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카메라 연기는 무대 연기와 어떻게 다른가?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 내 얼굴이 어떻게 잡히는지, 심지어 내가 연기하며 무슨 말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상대역과 호흡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상대방의 대사는 들리지도 않고 내 대사가 틀리지 않는 데에 급급했다. (웃음)”
연극을 거치지 않고 카메라 앞에서 연기 첫걸음을 뗀 임수정이 돌아보는 최초의 두려움이다. 교과서는 흔히 영화 연기의 속성을 연극 연기와 대비해 설명한다. 연기하는 현장부터 연극은 객석을 어둠으로 가리고 무대에만 조명을 비춰 극적 세계를 명확히 구획하지만, 영화배우는 좁게는 5m 반경에 늘어선 장비와 수군거리는 사람들 앞에서 몰입해야 한다. 일단 많은 배우가 연기에서 눈을 쓰는 방식의 차이를 말한다. 서영희는 “연극 몇 편을 하면서 눈을 마주치는 연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어깨나 허공을 보면서 연기하기가 힘들었다. 지금도 쉽지 않다”고 말한다. 황정민은 “영화는 눈으로만 연기를 해야 할 경우가 발생하는데, 말이 그렇지 눈으로 어떤 빛을 보낼 수도 없고, 고민이 있었다”고 돌아본다. 고창석은 연극은 1 대 100의 에너지를, 영화는 1 대 1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고 요약한다. 오달수는 카메라와 연극 관객 시선의 유비관계에 주목한다. “결국엔 연극이 바탕이다. 영화에서 카메라가 관객의 시점을 대변하며 움직인다면, 무대에서는 배우가 관객을 배려해 시선 처리의 높이, 양손 중 먼저 드는 쪽 손, 회전 시 몸을 여는 방향 등을 정한다. 그것이 옳지 않으면 관객이 불편을 느낀다. 영화에 클로즈업이 있다면 연극에는 배우의 정수리로 떨어지는 톱 조명이 있다. 연극에서 톱 조명을 받고 온 시선이 집중되면 주변은 깜깜해서 보이는 게 없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할 수 있다. (웃음) 클로즈업 연기도 에라 모르겠다 식이 제일 좋은 것 같다.” 송강호 역시 연극 연기의 포괄적 저력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흔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상대방 말 잘 듣기는 영화보다 듣지 않고선 감정이 발생할 수 없는 연극에서 더 결정적이다. 무대에서 보이지 않게 그것을 학습했다.” 그래도 약간의 기술적 이행기는 필요하다. 대학에서 연극을 한 김상경은 카메라 연기 초기에 스탭 앞에서 공연한다는 상상을 했다고 한다. 요즘도 그는 1차 관객인 현장 제작진부터 감동을 줘야 한다는 목표를 버리지 않는다. 하정우에게 영화 연기 학교는 무려 10개월 동안 촬영한 윤종빈 감독의 졸업작품 <용서받지 못한 자>였다. 한 컷에 30테이크 이상 찍으며 10개월을 현장에서 살다보니 연극으로 형성된 배우의 신체가 자연 카메라 연기에 적응했다.
촬영과 연기는 어떻게 서로를 밀고 당길 수 있을까? 대다수 배우들이 촬영감독과 별도로 연기를 의논하지는 않지만 예외도 있다. 범상치 않은 앵글을 자주 구사하는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찍을 당시 임수정은 이례적으로 정정훈 촬영감독의 앵글을 미리 확인하고 연기에 참조했다. <황해>의 초반, 홀로 추운 서울 거리를 헤매는 단독 신이 많았던 하정우는, 어느 날 이성제 촬영감독이 자신과 같은 심정으로 모니터를 확인하고 있음을 문득 깨닫고 카메라도 자신과 리액션하는 일종의 배우임을 발견했다.
4. 영화배우는 편집의 '전횡'에 어떻게 대응하나?
편집은 컷과 컷의 충돌을 통해 배우의 중립적 몸짓과 눈빛에 탄력과 의미를 불어넣는 유능한 바람잡이다. 그러나 더 큰 단위에서 보면 편집 시스템으로 인해 대다수 영화에서 배우들은 시나리오 순서와 무관하게 연기하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다. 3, 1, 7, 8번 신을 A라는 장소에서 찍고 10, 2, 5, 4, 9번 신을 B에서 찍는 영화라면 배우는 온갖 장애물을 넘으며 그날그날 촬영분량에 해당되는 감정 그래프의 좌표에 착지해야 한다. 학대당하는 주인공이 복수의 낫을 들기 전과 후로 크게 양분되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의 예를 보자. 중간 중간 신이 빠진 상태에서 마을 사람들을 죽이는 후반장면을 찍은 서영희는 기존 살인자 연기에서 힘을 빼고 싶다는 구상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스탭들이 불안해했다. 전반부와 달라지는 게 크게 없어 보이는데 어쩌냐고. 나도 불안했지만 그때 흔들리면 정말 영화가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 싶어 톤을 견지했다.” 편집의 전횡을 절감케 하는 사례는 영화의 결말이 바뀌는 경우다. 배우들은 이른바 정성껏 조율한 감정선을 우롱당했다고 여기지 않을까? 몇 가지 엔딩을 소매 속에 넣고 끝까지 저울질하는 김지운 감독과 작업해온 이병헌이 설명한다. “커피에 백설탕, 흑설탕, 각설탕 중 뭘 넣을지의 문제이지 소금이나 조미료를 넣으라는 몰상식한 주문이 아니다. 장면이 바뀌더라도 장면의 핵심 정서, 영화가 궁극적 목표를 공유한다면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들쭉날쭉한 촬영 순서가 특정 신의 촬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예도 있다. <행복>에서 황정민은 연인에게 마음이 멀어진 시기의 신들을 한창 찍는 도중, 장소 섭외 문제로 사랑했던 시절 장면으로 후진할 상황이 닥치자 감독에게 “도저히 감정이 안 나온다. 거짓말 같다”고 고백해 촬영을 포기했다. 거꾸로 촬영 순서의 뒤섞임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10분이 넘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의 롱테이크 오프닝신은, 크랭크업 날 촬영됐다. 임수정은 상대 배우 현빈, 스탭들과 그간 호흡한 시간이 있었기에 그나마 이 신이 수월했다고 회고한다.
영화 연기는 1회적이지만 1회적이지 않다. 관객이 보는 하나의 연기 뒤에는 복수의 테이크가 숨어 있다. 테이크마다 모조리 다른 연기를 하는데 편집실 가면 다 붙는다는 평판의 주인공 송강호는 대세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A-1이건 A-2이건 A로서 문제가 없다는 견해다. “지구는 지금도 돌고 있는데 어떻게 연기가 앞 테이크와 똑같을 수 있나.” 굳이 완성본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여러 테이크를 허용하는 메커니즘은 영화배우에게 약간의 숨통,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수혈하는 한 뼘의 유희 공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병헌이 그런 경우다. “감독 의도에 따른 테이크, 내가 원하는 테이크를 다 찍어보고 오케이 컷이 이미 나왔는데도 ‘이번에 뭐가 됐건 해볼게요’ 하고 한번 더 가곤 한다. 대부분 편집에서 배제되지만, 지루한 강의를 듣다 목 한번 푸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