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 연기라는 예술 ③
2011-09-13
글 : 김혜리
10명의 배우들이 답한다, 영화 연기에 대한 8가지 궁금증
<행복>의 황정민과 임수정

5. 모니터는 배우에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1990년대 말 현장 모니터가 한국영화에 도입된 이래 컷 사인 직후 모니터 앞으로 모여드는 배우, 조감독, 촬영감독의 모습은 촬영현장의 대표 이미지가 됐다. 연극이나 TV드라마 연기자들과 달리 영화배우들은 미분된 단위로 연기를 복기할 수 있다. 언뜻 필수불가결해 보이는 모니터는 짐작과 달리 배우들에게 제한된 용도의 도구다. 일단은 배우가 체감하는 감정 강도에 외적 표현의 수위가 조응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쓰임새가 기본이다. 모니터에서 우선 내가 예쁘고 멋있게 잡히나 체크하는 인지상정은 배우들에게 종종 함정이 되기도 한다.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에서 서영희는 그 위험을 깨달았다. “솔직히 모니터에서 뭘 보라는 건지도 몰랐다. 근데 수영복 입고 전화 받는 신에서 내가 어느새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더라. 실생활에서 사람들의 자세는 구부정하지 않나. 그런데 뱃살이 접힐까봐 무의식적으로 신경을 쓴 거다.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뱃살이 아니라 상황인데.” 번듯한 호남 연기를 많이 했던 김상경은 <생활의 발견>에서 술 먹고 불그레한 얼굴로 비루한 말을 지껄이는 모니터 속 ‘꼴보기 싫은’ 자신의 모습에 흠칫했지만 감독을 믿고 밀어붙였다. 개봉 뒤 그는 반대의 충격을 받았다. “분명 내 몸과 정신을 사용했는데 내가 모르는 내가 스크린에 있었다. 배우로서 그토록 꿈꾸었던 새로운 인물이 있었다. 배우들은 대중이 자신의 어떤 모습을 좋아하는지 잘 안다. 하지만 그렇게 싫은 모습이 모여 다른 인물이 되는 거다.”

데뷔 때부터 모니터가 현장에 있었던 세대인 임수정에게 모니터는 몸의 어느 부분까지 쓰는 게 좋을지 빨리 계산하고, 컷의 종합적 의미를 신속히 파악하게 돕는 도구다. 이제 그녀는 경험 있는 배우가 그렇듯 작고 화질이 떨어지는 모니터에 표현된 연기가 스크린의 그것과 간극이 있음을 고려하게 됐다. “안면근육을 아주 자유롭게 쓰는 배우는 아니어서 눈으로 감정을 많이 표현하는 게 내 단점이자 장점인데 모니터와 스크린에서 느껴지는 표현 강도가 다르다보니 후반작업 과정에서 감독님이 ‘수정이가 저렇게 연기했었나?’ 생경해하는 경우가 있다.”

<고지전>의 고창석

6. 리액션 연기는 왜 중요하며 배우에게 어떤 만족을 주나?

‘연기는 리액션’이라는 말이 금과옥조로 인용된 지는 오래다. 관객이 시선의 주도권을 쥐는 연극에서는 말하고 있는 배우가 시야를 점령하지만 영화와 TV에서는 그저 듣고 있는 인간의 얼굴이 많은 시간 화면을 점유한다. 주고받는 연기, 좋다. 그러나 한대의 카메라를 쓰는 영화 현장에서 리액션은 상대 배우와 시선이 어긋난 채, 때로는 아예 상대가 없는 상황에서 이뤄지곤 한다. 즉, 상대가 아까 던졌거나 5분 뒤에 할 대사를 고스란히 내면에 품고 있다가 거기에 대꾸해야 한다. 하정우의 친절한 해설을 들어보자. “리액션 단독촬영이 가능한 것은 리허설 덕분이다. 신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마스터 숏으로 찍는 리허설 과정에서, 시나리오에 제시되지 않은 상황- 돌부리를 피한다거나, 행인이 바라본다거나- 과 부딪치고 감독은 그 중 적합한 부분을 리액션으로 선택하게 된다.”

리액션이 가져오는 상승효과를 고창석은 실력 있는 상대를 만나면 본인도 잘 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탁구 경기에 비유하고 황정민은 서로의 기를 주고받는 동안 점점 지름이 커지는 원에 견준다. 이런 시너지를 두고 서양의 한 배우는 “연기하다 보면 꼭 내가 후진 연기를 하면 상대가 후려칠 것 같은 순간이 온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오달수에게 리액션은 비단 카메라 앞의 문제는 아니다. “일상에서 좋은 파트너가 돼야 무대에서도 좋다. 자주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상대를 대하는 어떤 각을 내 자신에게 심는 거다.” 송강호는 영화의 리액션은 연극의 그것보다 덜 결정적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연극에서 파트너는 공연의 성패에 결정적이지만 영화는 다소 안 맞더라도 그것이 내 연기에 치명적 영향을 끼치거나 저해하지는 않는다.”

신인 시절부터 리액션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는 배우로 보였던 임수정은 <장화, 홍련>의 경험을 잊지 못한다. “<장화, 홍련>을 찍는 동안 근영이(문근영)가 어디선가 울고 있으면 나도 같이 울었고 내가 기분 좋으면 근영이도 행복해했다. 지금 돌아봐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적 결속이 있었다.” 리액션 연기로 한편의 영화를 이끌어간 배우로는 전도연이 으뜸이다. <멋진 하루>에서 전도연은 원작 소설보다 훨씬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상대역 하정우의 서브를 시종 받아냈다. “시나리오의 병운은 원작보다 활동적이었고 하정우씨가 그것을 더 다이내믹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노력하는 건 병운 하나로 족해 난 그냥 느끼고 있자, 싶었다.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는 전도연이 자초(?)한 면이 있다. 하정우 후배의 증언. “뭘 해도 도연 선배가 다 받아줬다. 그래서 약속은 지키되 그 안에서 더 즉흥적으로 돌발행동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는 <인어공주>를 기억해야 한다. 전도연은 거기서 1인2역을 하면서 상대 배우 대신 위치를 표시하는 테니스공에 리액션을 했다. “어려웠다. 사람의 눈을 보고 연기할 때와 점을 보고 연기할 때는 눈의 깊이도 달라진다. 그래서 그 차이를 잘 아는 좋은 배우들은 자기가 카메라에 안 걸려도 상대 배우가 요구하지 않아도 리액션을 찍을 때 옆에서 목소리만으로라도 공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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