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때 딸을 낳고 사기꾼이 된 여자, 숨쉬는 것 빼곤 모든 것이 거짓인 사기전과범. <카운트다운>의 차하연에게서 곧장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 <다크>의 여주인공 무라노 미로가 떠올랐다. 연인을 자살에 이르게 하고 의붓아버지를 죽이려 떠도는 소설 속 여자를, 속내를 알 길 없는 차하연이 걸어온 과거라 우겨본다면 어쩌면 연결될지 모르지 싶은 평행이론적 추론. 두 여자 모두 불행했고, 자신 따윈 버릴 만큼 센 척하지만 결국 절실하게 희망을 바란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이토록 복잡다단한 여자가 충무로에 존재했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늠이 안 가는 이 여자의 진심이 궁금하더라.” 전도연은 이런 차하연을 ‘여배우가 소모되지 않고 돋보일 수 있는 배역’이라 정의한다. <밀양>과 <하녀>로 밟은 두번의 레드카펫과는 다소 동떨어진 장르 선택이다. “영화제용 영화를 따져보느라 선택이 늦어지는 일은 없다. 다작을 하기엔 흥미로운 여자 캐릭터가 너무 부족할 뿐이다.” 차하연은 전도연이 오랜만에 만난 승부할 만한 캐릭터, 연기 욕구를 일깨우는 대상이었다.
전도연에 관해서라면 사실 전작을 떠올리는 게 무의미할 정도다. <너는 내 운명>의 ‘은하’의 순정을 떠올리며 <밀양>의 ‘신애’가 연기한 처절한 절규를 분석해본들 우등생 전도연만 아는 연기공식의 답은 쉽사리 풀리지 않는다. 전작에서 다음 작품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일사천리로 감쪽같이 진행된다. 전략을 노출시켜 관심을 고조시키는 대신, 무방비 상태의 관객을 향해 결과물을 먼저 들이미는 식이다. <멋진 하루>의 ‘희수’가 <하녀>에서 딱 맞는 하녀복을 입는 순간 ‘은이’로 점프했듯이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쇼트커트로 머리를 싹둑 자르고, 눈매를 한껏 강조한 메이크업을 더하고 명품의상을 걸친 뒤 차하연 그대로의 모습이 장착됐다. 불과 30분이면 특유의 달변과 미모로 170억원 정도 찜해먹는 건 식은 죽 먹기인 팜므파탈형 사기꾼 차하연이 뚝딱 도출된다. 막상 그럼에도, 그녀는 이번 과정에 생긴 미세한 변화를 짚어낸다. “애초 전도연, 정재영을 놓고 쓴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그러니 감독님이 열어둔 부분이 많았다. 그걸 보고 처음엔 감독님이 너무 준비를 안하시는 거 아닌가 싶어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덕분에 반대로 내 의견이 반영되고 만들어가는 순서가 첨가됐다. 이런 작업도 나쁘지 않네, 하는 생각이 들더라.”
불안한 마음 다음으로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다 재미를 느끼는 일련의 과정. 전도연은 신인감독 허종호와의 작업을 이렇게 정리한다. “이창동, 임상수 감독 말곤 신인감독과의 작업이 대부분이었다. 기대할 지점이 있다면, 설렘이 있다면, 기꺼이 선택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모두들 전도연은 경력있는 스타감독이 아니면 작업 안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 선입견의 출처는 다소 짐작 가능하다. <접속>으로 멜로 장르의 혁명을 주도했을 때 <해피엔드>로 그녀가 과감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을 때 그 모험은 언제나 엄청난 성공을 불러왔다. 신인감독에 모험을 건 배짱 두둑한 여배우로 전도연의 공이 증발하는 대신, 그 자리엔 언제나 좋은 작품, 좋은 감독, 좋은 배우가 남는 식이다. “안주하는 게 무섭다. 어떤 타이틀의 전도연으로 불리거나, 그것에 만족하고 제3자의 기대치대로 하는 내가 되는 게 무섭다. 난 그들 생각과 다른 사람이고, 그 생각대로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언제고 버릴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일종의 헝그리 정신이라고 할까.” 전도연의 생산성의 근원은 이렇게 견고하다. 배우에 관해서는 오로지 철저함으로 임하는 승부사의 모습이지만 일을 떠나서라면? “가장 평범한 모습이고 싶다. 내가 잘 살고 있으면 되지 사생활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신비주의도 뭣도 아니고 그저 연기 열심히 하는 전도연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러니 마지막 답변은 역시 연기자로서의 포부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드라마도 하고 싶고……. 지금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