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과욕`의 승부사 강우석 연구 [1]
2002-01-11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남동철 기자의 최강 파워맨 강우석론

“여러분, 다들 <공공의 적>이 끝내주게 잘 찍혔다는 소문 들으셨을 겁니다. 그거 다 강우석 감독이 낸 소문이니까 지금부터 믿지 마십시오.” 강우석 감독의 신작 <공공의 적>이 첫 시사회를 가진 지난해 12월28일, 무대인사에 나선 씨네2000 대표 이춘연씨는 그간 영화계에 떠돌던 소문의 진상을 밝히는 폭탄선언(?)을 했다. 아닌게아니라 <공공의 적>이 잘 나왔다는 소문은 영화촬영이 끝나기 전부터 흘러나왔다. 누가 편집실에서 봤는데 너무 재미있다, 무진장 웃긴다, 완성도도 높다 등등. 그 모든 말들이 강 감독이 일부러 퍼트린 소문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제로 <공공의 적> 촬영현장에서 만난 강 감독은 “이번 영화는 작품성으로 승부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농담조로 던진 얘기였지만 영화계를 떠도는 이런저런 말을 종합해볼 때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정말 뭔가 대단한 물건이 나오나보다 싶은.

시사회 반응을 종합해보면 <공공의 적>이 강 감독 영화 가운데 <투캅스> 이후 가장 완성도 높고 재미있는 장르영화라는 걸로 모아진다. 엄청난 영화가 나왔다는 세간의 소문을 의식한 듯 강 감독은 이날 무대인사를 하지 않았다. 풍문처럼 완벽한 영화를 기대한 사람이라면 이런 모습에 배신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강 감독의 캐릭터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그동안 왜 이런 말을 퍼트리고 다녔는지 이해한다. 그는 뭔가 저지를 때마다 남들에게 자기 목표를 분명히 밝히고 시작하는 스타일이다. 삼성영상사업단 이사였던 현 아이엠픽처스 대표 최완씨는 “먼저 공을 멀리 차놓고 끝까지 쫓아가는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공공의 적>이 대단한 완성도를 가진 영화로 나왔다는 소문도 기실 그가 그렇게 만들고 싶어한다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최상의 결과를 미리 내걸고 자기가 한 말을 책임지기 위해 전력질주하는 강 감독의 에너지는 오늘날 한국영화의 상업적 잠재력이 폭발한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1996년 <홀리데이인 서울> 촬영현장에서 만났을 때 그는 “극장들이 한국영화 달라고 줄서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기염을 토했다.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20% 수준이던 시절에 강 감독이 한 말은 당시 영화계 현실에 빗대보면 터무니없는 과장이었다. 극장들이 스크린쿼터를 채우기 위해 할 수 없이 한국영화를 걸었던 그 무렵, 한국영화의 저력에 대해 그처럼 자신있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강 감독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말은 예언처럼 사실이 됐다.

“10억이 부족할 때 100억짜리 대형사고를 계획한다”

일단 남들한테 말해놓고 그걸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의 태도는 ‘저돌적’이라거나 ‘공격적’이라는 표현으로 부족한 면이 있다. 말하자면 그는 ‘과욕’의 사나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당장 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걸 기대했고 목표로 삼았다. 93년 <투캅스>, 94년 <마누라 죽이기>의 흥행감독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95년 그는 김성홍, 김의석 두 감독과 함께 한국영화 전문 제작·배급사인 시네마서비스를 출범시켰다. 당시 영화계의 종잣돈을 대는 쪽은 대기업인 삼성, 대우 등이었지만 강 감독은 그들을 자신이 굽히고 들어가야 할 투자자로 대접하기보다 경쟁상대로 여겼다. 자본 규모로는 상대가 안 되는 작은 영화사였지만 강 감독이 구상한 미래는 삼성, 대우 못지않았다. 결국 그는 살아남았고 삼성과 대우의 영화사업부는 IMF를 겪으면서 영화계에서 발을 뺐다. 조감독 시절부터 강 감독을 알고 지냈던 씨네월드 대표 이준익씨는 “10억원이 부족하면 어디서 10억원을 빌릴까 고민하기보다 100억원짜리 대형사고를 계획하는 타입”이라고 말한다. 99년 초부터 중순까지 시네마서비스는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연풍연가> <마요네즈> <주노명 베이커리> <간첩 리철진> <이재수의 난>까지 내리 5편 가운데 제작비를 건진 영화는 <간첩 리철진> 한편 정도였다. 급기야 10월에는 <주유소 습격사건> 등 시네마서비스 영화 7편에 투자한 삼부파이낸스가 양재혁 대표의 구속사태로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되는 사건까지 겹쳤다. 강 감독 스스로 부도를 예상했던 절박한 시절에도 그는 공세적으로 위기를 헤쳐갔다. 삼부파이낸스가 투자했던 돈 32억원을 돌려주고 7편 영화의 투자지분을 되찾았다. 그리고 2주 뒤 개봉한 <주유소 습격사건>이 서울관객 96만명을 동원하는 흥행작이 됐고 시네마서비스는 기사회생했다. 96년 2편, 97년 4편, 98년 4편이던 배급편수가 99년 10편으로 늘어났고 그렇게 늘어난 영화편수를 소화하기 어려워 애를 먹었지만 그는 움추러들지 않고 회사를 키웠고 배급편수를 늘렸다.

“지난 7년간 한국영화계 파워 1위를 지키기 위해 죽을 힘을 내서 뛰었다”고 말할 때 강 감독의 말은 대체로 사실이다. 누군가는 이런 그의 모습을 “집념덩어리”라고 표현한다. 승부사 강우석을 낳은 이 무시무시한 추진력은 그의 성격과 생활습관에서도 드러난다. 그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강 감독을 영화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으로 꼽는다. 최완씨는 삼성영상사업단 시절 용건이 있으면 반드시 아침 7시30분에 사무실로 찾아오는 그를 보고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준익씨는 이렇게 말한다. “강 감독 앞에서는 모두가 게으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남들보다 2배 이상 시간을 쓰는데 당해낼 재간이 있나?” 하지만 승부욕과 근면성에 앞서 기억할 것은 그가 영화의 메커니즘에 정통한 감독 출신 제작자라는 사실이다. 영화계의 뭉칫돈을 대는 대기업이나 금융사의 담당자들보다 빨리 판단하고 결정하는 순발력은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것이었다. 예를 들어 98년 여름 흥행작 <여고괴담>은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투자계약을 했다. 기획 아이디어만 보고도 선수를 치는 식이다. 씨네2000 대표 이춘연씨는 강 감독에 대해 “대기업에서 회의하고 검토하느라 3개월 걸리는 일을 2초 만에 결정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투자결정을 기다리느라 몇 개월씩 직원 월급을 못 주고 목빠지게 기다려본 제작자들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또다른 강 감독의 투자 스타일은 개별 영화를 보고 투자하지 않고 영화사나 제작자를 무조건 밀어주는 것이다. ‘강우석 패밀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특정 영화사들과 돈독한 협력관계를 맺는 강 감독의 이런 전략은 시장을 선점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반대급부로 강 감독에 대한 반감 또한 키웠다. 한때 ‘안티 시네마서비스 전선’이라는 말이 나돌았던 것도 강 감독의 공격적인 경영방식에 대한 저항일 것이다. 독점을 경계하는 이런 목소리는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사업가 강우석이 파워 1위를 계속하는 동안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전체 영화시장이 커지면서 안티 시네마서비스 정서의 실체도 모호해지고 있다. 시장이 불안정한 시기에 존재했던 강 감독의 영향력에 대한 두려움이 제작·투자 시스템의 정착과 함께 해소되고 있는 셈이다.

서울극장과 밀고 끌어온 성공신화

강 감독의 성공신화에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은 서울극장 곽정환 회장과의 밀월관계이다. 강우석프로덕션을 차리고 제작자 겸 감독으로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를 만든 다음 곽 회장과 강 감독은 배급과 제작의 콤비플레이를 시작했다. 당시 직배사 영화의 지방배급까지 도맡아하던 서울극장 입장에선 스크린쿼터를 채우기 위해서도 상업적인 한국영화가 안정적으로 조달될 필요가 있었고 강 감독 입장에선 자신이 제작한 영화를 걸어줄 극장이 필요했다. 둘의 관계는 강감독이 파워 1위를 계속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됐고 서울극장이 종로 최고의 점유율을 자랑하는 극장이 되는데도 큰 공을 세웠다. 시너지효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곽 회장과 강 감독의 역관계는 2000년 워버그핀커스로부터 외자유치를 받으면서 변했다. 지난해 시네마서비스는 로커스홀딩스와 워버그핀커스의 주식맞교환을 통해 로커스홀딩스에 인수됐다. 더이상 강 감독이 시네마서비스의 대주주가 아니라는 얘기지만 그렇다고 강 감독의 파워가 줄어든 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시네마서비스가 차지하는 메이저 배급사로서의 위상은 훨씬 높아졌고 더이상 제작비 부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됐다. 회사가 안정되자 강 감독은 20세기 폭스코리아 대표였던 김정상씨를 사장으로 영입했고 <공공의 적>을 연출했다.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그의 다음 목표는 스튜디오를 짓는 것이다. 강 감독이 발의해 경기도 파주에 3천여평 땅을 매입, 설계에 들어간 이 스튜디오는 아트서비스(대표 오상만)라는 회사가 운영한다. 오픈세트를 지을 공간을 확보하고 각종 기자재와 편집실, 녹음실 등을 갖춰 지금 양수리 종합촬영소만으로 벅찬 한국영화 제작물량을 소화할 계획. “할리우드 메이저처럼 감독이 시나리오만 들고 와서 영화 다 찍고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의 행보에서 60년대 스튜디오 시스템을 갖췄던 신상옥 감독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자본 부족과 정권의 통제 때문에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신필름과 달리 지금 자본과 환경은 그의 편이다. 코리아픽처스 대표 김동주씨는 “강 감독은 한국영화를 산업화시키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이라고 단언한다.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등 일련의 흥행작이 한국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을 보여준 계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영화가 산업적 시스템을 갖추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강 감독의 모험정신과 의지와 열정이라는 것이다. 사실 최근 한국영화의 성장을 강우석이라는 이름을 빼놓고 설명할 길은 없다. 90년대 재능있는 젊은 제작자와 감독들이 대거 등장,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강 감독처럼 배급 시스템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이를 단순히 서울극장과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부당하다. 영화 한편 개봉할 때마다 한국영화 배급이 돈벌이가 되느냐를 따지기 시작했으면 그 역시 삼성, 대우 등 대기업처럼 몰락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때로 노회한 사업가의 면모를 내비치면서도 강 감독은 <공공의 적>의 단순무식과격한 형사 강철중을 닮은 지독한 고집을 부렸다. 한국영화를 제작, 배급해서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그의 야망은 90년대 중반 시점엔 분명 과욕이었다. 그 과욕이 현실이 된 과정을 그저 강 감독의 재운이라 말한다면 한국영화의 급성장이 전부 거품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취화선> 전액투자는 ‘영화인의 도리’

그는 80년대 정인엽 감독 연출부로 시작해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며 지금까지 10편 넘는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다. 자신이 영화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강 감독의 자부심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의 집념도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나 박광수 감독의 <이재수의 난>에 흔쾌히 투자한 것도 그가 영화인으로서 갖는 자긍심의 표현이다. 두 영화 모두 대기업에서 투자를 거부한 작품이었고 강 감독은 대기업의 이런 태도를 성토함으로써 작품와 사람과 명예를 잡았다. 대신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었지만 이런 영화들이 없었다면 시네마서비스의 위상은 초라해졌을 것이다. “여력이 되는 한 전체 한국영화의 위상을 높여줄 작가들에게 투자하겠다”는 강 감독의 말은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에 전액투자를 결정한 데서도 입증된다. 기존 투자자들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경험한 태흥영화사 대표 이태원씨는 강 감독에 대한 고마움을 숨기지 않는다. 수익률이 모든 판단의 근거인 금융회사에선 있을 수 없는 투자결정을 그는 ‘영화인의 도리’로 이해하며 심지어 투자를 받아들인 이태원씨에게 감사를 표한다. 혹자는 강 감독의 이런 모습을 “뛰어난 작가들에 대해 갖고 있는 콤플렉스 아니겠느냐”고 의심한다. 그러나 설령 이것이 콤플렉스의 발현이라 해도 영화계는 전혀 손해날 게 없다. 정작 문제는 대기업과 금융사 투자 결정자들에게 이런 콤플렉스가 전혀 없다는 점일 것이다. 강 감독이 연출자로서 갖고 있는 자부심과 긍지가 그의 승부근성과 맞물려 시네마서비스를 메이저 배급사로 키워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느날 돌아보니 내가 공공의 적이 돼 있더라.” 영화계의 실력자로 부상하는 동안 그는 여러 가지 비난과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강 감독의 승부욕과 야망, 달변과 독설을 경험해보면 그럴 소지가 충분하다는 걸 느낄 것이다. 현실의 자신보다 훨씬 크고 강한 자기를 만들고자 집요하게 한 길로 달려온 인간에게 비판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화계가 그에게 당부하는 것도 대체로 “이제는 경쟁심을 좀 줄이고 영화계 전체를 아우르는 맏형의 느낌을 가져달라”는 것이다. ‘양보’나 ‘배려’ 같은 말과 친해질 필요가 있다는 얘기이다. 어쨌거나 분명히 구분할 것은 그가 성취한 것이 소소한 부작용보다 훨씬 원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창작으로 이뤄지는 영화산업은 계산과 통계보다 개인의 위대한 꿈에 의존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스필버그나 루카스만 보여준 것이 아니다. 강우석은 90년대 한국의 영화산업이 이룰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꿈을 가장 먼저, 가장 구체적으로 그렸고 그걸 현실화시킨 인물로 여전히 최고 영향력의 자리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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