마치고 준비했던 16부작 미니시리즈와 잇닿는 부분이 있다. 제반 사정으로 제작되지 않았던 그 드라마는 조류독감과 IMF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친기업 정권이 들어섰다고 환호작약하던 닭고기 회사 사장 가족이 무리한 확장으로 쫄딱 망해 단칸방에 모여 사는 내용이었다.
-계급적으로 전락한 사람들이 느끼는 빈곤이 주요 소재 중 하나가 될 듯하다.
=가난을 진정으로 경험한 적 없는 사람들의 문화충격과 부적응이 보일 거다. 초등학교 시절 잘살다 망한 친구 집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티나 크래커를 안 사준다고 엄마한테 화를 내는 걸 본 기억이 있다. 가난에 대한 내성이 없는 거다. 경제적 결핍을 자주 다루는 까닭은, 감정의 사치를 부리기 싫어서다. 돈은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코미디이건 비극이건 인간의 본성이 끌려나오는 적나라한 드라마가 나온다. 노인의 재취업을 다룬 TV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주유소 취업을 위해 기계적으로 인사하는 법을 사흘 내내 배우시더라. 물론 재취업은 바람직하고 2차 교육은 당연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돈 때문에 어느 정도 굴욕을 감수해야 하는 일로 비치기도 했다.
-<하이킥3>의 형식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회고조 내레이션이 액자 형식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2052년 항문외과의사 출신 70대 작가 이적(이적)이 30대 중반이었던 2011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만났던 사람들을 추억하는 포맷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도 1화에서 우주비행사 서경석이 부모 세대의 일을 들려주긴 했지만 단발성이었다. 이번에는 어떤가.
=그걸 심화시켰다. 관조적이고 시니컬한 사람의 시각에서 나오는 내레이션이 내내 나온다. <지붕뚫고 하이킥!>의 신애가 서울 문물에 놀라듯 2052년의 눈으로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가치관을 뒤집어보고 싶은 생각이다. 누가 30대의 이적한테 “돈도 많이 벌고 의사인데 키가 좀 작네”라고 말하는 장면에 “21세기 초는 이상한 시대였다. 남자의 외모를 보는 기준으로 키가 중요했다”는 70대 이적의 내레이션이 깔리는 거다. 예컨대 2052년에는 남자가 입 큰 순서로 멋있을 수도 있다. (웃음) 이적은 비단 미래 시점이라 관찰자가 되는 게 아니라 우울증이 있다. 우울했기 때문에 관찰할 수 있는 모습들이 있는 거다.
-1화를 여는 이적의 내레이션은 2011년의 키워드를 나열하다가 “그리고 여전히 돈, 돈의 해였다”라고 요약한다. 그것이 김병욱 PD가 보는 2011년의 초상인가.
=깊은 생각은 아니다. 단적으로 이적은 우울증인데 병원을 그만두는 동기는 돈이다. 동료 윤계상은 가난한 환자를 무단수술해줘서 징계되는데 덩달아 이적은 말없이 나가는 거다. 다들 “아니 쟤는 왜 나가?” 하고. (좌중 폭소) “나는 터널 같은 시간을 통과하고 있어” 독백하면서도 돈은 많이 벌고 싶은 욕망을 표출한다.
-우울을 증상으로 호소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 때문에 실제로 실익을 버리는 사람은 드문 시대인 것도 같다. 그래도 역동적으로 경쟁해야 돈을 벌 텐데 우울증은 동기부여를 약화시키지 않나.
=그러니까 ‘돈의 해’라는 건 역설적으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조차 돈을 추구하는 시대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웃음)
이전 두 번의 <하이킥>과 이번 <하이킥3>가 다른 점
지금까지 김병욱 사단의 시트콤은 대개 3대가 한집에 모여 사는 가정이 중심에 있었다. 한데 <하이킥3>에는 40대 안내상-윤유선 부부가 최연장자이고 조부모 세대와 어린이가 사라지고 없다. 청년 세대에 인물이 몰려 있다. 경제력과 전통적 가족 내 서열에서 최고인 절대 권력자의 존재는 불합리한 일을 무데뽀로 강요할 수 있는 만큼 코미디의 강력한 장치라는 점은 김병욱 PD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말하자면 모험이다. <순풍산부인과>로 치면 장인 오지명 없는 사위 박영규의 코미디가 그만한 힘이 있을 것인가의 문제다.
-노년층과 어린이 인물을 배제했다. 에피소드 소재의 폭이 좁아지는 것을 감수하면서 집중하려는 부분은 무엇인가.
=실은 지금도 기획을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고 이순재 선생님을 모셔와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다. (좌중 폭소) 다만 어르신들의 코미디는 원체 무게감있는 분들이라 상대적으로 쉽다. 그래서 양심상 이제는 거기 의존하기가 죄송한 면이 있다. 어린이 캐릭터도 미달이, 해리 다음에 또 누가 있을 수 있을까. 현실에서 3대가 동거하는 예가 일반적이지 않은데 코미디를 위해 비현실적인 구도를 고집하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하다. 실제로 세대가 몰리면 어떤 에피소드를 A에게 줘도 되고 B에게 줘도 되는 충돌이 생겨 까다롭지만 청춘시트콤이 아니라,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 사람들의 <프렌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제 와서 <프렌즈>라니 낡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 세대를 통해 현실 세태를 좀더 깊이 반영하고자 했다. 단, 그것만으로는 공중파에서 흥행에 무리가 있는 설정이라 장년층 이야기를 결합시켰다.
-그러려면 물리력은 없지만 권위의식은 있는 아버지 내상(안내상)의 캐릭터가 정교해야겠다.
=내상은 할아버지 캐릭터의 권력을 완벽히 대체할 수 없고 대체를 원하지도 않는다. <지붕뚫고 하이킥!>의 정보석이 이미 순치된 느낌이 있는 남자라면 내상은 자란 환경 때문에 가부장적 사고가 강하고 공격적인 면이 완전히 퇴화되지 않은 남자다. 의리를 절대시해 그것 때문에 망하기도 한다.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자존심이 합리성보다 중요하다. 권위는 없는데 광기를 부려야 할 순간이 있는데 배우 안내상씨에게 그런 약간 ‘희번덕하는’ 느낌이 있다. (웃음) <오아시스>나 <시>에서 인상적이었다. 미국 시트콤 <오피스>의 스티브 카렐과도 비슷하다. 그가 분한 마이클은 “농구란 팀워크와 우의를 다지는 좋은 기회”라고 인터뷰해놓고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형편없이 이기적으로 플레이한다.
-젊은 남녀가 대거 나온다. 언젠가부터 김병욱 PD 시트콤을 꾸준히 보는 시청자의 절반 정도가 멜로드라마로서 작품을 즐기고 있는데.
=사랑 이야기에 대해선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다. <하이킥3>에서 사랑은 멜로로 포장되겠지만 결국은 ‘교육’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 교육의 문제’ 할 때의 교육이 아니라 한 사람이 어떻게 완성되어가는가라는 관념적 의미의 ‘교육’에 가깝다. <지붕뚫고 하이킥!>에서도 지향은 했던 부분인데 마무리를 못 짓고 도망친 느낌이 있다. 그 부분을 제대로 구현한다면 이번 작품이 가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셈이다.
-앞서 론 셰르픽 감독의 <언 애듀케이션>을 언급하신 때문인지 지원(김지원)이라는 여고생 캐릭터에 유독 눈길이 간다. 어쩌면 <똑바로 살아라> <거침없이 하이킥!>의 민정이나 <지붕뚫고 하이킥!>의 세경처럼 작가에게 각별한 캐릭터가 아닐까 짐작이 가기도 하고.
=지원은 아빠와 관련된 상처가 있고 항상 친구들보다 먼 데를 보지만 티내지 않는 소녀다. “넌 삶이 뭐라고 생각하니?”라고 묻고 다니는 아이가 아니다. 막연히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배우가 필요했다. <밤이면 밤마다>에서 김지원씨를 처음 봤는데 거의 말을 안 하고 리액션만 하는데도 또래답지 않은 아우라가 있었다. 오디션에서 처음 카메라를 댔을 때는 인위적으로 만든 브이라인 얼굴이 아니라 다들 좀 실망했는데 30분 동안 감정표현을 보고는 그녀가 최적의 선택이라는 점에 다들 동의했다.
-보건소 의사 계상(윤계상)은 지금까지 김병욱 작품 속 인물 중 가장 정치사회적 입장이 구체적인 인물이라는 인상이다.
=우선 지원과 계상 사이에 일어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이야기는 윤계상씨 정도의 매력있는 배우가 캐스팅됐기에 시도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계상은 <지붕뚫고 하이킥!>의 지훈보다 행동력이 강하고, 복지예산 삭감됐다 하면 의사들과 돌아가며 1인시위도 할 만큼 공정한 세상을 만들려고 실질적으로 꽤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런 남자가 계상이 같은 미소와 말투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아직도 사랑스러운 청년의 느낌이 있다.
-왠지 ‘진보의 아이돌’이라는 표현이 생각나는데. (웃음) 이번에는 인물이 정말 많다.
=지원의 사촌언니 하선(박하선)은 심할 정도로 배려심이 강하지만 손힘이 세서 은근히 피해도 끼치는 캐릭터다. 계상의 동생이자 하선의 동료교사인 지석(서지석)은 다혈질인데 서지석씨가 선한 얼굴로 화를 낸다면 좀 덜 독해 보일 것 같았다. 배우의 성격과 인물이 좀 거리가 있어서 체화해야 할 캐릭터다. 하선의 후배로 얹혀살게 된 진희(백진희)는 십만 글로벌 리더 양성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시드니 가서 고기만 썰다오고, 몽유병 증상 중에 범죄현장을 지나갔다가 조폭에게 쫓기는데 경찰에게 제대로 보호도 못 받는 허술한 시스템의 피해자다. 요즘 거의 모든 드라마가 88만원 세대를 그리기 때문에 잘 차별화해야 할 인물이다. 더부살이라 미안해서 “없는 사람처럼 살겠다”고 약속하는데 어찌나 없는 사람처럼 사는지 쨍그랑 소리가 나서 보면 밥은 비벼져 있는데 애는 안 보이는 식이다. (좌중 폭소)
동시대성을 구현하기 위해
김병욱 PD의 시트콤에는 일종의 웜홀 같은 연결과 도피의 공간이 등장한다(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요소다). <귀엽거나 미치거나>에서는 벽장이었고 <거침없이 하이킥!>에는 민용(최민용)의 방으로 통하는 철봉이 있었고 <지붕뚫고 하이킥!>은 준혁(윤시윤) 방벽의 개구멍이 있었다. 이번에는? 무려 땅굴이다. 계상네 집의 냉장고와 하선네 집의 화장실을 연결하는 이 공간은 신소재를 이용한 세트로 제작된다고 한다. 총 87억으로 보도된 대폭 늘어난 제작비 덕이다. 극중 결정적 공간인 땅굴의 이미지와 예의 방영 직전 부담이 뒤섞인 결과, 김병욱 PD는 최근 6·25 전쟁통의 난리를 꿈에서 겪는가 하면 산 정상의 집으로 기어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이 사라져 진땀을 흘리는 악몽을 꾼다고 했다.
-땅굴은 통로일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사람들이 뭔가를 할 수도 있는 장소가 될 것 같다.
=누군가에겐 마음의 감옥, 다른 사람에겐 사랑이 싹트는 장소가 될 거다. 문물이 오가는, 글자 그대로 실크로드도 된다. (좌중 폭소) 계상네의 거친 문화와 여자들이 모여 사는 하선네의 로마네스크(웃음), 아니 섬세한 문화가 교류한다. 이쪽 집에선 의료기술이 흘러가고 저쪽에선 줄리엔이 담근 특이한 김치가 온다. 양쪽집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땅굴이 어떤 의미인지 짚는 것이 극의 목적일 수도 있겠다.
-<지붕뚫고 하이킥!>을 연출할 때에는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일을 촌스럽게 여기는 풍조에 대한 반발로 뜨거운 감정을 낡지 않은 형식에 담아보겠다고 했다. <하이킥3>는 보다 건조한 스타일일까.
=그때그때 ‘시대정신’ 같은 것에 대한 반발심이 있긴 하다. 꼭 시대정신까지는 아니겠지만 일상에서 내가 스치는 풍경, 이를테면 <나는 가수다>에서 눈물 흘리는 얼굴들을 보면 사회에 감정이 과잉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있다. 균형을 잡으려는 성향인가. <시크릿 가든>은 아주 훌륭한 드라마고 판타지로서 최상급인데, 시트콤이 그나마 가진 게 있다면 세상을 변혁하는 힘도 트렌드를 주도하는 힘도 아니고 동시대성이 아닐까. ‘역습’이라 해서 세상을 전복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김원일 작가의 <마음의 감옥>에 나오는, 적어도 병실에서 죽게 하고 싶진 않다, 하늘이라도 보고 죽게 하겠다고 온 힘을 다해 침대를 밀고 나오는 장면 같은 걸 떠올리는 거다. 그러니까 <시크릿 가든>처럼 유능한 마법사를 보고 있으면 우리 진영에서도 훌륭한 드라마가 나와줬으면, 우리가 몸소 그런 메시아는 못 되지만 메시아가 오기 전에 길이라도 닦아놓았으면 한다. (웃음)
-거기서 ‘우리 진영’이라 함은.
=음… 현실의 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