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는 구약 성서의 주인공 중 한명인 욥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착하고 부유했던 욥은 신의 시험을 받아 자식과 돈을 잃고 질병까지 얻었으나 신앙을 끝끝내 버리지 않아 신에게 다시 구제받는다. 영화는 그런 욥기의 한 구절로 시작한다. 대사들도 대사라기보다는 거의 내레이션이며 기도이며 고백이다. 왜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가. 이것이 욥기의 주제일 것이라고 어느 성경에 관한 해설서에는 쓰여 있는데, <트리 오브 라이프>의 질문도 외견상으로는 유사하다.
1950년대 미국 남부의 어느 평범한 가정. 다소 권위적인 아버지 브라이언(브래드 피트)에게는 자애로움이 넘치는 아내가 있고 세명의 귀여운 아들이 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이 사고로 죽는 참극이 벌어진다. 나머지 가족은 슬픔에 잠긴다. 영화는 브라이언의 세 아들이 아직 유년이었던 시간과 중년의 남자 잭(숀 펜), 그러니까 첫째아들의 시간을 서로 교차한다. 브라이언과 그의 아내와 그 아들들에 관한 고통의 이야기. 이것은 또 하나의 욥기인가. 사정은 복잡하고 핵심은 더 멀리 있다. 다만 지금은 <트리 오브 라이프>가 세계에 관한 문제를 짚기 위해 그 어떤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던 것처럼, 우리도 이 영화의 세계를 말하기 위해 맬릭 영화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할 뿐이다.
1973년에 등장한 맬릭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일원으로 분류되었으나 동세대의 그들과는 다소 비껴난 자리에 있었다. 혹은 가장 파괴적이었다. 순진하지만 잔인하고 심드렁하면서도 매혹적인 영화 <황무지>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빛나는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가공할 위력의 작품에 속할 것이다. 연이어 나온 <천국의 나날들>(1978)은 보다 감성적이고 로맨틱했으며 풍요로웠고 그로써 비극적 신화에 가까운 세계를 창조했다. 맬릭의 천재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때에 두 영화를 뒤로하고 돌연 맬릭은 저 유명한 20여년의 영화적 은둔에 들어간다.
에덴과 자연
그는 1998년에 <씬 레드 라인>으로 돌아온다. 20년 만에 돌아올 수는 있다. 그런데 그때 다시 와서 수많은 당대의 할리우드 배우들을 데리고 1942년 과달카날 섬의 전투지를 배경으로 한 전대미문의 전쟁 명상록을 존엄하게 연출해낸다는 건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맬릭 영화의 칭송받는 미학들, 이를테면 관찰자적 보이스 오버내레이션, 시정이 가득한 카메라의 유려한 움직임, 철저한 자연광에의 고집으로 얻어낸 마술 같은 빛의 조율, 무르나우에까지 닿아 있다고 평가받기도 하는 대사 없는 액팅과 숏의 편집 방식들, 극단적이고 매혹적인 클로즈업들, 그리고 서사극에의 의지. <천국의 나날들>에서 이미 선보였지만 놀랍게도 20년이라는 휴지기를 거치고 돌아온 <씬 레드 라인>에서 비로소 그것들은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 추가된 미학은 ‘다중 화자’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인데 이 방식을 맬릭은 <뉴 월드>와 <트리 오브 라이프>에까지 고수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씬 레드 라인>은 맬릭 영화의 숭고함이 빛을 발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17세기 초 아메리카 원주민과 영국 개척민의 이야기, 즉 포카혼타스를 주인공으로 한 <뉴 월드>(2005)는 유사한 미학을 추구했으나 실패작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많은 맬릭 영화의 지지자들이 그에게서 돌아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평가는 달랐지만 네편의 영화에는 주목할 만한 한 가지 공유점이 있다. 맬릭의 인물들은 끈질기게 피안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동경한다. 맬릭의 영화를 말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에덴’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이상하지 않다. 그의 오래된 관심은 신앙의 세계가 아니라 피안의 세계이고 에덴은 그에게서 종교적 땅이 아니라 비유로서의 낙원의 땅이며 그 때문에 문명의 저 바깥에 있는 어느 미지의 땅이거나 모성의 땅에 매혹을 갖는 경우가 많다. ‘자연’이라는 말이 에덴과 함께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이런 점들이 맬릭 영화에 관한 오래되고 중요한 해석들을 이끌었다. 순수한 자연의 삶을 전제로 인간과 신의 합일을 꿈꾸었던 미국식 초월주의의 대표자 랠프 월도 에머슨의 영향력이 그의 영화에서 엿보인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실상 종종 맬릭의 영화는 에머슨의 문구처럼 세계를 보는 “투명한 안구”가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해석은 <트리 오브 라이프>에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미국 문학의 초월론이 맬릭 영화의 하나의 지향이며 테마라고 인정할 수는 있다고 해도, 그 테마를 정작 느낄 수 있게 하는 활동성의 작인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이 점이 비로소 중요하다. 그의 피안의 세계는 무작정 안착되는 것으로 그려진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늘 어떤 대가를 감수해야 하며 성공하더라도 임시적이고 영원한 평화를 누리기에는 그보다 긴장의 상태가 더 완고하다. 이를테면 <황무지>의 주인공들은 그들이 마련한 자신들만의 숲의 안식처에서 쫓겨나야 하고 <천국의 나날들>의 주인공들은 아름다운 서부의 풍경 속에서도 결국 비극을 맞으며 <씬 레드 라인>은 지상낙원이 가까이 있는데도 전장에서 죽어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뉴 월드>는 문명과 원시가 사랑하되 또한 싸우는 형국의 영화다.
“우리는 그의 예술 안에서 로맨티시즘/리얼리즘, 정지/움직임, 느낌/이성을 발견한다. 그의 신화들은 또한 순수/경험, 자연/산업, 현실/환상을 포함한다.” 미셸 시망이 <천국의 나날들>에 관해 1979년 <포지티프>에 쓴 글을 보면 그는 일찌감치 그 점들을 감지했던 것 같다. 한편 평온한 원주민 부락에서 시작하여 전장으로 갔다가 다시 그 부락의 이미지로 끝나는 <씬 레드 라인>을 보는 경험에 관하여 한 평자는 말하기를 “우리는 에덴으로 시작하여 지옥으로 가고 에덴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에덴과 자연은 그러므로 도착하면 끝인 그런 종착지가 아니라 세계의 어떤 대당들을 활동시키기 위한 기본적 전제이면서 또한 추구와 같은 것들이다. 이 전제와 추구는 때로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주목할 만한 건 맬릭이 이런 대당 설정의 범위를 불규칙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넓혀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종종 더 멀리 나아가고 더 많이 거슬러 올라간다. 단순히 문화/반문화라는 동세대의 대당으로서 <황무지>를 시작한 것에 비하면 <뉴 월드>의 문명/원시라는 대당 사이에는 훨씬 더 큰 격차가 벌어져 있다. 누군가는 <뉴 월드>를 두고 <씬 레드 라인>의 프리퀄이라고 과장했다. 우린 지금쯤 더 과장해도 되겠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그 자체로 모든 맬릭 영화의 프리퀄처럼 보인다.
철저하게 더 개인적일 것 동시에 철저하게 더 우주적일 것. 맬릭은 그 명제를 두고 <트리 오브 라이프>를 극단적 양방향으로 확장하는 것 같다. 데뷔작부터 지금까지 함께 일하고 있는 프로덕션 디자이너 잭 피스크가 <트리 오브 라이프>의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 충격을 받은 이유는 여기에 맬릭의 사적인 이야기가 놀랄 만큼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알려져 있지 않은 맬릭의 가족사가 있다. 맬릭은 일찍이 두 동생을 잃었다. 동생 중 한명은 갑작스런 차 사고로 인해 엄청난 화상을 입었고 또 한 동생은 스페인으로 기타를 배우러 가서는 자살했다. 또한 맬릭은 아버지와의 “끔찍한 싸움”을 해왔다고 오래전에 털어놓은 적이 있다. 형제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와의 불화는 영화 속 브라이언가의 장남인 잭이 겪는 주된 갈등으로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다. 개인의 신상에 관해 밝히기를 꺼려하기로 유명한 맬릭이 전에 없이 자기의 가족사를 영화의 모태로 삼은 것은 일종의 사건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진화론과 창조론
영화에는 더 큰 사건이 있고 그건 우주에서 벌어진다. 영화의 초반부에 브라이언의 둘째 아들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는데, 이 장면 이후로 맬릭은 돌연 아주 이상하고도 장엄한 장면을 수십분간 공들여 보여준다. 우주와 지구의 생성에 관한 연쇄적인 이미지들이다. 영화는 우주가 빅뱅하고 지구가 태어나고 용암과 바람이 생성되고 이름 모를 미생물들로부터 각종 생명체들이 피어나고 마침내 거대한 공룡들의 시대가 올 때까지의 과정을 수십분간 공들여 보여준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브라이언 일가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스탠리 큐브릭만이 또는 지금은 위세를 잃은 것처럼 보이는 존 부어맨 정도만이 혹은 여전히 베르너 헤어초크만이 이런 우주적 이미지의 형상을 이토록 과격한 방식으로 서사의 한복판에 삽입할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한 인간의 죽음을 계기로 우주의 기원을 묻는다는 것은 존경스러운 질문의 방식이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우리가 보는 우주와 지구의 이 생성 이미지는 적어도 상식에 의존한다면 진화론의 이미지일 것이다. 이것은 창조론의 천지창조가 될 수 없다. 만약 창조론이라면 우린 창세기의 일곱날들에 관한 이미지들을 만나야 했을 것이고 결정적으로는 생물의 진화 과정을 거쳐 공룡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신이 숨결을 불어넣어 단숨에 빚어내는 아담과 이브의 초상을 보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아담과 이브가 없는 대신 공룡이 등장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영화 속 인물들이 끝내 멈추지 않는 행위란 바로 신에게 올리는 기도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 신에게 그들의 삶에 관하여 답을 구하고 있고 진화론으로 우주와 지구가 생성되는 그때에도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트리 오브 라이프>의 이 우주론은 이상한 우주론이며 모순의 우주론이다. 세계의 기원인 것처럼 보여지는 시각적 이미지는 진화론에 입각해 있지만 영화 내내 울려퍼지는 사운드는 창조론을 믿는 자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맬릭이 완수하고자 했던 이 대당의 관계를 누구보다 꿰뚫어본 것은 다름 아니라 브래드 피트였던 것 같다. 그는 “맬릭은 과학 안에서 신을 보고 신 안에서 과학을 본다”고 말했다.
이 흥미로운 생성 이미지의 끝 무렵에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존엄한 한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이 없었다면 우린 지금 이 영화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거대한 공룡 한 마리가 저 멀리서 천천히 화면 앞쪽으로 걸어온다. 거기 상처 입고 쓰러져 있는 작은 공룡 한 마리가 있다. 큰 공룡은 한쪽 발을 높이 들고서는 마치 작은 공룡의 얼굴을 짓밟을 것처럼 갖다 대는데, 그렇게 잠시 있다가 다시 발을 거두고는 유유히 저 멀리 사라져간다. 근엄하고도 위태롭고 자비로우면서도 또한 지배적인 이 공룡의 기묘한 행위는 형언하기 어려운 숭고한 분위기를 순간 형성해낸다. 이것이 “실패한 살의였는지, 애무였는지, 혹은 단순히 호기심이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평자도 있지만, 한 가지 추론은 가능한 것 같다. 이것이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는 동물적인 것의 어떤 위대함, 마치 공룡의 은총이라고 부를 만한 행위로 보인다는 것이다. 냉혹한 약육강식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는 이 진화론적 자리에 돌연 신적 자비심으로부터 배운 것 같은 은총의 행위가 공룡으로부터 나온다.
맬릭은 <트리 오브 라이프>를 개인적인 것과 우주적인 것으로 확장하고, 그 우주적인 것 안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모순을 형성하고, 때로는 진화론으로서 태어난 생물(공룡)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신적 은총의 제스처를 입힌 다음, 다시 브라이언 일가(즉 그의 개인적인 가족사가 반영된)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이때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집안의 가장으로서 권위적이고 폭압적인 힘을 행사하는 아버지의 행위를 강조하게 되는데, 그건 공룡에게 때로 납득할 수 없는 은총이 발견되듯이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 또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약육강식의 관계가 설정될 수 있음을 알리려는 맬릭의 의도일 것이다. 이때에도 역시나 대당은 재설정되는데 아버지가 위협적인 자연 또는 본성으로서 그려질 때, 어머니는 영원한 자비 또는 은총으로서 남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브라이언 일가의 이야기로 이렇게 영화가 다시 돌아왔을 때, <트리 오브 라이프>의 좋은 장면은 이미 다 지나갔고, 상영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며, 이 영화는 끝날 때까지 점점 더 나빠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크나큰 불행이다.
변증법, 그 실패
우리는 지금까지 최선의 호의로 맬릭이 <트리 오브 라이프>에 담고자 한 생각들을 유추하려 했다. 실은 “맬릭의 <씬 레드 라인>이 제임스 존스의 소설과 맬릭의 각색 사이에서, 또한 전장의 전투와 에머슨적 초월론 사이에서 어떤 변증법적 긴장감을 유지했던 것에 비하면,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의 그 (변증법적) 긴장감이란 맬릭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짐 호버먼)는 평가에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실패작, 야심찬 실패작이다. 양극단에 있는 이의적인 대당들이 상호 침투하여 새로운 감각의 성좌를 그려낸다면 그것이 한 창작물의 성공한 열린 변증법이다. 맬릭의 영화가 오랫동안 지향해온 영화적 활동성은(영화적 테마가 아니라) 다름 아니라 이 열린 변증법에 있었던 것 같다. 때로 그것은 성공했으나 종종 실패했다.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라면 이 변증법은 적극적이고 복잡하게 제시되고 시도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조직되고 활동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혹은 공룡의 행위에서처럼 부분적이며 일순간만 위대한 장면을 뽑아내기도 한다. 대개는 구현하려 한 것과 구현된 것, 개념과 감각의 차이를 극복해내지 못하고 있다. 브라이언 일가의 이야기와 우주 및 지구 생성의 이미지가 서로를 개념적으로 가리키고 연결하고는 있지만 감각적으로 상호 침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야심찬 우주 대서사시 혹은 우주 변증법이 실패한 주요 요인이다.
그러므로 더 구체적인 실패의 이유들을 추리자면 실은 별도의 글 한편이 요구될 것이고 당장에는 긴요한 정도만 결론삼아 축약해볼 수는 있겠다. 이 영화는 스스로 변증법으로 작동하길 원했으나 사실상은 현란한 기술적 편집(editing)에 의존하고 있을 뿐 철학적 편집(montage)의 흔적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이 이 영화의 숏들의 연결을 흐트러지게 내버려두고 유려한 무의식이라는 속임수까지 일으키고 있으며 기존의 맬릭 영화가 지녔던 정서와 정념을 휘발시키는 데까지 이른다.
몽타주. 우리는 러시아 감독들의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립’이라는 말 자체의 순수성에 기대어 말하는 중이다. 혹은 <트리 오브 라이프>의 숏들은 정서적으로 견인되고 있는가 묻고 있다. 순수하게 그 정서적 활동과 정념의 활동으로 생명을 얻었는가 묻고 있다. 앵글은 아름답고 현묘하게 찍혀 있는데 그렇게 잡힌 앵글의 숏들은 무의식과 기억을 흉내내거나 지적으로 만취되어 있어서 제각각 견인의 힘을 잃고 ‘조립’되지 않는다. 숏들의 견인이 그렇게 허물어지는 사이에 신은 감정적 고저가 무차별적이거나 거의 도식적이다(무서운 아버지. 자애로운 어머니. 상실한 남자. 에덴의 화해). 그 위를 누군가는 철학이라고 부르는 죽은 개념들이 무한정 흘러가고 있다. 결국 <트리 오브 라이프>는 아름다운 그림이 되지만 이 영화 자신이 긴요하게 바랐던 변증법적 긴장감은 상실한다. 그 때문에 <트리 오브 라이프>는 그림처럼(picturesque) 아름다울지 모르겠으나 영화적(cinematic)으로는 실패한다.
그런데 실패한 영화를 왜 이렇게 진지하고 길게 다루는가, 라고 묻는다면 기존의 철학이 영화적 철학으로 질적 전화하고자 할 때 무엇을 잃어서는 안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실패작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와 같은 일화를 전한다. 촬영감독 에마뉘엘 루베츠키는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첫 편집 완성본은 8시간이었고 지금 맬릭이 <트리 오브 라이프>의 여섯 시간 버전을 편집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우리가 본 것은 2시간17분이었다. 맬릭이 재편집 버전을 내놓은 경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6시간 버전이 완성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보아야 했으나 보지 못한 시간이 3시간33분이었다면, 혹은 맬릭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영화의 위대한 도전과 분명한 실패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맬릭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 ‘생명의 나무’의 실체를 본 것이 아니다. 굳이 본 것이라 한다면 가지의 어느 한쪽 나무의 밑동 어딘가 혹은 그걸 비추는 예고편을 본 것 같다.