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영화감독과 영화배우는 어떤 방식으로 같이 창조하는가?
영화배우는 감독(그리고 제작자와 투자자)에게 선택되기 전에는 일에 착수할 수 없는, 이니셔티브를 박탈당한 괴상한 처지의 예술가다. 배우에게 감독이 중요한 둘째 이유는, 감독의 업무가 영화 연기의 유기적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영화 연기는 숏의 크기와 지속시간, 편집이 만드는 충돌, 음악과 미술 그리고 특수효과와 어울려 최종적 효과를 관객에게 발휘하는데 그 모든 요소를 총괄하는 주체는 감독이다. 말하나마나 배우들은 이 점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다. <대부3>에서 시실리를 방문한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의 연기에 관한 하정우의 관찰을 들어보자. “그 신을 보면 알 파치노가 직접적으로 연기하지 않아도 컷 분할과 음악과 플래시백이 그의 연기를 돕는다. 덕분에 배우는 심플하게 가도 되는 거다. 알 파치노는 그 종합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그런 걸 보면 굳이 배우가 프레임 안을 다 채워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대다수의 배우가 소유한 감독의 개념은 “전체를 아는 사람”이다. 작품 전체 밸런스에 관한 문제는 감독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고창석은 “연극은 관객과 접촉하는 전방에 배우가 있다. 연출과 많은 논의를 하지만 최종적 컨트롤은 배우 몫이다. 반면 영화는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연기했건 감독에 의해 편집된다. 그래서 내가 좀 이해가 안되더라도 감독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생긴다”라고 말한다. 하정우는 배우가 최우선으로 이해할 요소가 캐릭터가 아니라 그것을 만든 감독의 성향과 방향, 의향이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피력한다. 임수정은 여기서 한 발짝 (사랑스럽게) 더 나아간다. “캐릭터와 작품에는 감독의 성향과 인간관뿐 아니라 사소한 기호까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다양한 인간적 면모가 사소한 소품에도 드러날 때가 있다. 그래서 항상 감독님들을 관찰한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영군이 자주 쓰는 ‘오오’ 하는 감탄사는 사실 박찬욱 감독님의 버릇에서 나왔다. 예컨대 ‘모든 감독은 배우가 되고 싶어서 감독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최동훈 감독님(<전우치>)은 연기 연출할 때 직접 시연을 해 보이는 타입이다. 핵심을 전달하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서 직접 해 보이는 거다. 그러니까 나는 감독의 시연을 그대로 따라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핵심만 읽으면 된다.” 한데 문득 궁금해진다. 영화를 만들다 보면 작품의 저자는 감독일지언정 인물에 관해서 가장 많이 고민한 배우가 저작권을 주장하고 싶은 순간이 오지 않을까? “그래서 배우들이 말하곤 한다. ‘왜 그래야 하죠? 나 같으면 그렇게 안 할 것 같은데.’ 그때 감독들이 잠깐 주춤하긴 한다. 누구보다 배우가 그 인물에 가까이 있음을 직감하니까.” 이병헌의 경험담이다. 감독과 배우는 인물에 대해 당연히 이견을 가질 수 있다. 서영희는 영화의 기본적 방향은 공유하는 가운데 배우가 미처 예상치 못한 연기를 보여줄 때가 최상의 분위기가 된다고 웃으며 말한다. 배우 대 감독의 감정싸움과 종이 한장 차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어떻게 배우를 도울 수 있을까? 한국영화의 주요 작가들과 고루 작업해온 송강호는 감독의 좋은 연기 연출을 간단히 정의한다. “연기를 잘 끌어내는 감독의 방식은 기본적으로 똑같다. 배우가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거다.” 배우가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이병헌의 은유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끝내 인물의 정면을 못 보면 감독이 앞에서 들고 서 있는 거울에 비친 반영을 보고 연기하기도 한다.” 서영희의 기억은 보다 애틋하고 구체적이다. 그녀의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의 박찬옥 감독은 카메라 메커니즘에 무지했던 그녀에게 상대와 눈을 맞추지 않는 연기도 가식이 아닐 수 있음을 세심히 설득해주었다. 단, 배우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건대 감독의 연기 연출에는 요령이 필요하다. 예컨대 “그는 어머니와 관련된 트라우마 때문에 여자를 증오해” 같은 관념적 규정은 배우를 돕기는커녕 옭아맬 수 있다. 차라리 “그는 지금 산소가 부족하고 떡볶이가 먹고 싶어” 같은 이야기가 유용할 수 있다는 소리다. 오달수가 꼽는 가장 쉬운 연기 디렉션은 <올드보이>에서 박찬욱 감독이 건넨 “애매모호하게 연기해줬으면 좋겠다”다. “그러더니 얼마 뒤 모호필름을 차리셨더라”고 그는 덧붙인다. 임수정은 <장화, 홍련>의 김지운 감독이 한 연기 연출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이 장면에서는 수미가 이런 상태라고 묘사하지 않으셨다. 대신 영화를 준비하며 사적으로 나눴던 대화의 인상적 부분을 기억했다가 감정을 상기시켜주셨다.”
8. 배우는 주어진 배역 외에 어떻게 영화의 창조에 기여하는가?
배우가 채울 자리를 정확히 구획해놓고 최선의 기교로 채워주길 기대하는 영화가 있고, 배우로 인해 그 영화의 이야기와 태도까지 비로소 완성되는 영화가 있다. 감독들은 미더운 배우를 얻었을 때, 그들을 창조적 파트너로 바라본다. 황정민은 연출에 대한 창의적 기여는 배우의 기본 책무 중 일부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래야 영화가 풍성해진다. 장기를 두는 당사자에겐 안 보이는 수가 제3자에게는 보여서 훈수를 두는 것과 같다.” 황정민은 <부당거래>에서 그의 캐릭터가 부하 형사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현장을 조작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여러 컷으로 나누는 대신 지미집(소형 크레인)을 이용해 한 테이크로 찍는 편이 훨씬 힘있겠다고 제안했다. 스스로 별로 창의적인 배우가 아니라고 여기며, 없던 신도 만들어내는 남자배우들에게 탄복했던 전도연은 근작 <카운트다운>에서 자기도 모르는 새에 신을 재구성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자신에 소스라쳤다고 한다. “오래하다 보니 안 보여도 될 것이 보이나 보다. (웃음)” 그렇지 않아도 아이디어 많기로 유명한 이병헌은 트란 안 훙 감독과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찍으면서 극한체험을 했다. 영화의 주제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립심이 솟구친 것이다.
송강호의 원론적인 간결한 대답은 질문자를 무안하게 한다. “원래 배우를 통해 무엇인가 창조되길 원해서 그를 캐스팅하는 것 아닌가. 아무리 장르영화 안에서 정형화된 캐릭터라 해도 선택한 배우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발산하길 원하는 거다.” 한편 임수정은 우리 모두가 감지하고 있었지만 문장으로 쓰지 못했던 진실을 확인해준다. “배우라는 존재 자체가 감독과 영화인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마치 인형놀이를 하듯, 배우에게 이런저런 옷을 입혀보는 거다.” 영화 제작에서 배우가 기여하는 크리에이티브는 본인이 분하는 캐릭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은 의인화된, 우리가 꿈꾸는 대안적 세계이므로.
"레디, 액션!"의 순간, 그들은…
전도연 “자, 슛 들어갑니다” 하고 카메라 앞까지 걸어가는 몇초 동안 ‘아우, 죽고 싶어’ 하는 마음이에요. 머리 한구석에서는 잘할 거라는 걸 알지만 잘하게 되기까지가 너무, 진짜, 어후!
고창석 “액션!”은 빨려들어가는 블랙홀, “컷!”은 빠져나오는 화이트홀.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라요.
송강호 양날의 작두 위에 오르는 거죠. 희열을 느끼지만 잘못하면 다치니까. 그게 바로 예술의 본질이고.
김상경 “열려라 참깨!” 하고 마법의 문을 여는 주문과 함께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슬레이트 치는 소리만큼 아름다운 소리가 없죠.
오달수 NG라는 것이 있으니까 그걸 이용해야죠.
서영희 모든 스탭이 나를 믿고 있는데, 그 신뢰에 대한 배신은 막아야겠다는 긴장감이죠. 근데 “감정잡게 다들 조용히 해주세요!” 하는 배려는 엄청난 부담이에요. 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황정민 레디, 액션 사인은 내게 큰 의미가 없어요. 제일 중요한 순간은 그때가 아닌 거죠.
이병헌 배우나 스탭이나 그 순간 심정은 다르지 않다고 봐요. 배우는 스탭을 편하게 생각하는 게 필요해요. 그래야 “컷” 하고 나서 친구나 식구에게 묻듯, 때론 응원을 때론 날카로운 지적을 구할 수 있으니까.
임수정 태어나서 그런 적 없을 만큼 제 자신에게 집중하는데 그러면 제가 사라져요. 나와 모든 스탭은 ‘우리 팀’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1 대 다수의 구도가 되고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요. 내가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는 행복과 외로움이 동시에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