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제작자 김조광수
<밀크>(2008)는 나의 성정체성과 맞닿아 있는 영화다. 주인공 하비 밀크가 죽음을 예감하면서 자신은 어떻게 살았으며 후대의 동성애자들은 어떻게 살았으면 한다는 얘기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나 역시 밀크처럼 치열하게 살았는지, 잘 살았는지 되돌아보고 싶다. <러브 스토리>(1970)는 내 인생의 멜로영화다. 나는 세대로 볼 때 영화가 아닌 문학세대에 속하는데, 영화가 이렇게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구나 싶었다. 문학이 아니라 영화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 것도 그 때문이고. 무엇보다 나는 사는 동안 제대로 사랑을 했는지, 이 영화를 보면서 점검해야겠다.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2011)은 그 많던 빚을 청산 해주고 내 영화 인생의 새 장을 열어준 영화다. 언제 죽을지 모르겠지만 2, 3편을 만들고 그 영화들을 보면서 죽는다면 행복하게 죽을 것 같다.
◆ 영화배우 박희순
다음날 죽는다면, 전날 밤에는 술이라도 한잔하지 않을까? 먼저 와인애호가의 와인투어를 다룬 <사이드 웨이>(2004)를 보면서 와인을 한잔 마셔야겠다. <인생은 아름다워>(1997)를 보면서 웃고 울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죽기 전에 내 작품도 하나는 봐야 할 것 같다. <우리집에 왜 왔니>(2009)에는 죽기를 갈망하는 자살중독자 ‘병희’가 나온다. 죽기 전날, 그렇게도 죽고 싶어 하는 ‘병희’를 연기하는 내 모습을 보면 과연 어떤 감정을 느낄까 궁금하다.
◆ 영화배우 박해일
<행오버>(2009) 심신이 힘들수록 웃음이 절실해질테니까.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인생의 많은 시간을 배우로서 보냈다. 당연히 풋풋했던 나의 데뷔작을 찾아보지 않을까?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2008) 마지막까지 아내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릴 거다. 떠난 뒤에도 그렇겠지.
◆ 영화감독 김현석
평소에 보고 또 보던 영화들을 역시 그때도 보게 될거다. 배창호 감독님의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은 최근 극장에서 상영했을 때도 챙겨봤다. 사춘기 때 극장에서 처음 봤는데, 당시의 정서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었지. 한창 홍콩 누아르물이 유행하던 시기에 홍콩 멜로영화라서 신기하게 봤던 <가을날의 동화>(1987)도 자주 본다. 마지막 장면에서 종초홍이 롱아일랜드로 떠날 때, 주윤발이 시계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감정적으로 지칠 때 많이 챙겨보는 영화다. 앞의 두 영화가 멜로로 인정받은 작품이라면 <리틀 빅 히어로>(1992)는 가끔 시나리오가 잘 안 써질 때, 플롯을 참고하기 위해 꺼내보는 작품이다. 대한극장에서 처음 봤었는데, 슬픈 영화가 아닌데도 울면서 봤었다. 우는 이유를 알면 좋은 영화가 아닌 것 같아요.
◆ 영화감독 이해영
<E.T.>(1982) 처음으로 극장과 스크린, 영화라는 걸 강렬하게 인식시켜준 영화다. 어쨌든 죽을 때가 되면 나에게 영화는 무엇이었을까? 란 생각을 할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죽음을 앞두고 극장 한관을 대관해서 보고 싶다. <박쥐>(2009) 만약 죽을 때까지 내가 로망으로 생각한 영화를 못 만든다면 이 영화를 볼 것 같다. 동시대의 현업 감독이 지닌 개인적인 유희와 자본과 기술력이 행복하게 만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창작자가 꿈꾼 이미지가 영화 안에서 손상되지 않고 구현된 느낌이다. <페스티발>(2010) <E.T.>가 영화에 대한 첫 기억이고 <박쥐>가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의 로망이라면 <페스티발>은 ‘나에게 주어진 베스트는 이거였구나’ 하는 심정으로 볼 것 같다. 살아 있을 때 내 몫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는 정도랄까?
◆ <씨네21> 편집위원 김혜리
태어나서 극장에서 본 첫 영화로 기억하는 레이 해리하우젠의 <신밧드와 호랑이의 눈>(1977)을 다시 보고 싶다. 아직도 뇌리에 박혀 사금파리처럼 이따금 번득이는 보라색 보석 반지와 거대한 독수리(어쩌면 콘돌이나 그리핀이었을지도)의 발톱이 정말 거기에 있었는지 확인해볼 생각을 하면 긴장이 된다. ‘무도회의 수첩’을 뒤적이는 노부인의 기분으로 선택할 두 번째 영화는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안토니에타>(1982). 이 영화는 이자벨 위페르의 <레이스 뜨는 여자>와 나란히, 배우 이름도 감독이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던 어린 나를 홀렸던 두 편의 TV <주말의 명화>다.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에 나오는 그녀처럼. 쇠약해져 다가오는 죽음의 발자국 소리를 또렷이 헤아릴 수 있는 운명이 내 것이라면 450분간 지속되는 벨라 타르의 <사탄 탱고>(1994)를 고르겠다. 기형도 시인은 아니지만 영화를 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끝을 고하는 것도 세상을 떠나는 축복받은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므로.
◆ 영화감독 홍상수
“껄껄,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궁금하면 내가 죽을 때 와서 물어봐요. 그때 이야기해줄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