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렌스 맬릭 군단이 <트리 오브 라이프>의 제작기를 들려줄 때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유기적’(oraganic)이라는 단어다. 현장에서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에 몰두했던 이들도, 고립된 실험실에서 화학약품이나 컴퓨터와 씨름했던 이들도 한결같이 입에 올리는 단어다. <뉴 월드> 때부터 맬릭과 함께해온 제작자 사라 그린과 맬릭의 모든 영화에서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아왔던 잭 피스크는 특히 배우들과의 작업이 유기적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런가 하면 시각효과감독 댄 글래스와 시각효과 컨설턴트 더글러스 트럼블(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시각효과를 담당했던 인물로 당시의 기술을 이 영화에서 복원, 발전시키고 있다)은 “유기적인 결과물을 원했다”는 말로 작업 의도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자연스러운’(natural)이란 표현을 대신해 ‘유기적’이란 단어를 반복적으로 선택할 때 흥미롭게도 맬릭이 추구하는 자연의 잔혹한 이면이 드러난다.
맬릭의 이번 작품은 자연스러움에 대한 강박 아래 만들어진 한폭의 비자연이기에 (그 제작 과정이) 무시무시한 영화다.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맬릭은 자연을 닮거나 자연의 일부가 되려고 부단히 애쓴다. 그 노력의 흔적이 말 그대로 ‘트리 오브 라이프’에 나타나 있다.
높이 9m, 무게 3t의 ‘생명의 나무’를 운반하라
제목에도 쓰인 ‘나무’는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지만 가장 직접적이고 단순하게는 오브라이언가(家) 집 앞마당에 세워진 큰 떡갈나무를 가리킨다. 주변 풍경에 매우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이 나무는 사실 고강도 노동의 산물이다. 촬영지 수마일 밖에 있던 것을 뿌리째 옮겨 심은 것인데 그 무게만 3t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키 9m, 지름 9m의 나무는 운반에 적합하도록 밑동 9m를 쳐낸 뒤에야 고가도로, 고압전선, 케이블선 같은 장애물을 뚫고 이틀에 걸쳐 운반되었다. 심지어 중간에 나무가 죽지 않도록 근처 소방서에서 출동해 물도 주어야 했단다. 그러니 <트리 오브 라이프>의 자연은 실은 격심한 노동으로 떠받친 인위에 다름 아니다.
오브라이언(브래드 피트) 가족이 사는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맬릭과 피스크는 1950년대 분위기를 자연적 상태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장소를 찾아 오래도록 텍사스를 뒤진 끝에 스미스빌이란 마을을 발견했다. 그리고 마을의 일부 지역을 통째로 빌렸다. 긴 프로덕션 기간 동안 몇몇 집은 스탭들의 거주지가 되었고 몇몇 집은 촬영 스튜디오가 되었다. 감독과 배우, 스탭들은 여차하면 거리로 뛰어나가 카메라를 돌렸다. 이에 인근 주민들은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 21세기식 자동차들을 세 블록 밖에다 주차해놓고 걸어다녔다고 한다. 덕분에 배우들은 맬릭의 바람대로 햇빛, 바람, 흔들리는 나뭇잎, 나비의 날갯짓 같은 자연적 요소들과 기민하게 작용, 반작용할 수 있었다. 맬릭은 어린 소년들에게는 아예 대본을 주지 않기도 했는데 배우들이 대본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의 흐름을 느끼며 움직이길 바랐기 때문이다.
촬영감독 에마뉘엘 루베츠키의 임무는 배우와 주변 환경의 ‘유기적’ 운동을 민첩하게 포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포커스와 줌을 풍향이나 조도의 변화에 따라 신속하게 바꿀 줄 아는 집중력이 요구됐다. 그는 인물과 자연 사이로 카메라를 춤추듯 미끄러뜨리며 그물을 짰다. 맬릭은 그 그물로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감정을 붙잡으려 했다 한다. 이를 브래드 피트가 칸영화제 인터뷰에서 압축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맬릭)는 나비채를 들고 서서 진실의 순간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언뜻 자연스럽게 포획한 영상 같은 실내촬영분도 알고 보면 복잡한 가공과 설계를 거쳐 탄생한 이미지들이다. 맬릭은 인공조명을 전혀 쓰지 않고 자연광에만 의지했기 때문에 스탭들은 해가 뜨고 지는 방향에 따라 부산히 짐을 쌌다 풀기를 되풀이했다. 그들은 거실신을 찍을 땐 남향 거실이 있는 집으로, 침실신을 찍을 땐 남향 침실이 있는 집으로 옮겨다녀야 했다. 또한 아무리 남향이라도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창이 많아야 유리했기에 피스크는 세채의 집 내부를 전부 새로 디자인했다. 더불어 저녁신을 위해 집 안에 설치한 램프들도 더 크고 밝은 전구로 갈아 끼울 수 있도록 개조했다.
테렌스 맬릭 최초의 CG, 그러나 아날로그적인
이미지를 가공하지 않은 척 가공하는 방식은 22분간 우주의 태초를 그린 영화 속 영화를 만들 때도 사용되었다. 영화란 필름으로 촬영해야 하는 자연적 유기체라 믿는 맬릭은 <트리 오브 라이프>에 처음으로 CG를 도입하면서 트럼블과 시각효과 감독 댄 글래스에게 가급적 CG의 비율은 낮추고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들은 스미스빌 근처 텍사스주 오스틴에 ‘스컹크 연구실’을 차려 온갖 재료로 실험을 거듭했다. 예를 들면 우유를 튜브에 흘려보내며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자연의 역사, 우주의 풍경은 그렇게 완성된 것이다.
실험실에서 맬릭식 창세기의 반이 완성되었다면 나머지 반은 지구를 반 바퀴쯤 도는 수고를 들여야 했다. 범고래 사진으로 유명한 자연사 다큐멘터리스트 폴 앳킨스가 이끈 보조 촬영팀은 텍사스에서 맬릭의 작업 방식을 잠시 관찰, 터득한 뒤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풍경 사진을 채집했다. CG답지 않게 부드러운 ‘룩’의 공룡(<트리 오브 라이프>는 맬릭이 <천국의 나날들> 다음 작품으로 염두에 두었던 <Q>를 부활시킨 프로젝트라 할 수 있는데, 이 공룡 역시 <Q>에 등장시키려 했던 미노타우로스가 모델이다)이 출현하는 강줄기도 캘리포니아 북쪽에서부터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까지 찍은 수많은 필름 중에서 골라낸 배경이다. 실제로도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자세로 임했다는 루베츠키의 말처럼 4년에 걸쳐 촬영된 <트리 오브 라이프>는 자연과 역사에 대한 방대한 기록이 되고자 했다. 루베츠키가 찍은 필름만 하루 1만4천 피트(약 160분), 총 100만 피트(약 190시간)에 달했다고 하니 다른 팀의 촬영분까지 합치면 계산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 모든 필름들을 편집하는 데 또 3년이 걸렸다. 5명의 편집자들이 붙었는데도 칸영화제 출품을 1년 미뤄야 할 정도였다. 이 지난한 공정을 거치며 맬릭은 자연에 가장 가까운 그림을 얻고자 집착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트리 오브 라이프>는 신이 아닌 이상 천지는 공짜로 창조할 수 없음을 몸소 증명한 영화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