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계의 흐름에 뒤처져 있던 할리우드의 여전사가 결정적인 변화를 맞이한 건 단 한명의 스타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젤리나 졸리 말이다. 물론 90년대에도 지나 데이비스(<컷스로트 아일랜드> <롱키스 굿나잇>)라는 출중한 액션 스타가 있었다. 하지만 지나 데이비스와 안젤리나 졸리의 차이점은 박스오피스에서의 파워다. 안젤리나 졸리는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그녀의 이름만을 믿고 수천만달러짜리 액션영화의 제작을 밀어붙일 만큼 돈이 되는, 아마도 할리우드 역사상 첫 번째 여전사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 캐릭터를 액션 히어로로 내세운 대자본 블록버스터는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지나 데이비스의 영화들이 박스오피스에서 격정적으로 침몰한 탓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졸리의 <툼레이더>는 이 같은 편견을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게다가 안젤리나 졸리의 여전사들은 90년대 여전사들을 뛰어넘는다. 그녀는 예전의 남자 액션 히어로들이 그랬듯이 자신의 육체적 강인함과 매력을 즐길 줄 안다. 안젤리나 졸리는 “라라 크로프트는 천생 여자”라고 말한다. “그녀는 남자라면 무조건 치를 떠는 그런 여전사 타입이 아니며,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총을 들어야 하는 과거의 여전사와도 다르다.”
안젤리나 졸리와 함께 새로운 여전사 계열에서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어야 할 영화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일 것이다. 페미니스트 작가 몰리 하스켈은 <킬 빌>이 아마도 가장 훌륭한 여전사 영화라고 말한다. “할리우드는 가족을 위한 복수나 헌신을 여전사의 동기로 삼는다. <실종>의 케이트 블란쳇처럼 말이다. 그녀는 평화를 사랑하는 여자지만 납치된 딸을 구하기 위해 총기 사용법을 익힌다. 그러나 <킬 빌>의 여자들은 이미 그런 동기가 생기기도 전에 스스로를 단련해온 전사들이다.” 뤽 베송의 <니키타>가 킬러로서의 정체성에 흔들리던 20여년 전과 한번 비교해보라. 새로운 여전사들은 망설이지 않는다. 그리고 안젤리나 졸리와 <킬 빌>이 만들어낸 새로운 전통은 <툼레이더> 이후 쏟아져나온 여전사 영화들, 특히 <레지던트 이블>과 <언더월드>에서 그대로 계승된다. 글로리아와 리플리, 사라 코너로부터 태어난 할리우드의 여전사들은 21세기에 들어와 어떤 여전사의 완성형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만약 할리우드의 진정한 여전사 시대가 이제부터 시작이라면 충무로는? <7광구>의 하지원은 근사한 여전사였지만 혀 짧은 소리로 “아저씨!”를 외치는 순진무구한 소녀이기도 했다. 오빠와 아빠와 아저씨를 외치지 않고, 오빠와 아빠와 아저씨를 완벽하게 능가하는 한국형 여전사가 등장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그걸 원한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에게는 지난 30여년간 스크린에서 진화를 거듭해온 할리우드의 여선배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